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실마리 (4)
검을 빼든 가면인이 성현을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특성의 힘을 받은 듯한 현란한 움직임에 더해, 단숨에 그의 목을 도려내기 위한 날카로운 검로.
S급 헌터의 실력다웠다.
카아아앙!
하지만 성현은 상대의 검을 여유롭게 받아냈다.
그의 실력으로는 성현을 결코 이길 수 없었다.
‘지금 보인 전투 방식은 드문 케이스가 아니라 누군지 가늠은 가지 않아. 하지만 잘 쳐줘 봐야 S랭크대 중상위 정도에 불과한 건 확실해 보인다.’
길드를 이끄는 최정상급들의 헌터들을 쓰러뜨리고, S급 헌터만 수백 단위가 넘었던 천하 길드와의 전쟁까지 치른 성현이다.
고작 S랭크 헌터 몇 명에 호들갑 떨 단계는 지났다는 것.
눈앞의 남자 정도야 굳이 소환수를 꺼내들지 않아도 손쉽게 정리가 가능했다.
‘하지만…….’
성현은 긴장의 끈을 조금도 놓지 않았다.
조금 전부터 남자의 몸 주위로 일렁이는 붉은 기운이 굉장히 눈에 익은 탓이다.
그리고 곧, 아니나 다를까 남자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가속되었다.
쩌어어엉!
‘이 자식 역시……!’
검을 맞닿은 성현이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가면을 쓴 남자가 쏟아내는 검격이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단순히 힘을 숨기고 있었다기엔 지나치게 급격한 변화.
아예 정면으로 부딪힌 성현과의 힘 싸움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이건 지하 던전의 몬스터들에게 주어졌던 그 정체불명의 힘과 똑같잖아……!’
두 번째 가디언 ‘니아글리프’가 발생시켰던 특이 현상.
몬스터들이 일제히 저 붉은 힘을 받아들이고선 급격한 전력의 증가 폭을 보였고, 그건 붉은 기운을 풀풀 풍기기 시작한 저 가면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나 일어난 현상으로 보나, 착각이라곤 할 수 없을 만큼 영락없이 그 때와 판박이였다.
‘하지만 그런 현상이 인간, 그것도 던전 밖의 헌터에게 발생하다니… 이게 말이 된다고?’
당시 가디언의 붉은 힘이 강화시킨 것은 오로지 몬스터들뿐이었고, 그 범위에 사람이 적용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니아글리프를 격파한 이후로는 세 번째 가디언이 발견된 적도 없었다.
“그 힘은 대체 어디서 얻은 거지?”
“네가 죽길 바라는 무언가에게서.”
“뭐……?”
“아직 다른 데 정신을 둘 여유가 있나 보지?”
콰아아아앙!
남자의 발길질 한 방에 땅이 쩌저적 갈라졌다.
순간 균형이 무너진 성현에게 남자가 코앞까지 다가섰고, 놀라운 속도로 성현의 목을 노렸다.
카가가각!
간신히 회피했지만, 곧 이어서 쏟아지는 검격.
성현은 다급히 상대의 공세를 막았고, 방금 전까지 남자를 상대로 보일 수 있었던 여유는 온데간데없어졌다.
저 붉은 힘이 정확히 헌터에게도 같은 효과를 내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전에 몬스터들을 상대하며 파악된 것들로 따지면, 거의 모든 능력치를 증폭시켜 주는 강력한 힘이다.
게다가 앞뒤 따지지 않고서 무작정 달려드는 몬스터들과 헌터들은 달랐다.
헌터들은 주어진 힘을 훨씬 제대로 다룰 수 있었고, 몬스터들에 비해 실질적인 전투력의 증가폭이 더욱 컸다.
그렇지 않아도 경험이 풍부하고 머리를 굴릴 줄 아는 S급의 고위 헌터들에게 강력한 무기를 쥐어준 셈이다.
대체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가지 않아, 성현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어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띠링!
[돌발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당신의 목숨을 노리는 눈앞의 모든 적을 제거하십시오!]
“이건……?”
그때, 성현은 자신의 눈앞에 번쩍 떠오른 메시지를 마주했다.
성현이 잠시 멈칫한 사이를 노리고서, 남자는 빈틈을 노리고서 검을 휘둘러왔다.
