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폭풍 속으로 (2)
콰아아아앙!
연달아 굉음이 터져 나오며 건물 한 켠이 무너져 내렸다.
피어나는 흙먼지 사이로 창을 든 남자가 나타났다.
“쥐새끼처럼 잘도 도망을 다니는군.”
유성의 길드장, 유호준.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탐색전일 뿐이다.”
커다란 도끼를 든 거구의 남자가 대꾸했다.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블랙록의 길드장, 로버트였다.
은밀히 국내로 들어와 유성 길드를 먼저 공격하기 시작한 그들이었고, 결국 두 길드의 수장은 이렇게 전장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물론 길드의 규모로 보나 개인적인 무력으로 보나 이 둘이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탐색전? 그러다 죽을 텐데.”
유호준의 입가가 피식 올라갔다.
양쪽 모두 쟁쟁한 S랭크의 실력자라곤 해도 객관적인 전력에서는 유호준이 우세했다.
유호준은 과거 십여 년 동안 국내 9대 길드 중 한 자리를 굳건히 차지해 온 이였다.
블랙록이 아무리 거대한 다국적 길드라고는 하나, 용병 길드라는 뚜렷한 한계가 있었고 그런 그들에게 호락호락 당할 만한 유호준과 유성 길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상황은 바뀌었다.
“굳이 내 힘을 다 꺼내야 할 만한 녀석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거든. 이 정도라면 문제될 건 없겠어.”
“네놈에 대한 이야기라면 들어왔다. 허세를 부려 봐야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모든 힘을 사용해 주지.”
츠츠츠츠츳!
로버트의 온몸에서 붉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한눈에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기운.
갑자기 솟아난 그 미지의 힘에 깜짝 놀란 유호준의 표정이 뒤바뀌었다.
하지만 잠깐의 틈도 주지 않고서 로버트는 땅을 거칠게 짓밟고 발을 박찼고, 순식간에 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급소를 노리며 매서운 기세로 휘둘러지는 도끼의 난격.
싸움 중 평정심을 잃지 않던 그마저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갑자기 급변한 로버트의 움직임이다.
이전과는 비교가 어려울 만큼 훨씬 빠르고 힘이 있었다.
방금 전까지 여유롭게 상대한 녀석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 역시 이 힘이다. 이대로 천천히 요리해 주지.”
기세를 탄 로버트의 입가가 씩 올라갔다.
* * *
붉은 힘이 끼어들면서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상황.
심지어 이러한 상황은 전장의 다른 S급 헌터들 간의 대결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었다.
블랙록 소속의 S급 헌터들은 모두 길드장 로버트와 같은 붉은 기운을 띄기 시작했고, 증폭된 능력치를 토대로 유성 길드의 간부들을 완전히 압도하였다.
후방을 들쑤시고 다니는 타 길드의 게릴라 때문에 애를 먹었을 뿐.
분명 정면 대결에서는 유성 길드가 훨씬 우세였음에도, 그 상황과 전력이 단번에 뒤집어진 것이다.
“커헉……!”
무릎 꿇은 유성의 최고 간부가 후두둑 피를 토해 냈다.
사지는 겨우 멀쩡히 붙어 있다만 이미 속이 진탕이 된 지라 팔의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승부는 이미 결판난 상황.
“그러게 발악을 해 봤자라고 했을 텐데. 바뀐 시스템 속에서 뒤쳐진 한국 헌터들이 할 수 있는 건 이제 아무것도 없다.”
“닥… 쳐!”
“보고 있는 게 애잔할 정도니. 이만 끝내 주지.”
남자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하지만 검을 들어 올려 그의 목을 베어 가르기 직전.
콰아아아앙!
바로 옆의 벽이 터져 나가며, 주먹이 뻗어져 와 남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강타했다.
“커헉……!”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블랙록의 헌터는 바닥을 한참 나뒹굴었다.
주먹으로 내다 꽂아 버린 여자의 등장.
그녀의 얼굴을 본 남자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너, 너는 이지스의……?”
이지스 길드의 간부, ‘이즈나’.
새하얀 머리를 늘어뜨린 그녀의 모습에 유성의 간부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를 비롯한 군단의 마족 군주들은 이미 이지스의 간부로서 국내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의 유명세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젠장! 어떤 새끼냐!”
