141화 폭풍 속으로 (3)
“이, 이건 말도 안 돼…….”
블랙록의 길드장, 로버트가 멍하니 밑을 내려다보았다.
배 아래로 꿰뚫려 있는 칼날이 피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끝났군.”
촤아아악!
꽂혀있는 검을 비틀어 빼낸 성현은 순식간에 로버트의 목을 베어냈다.
그의 몸뚱이가 맥없이 옆으로 쓰러졌고, 그와 동시에 성현의 눈앞엔 메시지들이 번쩍 떠올랐다.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
.
로버트를 쓰러뜨리자 퀘스트를 완료되며 스탯과 경험치가 주어졌다.
꽤나 묵직한 메시지들의 알림에 반응한 성현은 상태창을 열어 보았다.
‘좋아, 퀘스트의 보상도 확실하네.’
[이름 - 이성현]
[칭호 - 운명의 대적자]
[레벨 - 420]
[직업 - 네크로맨서]
[주요 능력치]
힘: 915 민첩: 854 체력: 855 마력: 868
[보유 특성]
상태창(S), 그림자 군주(S), 백귀야행(S)
420레벨을 달성하며 한 발자국 더 훌쩍 나아간 성현의 능력치.
세 자릿수 스탯이 되었다며 기뻐하던 게 어제 같았는데, 이젠 천 단위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스탯을 올리는 게 마냥 쉬운 일이 아니긴 해도, 당장 해결할 퀘스트가 잔뜩 쌓여 있는 걸 생각하면 그건 전혀 문제 될 게 아니지.’
방금 퀘스트 하나를 완료한 참이었으나, 그가 받아들인 퀘스트들의 목록은 아직 한참이나 많이 남아 있었다.
그가 불과 몇 시간 전 받게 된 퀘스트는 외국에서 국내로 밀고 들어온 S급 헌터들을 제압하는 것이었다.
물론 대상이 모든 S급 헌터를 찍은 건 아니었고, 여기 있는 블랙록의 로버트처럼 각 길드를 이끄는 길드장급들만 해당되었다.
이제 그 많은 헌터 중 하나를 처리했을 뿐이다.
“다른 쪽의 정리는?”
“이제 막 끝낸 참입니다.”
성현의 말에 이즈나가 답했다.
블랙록 길드 뿐 아니라 이번 사태를 거든 다른 길드와 헌터들까지 모두 정리가 끝났다.
전투의 소음으로 가득 찼던 주변 거리들이 실제로 조용해진 모습.
블랙록이 아닌 다른 길드에선 그의 퀘스트 목표에 나타날 만한 거물급은 없었기에 대강 군단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피해 없이 정리가 가능했다.
“후, 그럼 완전히 끝났군.”
성현은 널브러진 로버트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온몸에서 피를 쏟은 그와는 달리 성현은 큰 상처 하나 없는 모습이었고, 실제로도 간단히 쓰러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로버트의 전력은 분명 만만치 않았다.
비록 용병 길드라고는 해도 전 세계에 이름이 알려져 있을 수준의 S급 헌터인 만큼, 보통의 실력자는 아니었고 거기다 새로운 힘까지 얻게 되었다.
유성 길드의 길드장인 유호준도 꼼짝없이 구석에 몰리며 고전을 면치 못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성현은 자신뿐만 아니라 여러 군주들과의 합공을 펼치며 로버트를 아주 간단히 제압해냈다.
기존 7대 길드장과도 한 차원 다른 성현의 실력에 군주급의 전력으로 수적 우위까지 점하자, 로버트도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결국 이렇게 시체가 되어 다른 나라에 와서 겁도 없이 깽판을 친 대가를 치른 것이다.
“물론 이제 시작일 뿐이지만.”
이번 습격을 손쉽게 막아 낸 성현이었지만, 이것만으로는 아직 본론은 시작조차 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로버트보다 훨씬 강한 헌터들이 세계엔 많았다.
시스템과 퀘스트가 전 세계의 S급 헌터들을 모조리 불러모은 것이라면, 정말 최상위의 실력자가 저 미지의 붉은 힘까지 부여받은 채 국내에 다수가 들어와 있을 거였다.
‘아무리 지금 내 힘이라도 그들을 막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다른 강자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이런 녀석들을 최대한 쳐내면서 퀘스트의 보상을 챙겨야 해. 경쟁자들보다 빠르게 말이지.’