하지만 성현은 그의 검을 힘차게 받아쳤다.
“그래, 일단 너부터 치워야지.”
싸늘해진 성현의 눈빛이 남자에게 향했다.
떠오른 메시지 덕에 복잡했던 그의 머릿속은 간단해졌다.
“하, 그럴 일 따윈 없을 거다. 이 힘을 얻고 난 이후, 난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으니까……!”
코웃음을 친 남자가 더욱 속도를 올리며 성현을 몰아붙였다.
그렇지 않아도 속도를 강점으로 지닌 S랭크 헌터에게 더 빠른 속도를 건네준 붉은 힘.
동시에 그가 뻗는 한 방 한 방의 모든 공격들이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원래의 힘이었다면 성현과 대등한 싸움 따위는 꿈도 꾸지 못할 격차였지만, 그런 성현조차도 쉽게 감당할 수 없게 만들었다.
터엉!
“이대로 끝내 주마!”
주르륵 밀려난 성현을 향해 남자는 호기롭게 달려들었다.
이미 싸움의 기세를 거의 다 잡은 상태였고, 그대로 승기를 굳히며 결판을 낼 셈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군주, 오우거 왕 ‘몰고르’의 그림자를 흡수하였습니다!]
[‘괴력’ 특성이 활성화됩니다!]
성현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칼날을 그대로 받아쳤다.
서로 온 힘이 다해진 검격과 검격의 충돌.
그 결과는 일방적이었다.
콰아아아앙!
“커헉……?”
굉음과 함께 튕겨 나간 남자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백귀야행 특성을 통해 몰고르의 괴력을 가져온 성현은 붉은 힘을 사용하며 달려든 그를 아예 정면에서 힘으로 찍어눌러 버린 것이다.
“크으윽……! 이, 이럴 수가…….”
형편없이 튕겨져 나간 남자는 팔을 움켜쥐었다.
단순히 나가떨어진 수준이 아니라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서 팔이 골절되었다.
새로운 힘을 받아들이며 결코 지는 게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던 싸움이다.
한데 지금 이 상황은 그로선 도저히 영문조차 모를 일이었다.
터억!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남자는 튕겨 나감과 거의 동시에, 재빨리 정신을 차리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정신이 없다고 한들 넘어진 상황 속에선 베테랑 헌터들에게 기본적인 본능과도 같은 행동이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빠르게, 성현은 그의 코앞까지 도달하여 있었다.
“나도 하던 짓이지만 가면 쓴 녀석하고 싸우는 게 그리 유쾌하진 않네. 일단 그것부터 치워 주지.”
콰아아앙!
성현은 막 일어서려 팔을 짚은 남자의 안면을 그대로 걷어찼다.
엄청난 충격과 함께 날아간 남자.
얼굴이 강타당하며 당연히 그 앞에 씌워져 있던 가면은 아예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고, 피투성이가 된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컥……!”
“이제야 좀 보이네. 잠깐, 너는…….”
맨 얼굴의 남자를 본 성현이 손가락을 들었다.
구면은 아니었다면 익히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거기다 남자의 외투 옷자락까지 일부 뜯어지며 그의 소속이 드러나 보였다.
안쪽에 감춰져 있던 선명한 길드의 문장.
“어디서 온 녀석들인가 했더니, 일본 길드였군.”
성현의 입가가 피식 올라갔다.
일섬 길드에서 찾아온 일본의 헌터들이다.
“하지만 너희가 뜬금없이 날 노릴 만한 이유가 없을 텐데. 뭐 하러 서울에까지 찾아온 거지? 그 힘은 또 어디서 얻은 거고?”
일섬 길드라면 일본 내 세력 구도에서도 열 손가락 중 끝자락에 불과한 위치에 놓여있었다.
일본 내에서도 확고한 자리를 차지한 게 아닌 와중에 굳이 한국으로 넘어올 이유 따윈 없었다.
“네놈에게 그런 걸 설명할 이유 따윈…….”
“아직도 버티려고? 승부야 결판났으니 슬슬 마무리를 하자고. 기왕이면 들을 것도 다 듣고.”
“웃기지 마라!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섬의 길드장이 버럭 소리치며 무기를 잡았다.