벌떡 일어난 남자가 버럭 소리쳤다.
코뼈가 부러진 건지 비뚤어진 코에선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혈향에 피식 웃은 뱀파이어 로드, 이즈나는 입맛을 쩝 다셨다.
“그분의 그림자 아래 합류한 이후로, 굳이 피를 섭취할 필요가 없긴 하지만, 너한테서 조금 더 쏟아 내게 하고 싶은걸.”
“이 새끼가 무슨 헛소리를… 유성의 간부도 아닌 것 같은데, 뭐 하는 년인진 몰라도 죽여 주마!”
카아아앙!
순식간에 달려든 남자가 검을 휘둘렀다.
격분한 그의 기세는 확실히 위협적이었고, 빠른 움직임과 묵직한 힘이 어느 것 하나 빠질 게 없었다.
어지간한 기존의 S급 헌터들을 상대로는 손쉽게 우위를 점할 만한 전력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즈나는 그의 공격들을 가볍게 받아쳤다.
“큭……?”
이즈나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한 남자.
이제야 알아차린 사실이지만, 검은 그림자를 품고 있는 그녀는 다른 헌터들과는 뭔가 달랐다.
카아아앙!
‘뭐, 뭐야. 이건 말도 안 돼……!’
남자의 눈동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흔들렸다.
그들이 알기론 한국의 헌터들은 그 누구도 이 붉은 축복을 받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시스템이 부여한 퀘스트 역시 마찬가지다.
덕분에 원래는 홀로 공략이 불가능할 유성 길드마저도 자신들이 간단히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실제로도 적의 최고 간부를 압도적인 차이로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붉은 힘으로 증폭된 그의 힘도 속도도, 모두 그녀가 몇 수 더 우위에 서 있었다.
그들의 몸에 서린 붉은 기운과는 다른, 검은 그림자.
그 속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무언가가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촤아아악!
“크아아아악!”
남자의 허벅지가 깊게 베이며 피를 잔뜩 쏟아 내었다.
하지만 그가 고통을 추스를 시간도 없이, 이즈나는 탄력이라도 받은 듯 더욱 검의 속도를 끌어올렸다.
순식간에 남자의 팔과 다리를 베어 버린 이즈나는, 완전히 방어 자세가 풀린 그의 몸을 반으로 베어 갈랐다.
쩌어어억!
갈라진 남자의 시체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즈나는 무심한 듯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었고, 그 광경을 모두 목격한 유성의 간부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소문으로 듣던 실력 이상… 아니, 대체 여긴 어떻게……?”
“곤란을 겪고 있는 것 같길래. 도와주러 왔다. 너희가 최소한 이 녀석들보다는 나을 테니까.”
츠츠츠츳!
“키이이이익!”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이즈나의 뒤편에선 검은 기운과 함께 괴수들의 군단이 쏟아져 나왔다.
도시를 가득 메우며 진격하기 시작한 거대한 그림자의 군단.
그를 목도한 남자의 입이 쩍 벌어졌다.
* * *
“크아아아악!”
“모, 몬스터다!”
두 헌터 길드 간의 전쟁 도중.
난데없이 쏟아지는 몬스터들로 인해 도시 전역에서 난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소란스럽게 갑자기 무슨 일이야?”
인상을 찌푸린 로버트가 중얼거렸다.
한창 싸우고 있는 와중에 사방에서 어수선한 소란이 일고 있었다.
물론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거리가 떨어져 있는 곳에서 벌어지는 소란이긴 했지만, S급 헌터인 그들에겐 잘만 느껴지는 일이다.
저 너머에서 몬스터들이 헌터들과 뒤엉키며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서울 쪽에서 던전과 관련된 이상 현상이 생겼다더니. 이번엔 이쪽 지역에서 던전이라도 열린 건가?”
‘아니, 그런 게 아니다. 저 그림자는…….’
지쳐있던 유호준의 눈동자가 동요라도 한 듯이 흔들렸다.
퀘스트만을 목적으로 외국에서 들어와 국내 사정에 비교적 어두운 로버트는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주변 세력들의 분석을 언제나 이어가던 유호준으로선 수없이 많이 봐 온 광경이었다.