여러 S급 헌터들 중 먼저 출발한 선발 주자들에 비하면 십여 년을 늦게 시작한 성현이다.
하지만 그는 늦게 시작한 격차를 무한한 사냥 공간 및 8배의 경험치를 제공하는 지하던전과, 상태창이 내어주는 퀘스트의 보상 덕에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퀘스트를 부여받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국내로 쳐들어온 S급 헌터들 역시 퀘스트의 이점을 갖게 되었고, 이제는 실력 싸움이라는 것이다.
“이성현… 네가 여긴 왜 나타난 거지?”
그때, 한쪽 다리를 조금 절면서 다가온 유성 길드의 길드장 유호준이 성현을 향해 말했다.
자기 영역에서 벌어진 두 길드 간의 싸움 도중, 갑자기 난입한 제3세력의 등장이다.
잔뜩 경계를 하고 있는 듯한 그의 모습에 이즈나의 표정이 슬쩍 찌푸려졌다.
“보면 몰라서 물어? 구해 준 거잖아.”
“구해 줘……? 너희가 우릴 왜?”
국내의 7대 길드들은 국적만 같을 뿐, 철저한 경쟁자의 입장이었다.
9대 길드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위기에 처한 서로를 구해 줄 이유 따윈 조금도 없었다.
차라리 이번 전투를 틈타 자신들을 통째로 먹어치우려고 찾아온 거라면 모를까, 순수하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고는 당연히 믿기 어려웠다.
“너희 길드원들이라면 조금도 안 건드렸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무슨 뜻이지?”
“괜히 여러 말 하긴 싫으니 바로 말할게. 우리에게 협력해라.”
성현이 유호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리 뛰어난 전력을 지녔든 간에 성현이 홀로 전국을 지켜내기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지스 길드 전체가 나선다 해도 감당이 어려웠다.
외국 헌터들이 온 지역을 통해 쏟아지고 있었고, 그를 막기 위해선 곳곳의 방파제가 필요했다.
“협력… 이라고?”
“당장 외국 길드들이 쳐들어온 마당에 국내 문제로 서로 다투고 있을 시간은 없어. 블랙록 정도가 끝이 아니라는 건 너희도 알고 있겠지. 더 많은 외국 길드들이 본격적으로 공격해 오기 시작할 거야. 나라고 해도 그걸 다 막아 내기는 무리고. 그래서 너희의 협력이 필요해.”
이대로 힘이 빠진 유성 길드를 무너뜨리는 것 자체는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당장 유성 길드를 밀어 버리고서 구역들을 먹어치운다고 해봐야 막아 내야 할 지역만 더 커질 뿐.
지금 상황에 필요한 것은 이미 해당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국내 길드들의 협력이었다.
“만약 거절하겠다면?”
“글쎄, 피차 선택의 여지는 없어 보이는데. 내가 여기서 조용히 물러난다고 해도, 앞으로 몰려들 길드들을 감당할 수 있겠어?”
“하…….”
유호준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방금 저들의 저력을 확인한 그로선 피차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성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성현은 말했다.
“대강 뜻은 통한 것 같으니. 일단 나와 같이 가줘야겠어. 자세한 이야기는 그 뒤에 하자고.”
“같이 가자니, 그게 무슨 소리지?”
“아무래도… 손님이 더 찾아온 모양이거든.”
* * *
블랙록이 여러 길드들과 함께 치고 들어와 여러 도시가 파괴된 충청 지역과는 달리.
다른 지역들은 아직 그 정도로 심하게 공격받진 않았다.
퀘스트 보상에 눈이 멀어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던 용병 출신의 헌터들과는 다르게, 대부분의 대형 길드들은 그런 방식을 선호하진 않은 탓이었다.
다만 이미 놈들의 움직임은 시작되어 있었다.
그들은 길드의 각 거점들을 무너뜨리며 국내의 여러 지역을 빠르게 점령해 나가는 중이었고.
비교적 굳건하게 외국 헌터들의 유입을 틀어막고 있던 수도권에도 금방 그들의 마수가 닿았다.
콰직!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받는 태산 길드의 지부들.
산하 길드와 본 길드의 지부를 가릴 것 없이, 경기 북부 지역 전체에 걸쳐 대규모의 외국 헌터 무리가 들이닥쳤다.
조용히 지역 내로 숨어든 헌터들에게 급습을 받은 것은 순식간이었다.