방금의 타격으로 코뼈가 무너져 내리고, 시야가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물론 이는 단지 정신력만으로 이루어진 행동이라기보다는, 버틸 수 있는 체력까지 비약적으로 상승시켜 준 붉은 힘 덕분이 컸다.
만약 이 힘을 받지 않았다면 진즉에 기절해서 의식이 날아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힘에 기대는 것도 한계가 있기 마련.
콰아아앙!
성현은 가차 없이 남자를 내다 꽂아 주었고, 그는 피를 한껏 토해내며 바닥에 뻗었다.
더 이상은 손가락 하나 까닥일 기력조차 없었다.
“아직 힘을 얻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나 봐. 전투 스타일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것처럼, 늘어난 힘에 비해선 전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군.”
“큽…….”
“말해. 무슨 짓을 한 거지?”
필사적으로 꿈틀이던 남자의 팔을 잘끈 밟아 준 성현이 말했다.
그가 함께 이끌고 왔던 일섬의 길드원들은 이미 메이트리아와 벤시들에게 제압이 모두 끝나 있는 상황.
승부는 결판이 났다.
그러자 길드장의 시선이 성현에게 향했다.
“…나도 이 힘이 뭔지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건 확실히 알게 되었지. 밀려나기 전에 가장 먼저 널 제거하려 했는데, 실패했군.”
“가장 먼저라니. 마치 날 죽이기 위해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경쟁을 하는 게 맞다. 전 세계의 S급 헌터들이 네 목을 노리고 다가오는 중일 테니까.”
“뭐……?”
성현의 표정에 당혹감이 서렸다.
* * *
‘수라’ 길드.
7대 길드 중 영남 지역을 차지한 거대 세력이자, 지방 길드를 대표하는 길드였다.
비록 수도권과는 거리가 있다고 해도 드넓은 영역을 토대로 큰 규모와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덕분에 지난 십여 년의 세월 동안 자리를 잡은 이후, 그들은 단 한 번도 외부 세력으로 인해 흔들린 적이 없는 굳건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초창기 시절 백룡이 세력을 뻗으려던 천하 길드를 수차례 무찌르며 구역을 지켰듯.
수라 길드도 일본에서 국내로 진출하려는 수많은 세력을 저지해 왔다.
해외의 거대 길드들로부터 국내를 지켜냈다는 자부심이 그들 길드의 근본 중 하나로 자리잡아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굳건할 줄만 알았던 그들도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뭐 하고 있는 거야! 어서 빨리 본부에 연락을 하라니까!”
“이게 완전히 먹통인 걸 어쩌라고!”
“젠장, 놈들이 벌써 여기까지……!”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어! 어서 막아!”
쿠당탕!
“죽여라!”
건물 안으로 들이닥친 헌터들이 검을 휘둘렀고, 양 길드의 헌터들이 뒤엉키며 살벌한 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박살나는 벽과 흩뿌려지는 핏자국.
수라의 길드원들은 하나둘 쓰러지고 말았다.
좁은 통로를 이용해 최대한 버티려는 그들이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산하 길드가 아닌 직속 지부였고 고위 헌터들 여럿 포진되어 있는 장소였기에 결코 쉽게 당할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싸움은 일방적인 양상으로 이루어질 뿐이었다.
완전히 격이 다른 상대의 힘들에 속수무책으로 밀려났고, 온통 피투성이가 된 건물 안엔 수라 측 길드원의 시체들만이 나뒹굴었다.
“네… 네놈들은 대체……!”
“알 것 없다.”
촤아아악!
붉은 피가 흩뿌려지며 벽지와 바닥을 적셨다.
축 늘어진 시체를 짓밟은 헌터들이 건물 안으로 지나쳐 갔다.
“벌써 끝인 건가. 원래대로라면 이런 잔챙이들까지 일일이 상대해 줄 이유 따윈 없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다르지.”
남자의 시선이 슬쩍 옆으로 향했다.
곧이어 나타난 시스템 메시지 창이 그의 시야에 나타났다.
띠링!
[퀘스트가 일부 완료되었습니다!]
[목표를 파괴하여 부분 보상을 수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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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만이 아닌 주변의 모든 헌터에게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 메시지창.
남자의 입가가 씩 비틀렸다.
“퀘스트라… 이거 재미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