멀찍이서 느껴지는 기척으로만 봐도 알 수가 있었다.
“어찌 됐건… 몬스터들이 여기까지 들이닥쳐서 귀찮게 굴기 전에 슬슬 끝을 맺자고.”
로버트의 시선이 유호준에게로 향했다.
온몸 곳곳이 상처투성이가 된 유호준과는 달리, 로버트는 거의 말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거기다 숨을 거칠게 내뱉고 있는 것 또한 유호준뿐.
‘젠장… 완전히 말려 버렸다.’
힘겹게 창을 움켜쥔 그는 이를 빠득 갈았다.
온몸에 입은 데미지와 체력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이미 한계에 달한 유호준의 상태였다.
붉은 힘을 손에 넣은 로버트는 단순히 힘과 민첩함뿐 아니라, 체력 역시 상대의 우위에 서 있었다.
붉은 기운을 토대로 모든 스펙상의 우위를 점하고도, 오래 시간을 끌어가며 천천히 싸움을 이어간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어차피 이미 주변 상황이 유리한 마당에, 변수를 내어주지 않겠다는 의미다.
덕분에 유호준이 7대 길드의 길드장답게 불리한 싸움 와중에서도 날카로운 노림수를 몇 번 보이긴 했지만, 해외에서 수없이 구르며 실력을 기른 로버트는 순순히 당해 주지 않으며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 냈다.
타악!
하지만 싸움을 끝내려는 로버트가 마지막 공세를 위해 성큼 발을 내딛으려는 그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승부를 보려면 빠르게 끝냈어야지. 이렇게 요란하게 도시를 들쑤셔 놨다면 더더욱 말이야.”
“뭐, 뭣……!”
콰아아아앙!
주먹이 내다 꽂히며 바닥이 지진이라도 난 듯 쩌저적 갈라졌다.
놀라운 반응 속도로 겨우 몸을 빼내며 피한 로버트였지만, 갑작스럽게 등장한 기척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군주, 뼈의 왕 ‘자고스’의 그림자를 흡수하였습니다!]
[‘망령의 혼’ 특성이 활성화됩니다!]
츠츠츠츳!
녹색 빛으로 감싸였던 성현이 나타났다.
이지스의 길드장이자 세계 유일의 S랭크 네크로맨서.
기존의 최강자 둘을 쓰러뜨리고, 한국 내에서 가장 주의를 요하는 인물인 그의 등장에 로버트는 저도 모르게 팔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네, 네놈이 여긴 왜? 유성 길드와는 아무런 접점이 없을 텐데.”
“아무런 접점이 없다고? 너희들이 와서 깽판 치고 있는 나라가 어디인지나 제대로 보지 그래.”
성현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굳이 고함을 치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의 살벌한 기세에 로버트는 잠깐이나마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고 말았다.
‘이런 젠장!’
원래의 계산대로라면 이번 싸움에서 그들이 상대할 것은 유성 길드뿐이었고, 이지스 길드는 이번 퀘스트의 보상을 잔뜩 챙긴 뒤에나 가능성을 계산해 볼 상대였다.
한데 이렇게 완전히 예상 밖의 변수가 끼어들고 말았다니.
“네놈들의 경쟁자를 제거해 주는 거다! 이걸 방해하려 들다니! 이런 멍청한 자식……!”
“미안하지만 내 경쟁자 같은 건 없어.”
쿠우우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괴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건물의 사이사이, 각 거리들을 가득 메운 군주와 괴수들.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칠흑 같은 그림자가 사방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그아아아아!”
사방에서 터져 나온 군단의 포효에 도시가 쩌렁쩌렁 울렸다.
다루는 소환수의 수가 수만, 수십만에 달한다는 S급 네크로맨서의 소문.
소문으로 듣기야 했지만 당연히 바다를 건너며 엄청난 과장이 섞여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아무리 S급 헌터라 해도 그 많은 몬스터가 네크로맨서 한 명의 소환수일 리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 소문의 진상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고.
새하얗게 질린 로버트의 얼굴은 빛을 잃고 말았다.
“겁도 없이 이 땅에 발을 들인 걸 후회하게 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