당연히 지부들의 입장에선 제대로 대응할 새도 없었고, 반격은커녕 유의미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처음부터 제대로 준비를 해온 이들이었기에, 태산 길드의 헌터들로선 기껏해야 본사에게 겨우 연락을 닿아 이 사실을 알리는 게 전부였다.
“길드장님, 놈들이 이미 연락을 취한 모양입니다. 태산 길드에게 저희에 대한 소식이 들어갔을 겁니다.”
“우리가 눈먼 장님하고 싸우는 것도 아니고. 당연히 그렇겠지.”
쓰러진 시체들이 쌓인 방 안.
렙솔의 길드장 ‘이마즈’가 자신의 부하에게 보고를 듣더니 말했다.
그는 스페인을 양분한 거대 길드와 그에 소속된 수만 명의 길드원을 이끄는 수장으로서, 이번 대대적인 공세를 결정한 장본인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한국의 거대 길드를 상대하는 만큼, 마냥 삼류 국가의 길드들처럼 손쉬울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물론 그래 봐야 큰 차이는 없겠지만.’
이마즈의 입가가 옅은 조소가 피어올랐다.
만약 시스템의 변화가 없던 과거였다면, 지금처럼 과감한 움직임을 보이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 내에서 그들의 상대가 될 만한 길드라고는 얼마 전 놀라운 행보를 보였다는 이지스 길드뿐.
퀘스트와 이 미지의 힘까지 얻은 자신들을 상대로 조금이라도 변수가 될 수 있을 만한 세력은 그들이 유일했다.
“인제 와서 놈들의 수뇌부에게 연락이 가봤자, 제대로 된 대응 전력을 꾸린 뒤 이곳에 닿으려면 시간이 걸릴 거다. 우린 그동안 남은 놈들의 지부를 모조리 무력화시키면 돼. 어차피 우리의 본상대는 이놈들이 아니니…….”
“틀렸어.”
콰아아아앙!
“큭……?”
갑작스러운 요란한 폭발에 방 안의 한쪽 벽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여파에 휘말린 길드원들이 그대로 나가떨어졌고, 난입해온 남자가 잔해를 잘근 밟으며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네놈은 뭐지……?”
“네가 밟고 있는 건물의 원주인이다.”
태산의 길드장, 김진욱이 입을 열었다.
살벌한 기세를 띠고 있는 그의 모습에 이마즈는 곧장 그의 정체에 대해 알아챌 수 있었다.
“태산 길드의 길드장인가? 벌써 나타날 줄은 몰랐는데.”
“너희 딴에야 조용히 다녔을지 몰라도, 다른 놈들이 전국 곳곳을 들쑤시고 다니는데 모를 수가 있어야지.”
“하, 어차피 나야 어느 쪽이건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좋지. 길드장부터 죽이면 나머지 잔당들을 처리하는 건 더 쉬워질 뿐이니까!”
츠츠츠츳!
이마즈의 온몸에서 붉은 기운이 흘러넘쳤다.
손꼽히는 S급 헌터임은 물론, 한 국가를 양분하던 거대 길드의 길드장 급인 그에게 새로운 힘까지 주어졌으니.
용병 길드를 이끌던 로버트하고는 그 기세부터가 완전히 달랐다.
“저게 녀석이 말했던 그 힘인가…….”
특히나 지하 던전과 가디언의 존재를 마주해 온 성현이라면 모를까, 김진욱으로서는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누군가에게서 이야기를 전해들은 덕분이다.
그것도 아주 자세하게.
“인정하긴 싫지만… 역시 나 혼자서는 무리일 수 있었겠군.”
“그러게 쓸데없는 고집 부릴 것 없다 했지.”
김진욱의 뒤편에서 불쑥 끼어든 목소리.
무너진 건물의 벽 사이로 검제 진서연이 나타났다.
“너… 너는……?”
이마즈는 그녀의 등장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인천 지역에 있어야 할 백룡의 길드장이 이 곳에 불쑥 나타나리라고는 전혀 예상조차 못 한 탓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녀 혼자만 이곳에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뒤편엔 백룡 소속의 고위 헌터들이 잔뜩 늘어서 있었고, 이는 단순히 우연이 아님을 드러냈다.
“그런 뭔지도 모를 힘을 빌려온 녀석들에게, 지켜야 할 매너 따윈 없겠지.”
스릉!
한국의 두 S급 헌터이자 7대 길드장, 김진욱과 진서연은 동시에 검을 뽑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