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실마리 (2)
“뭐라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게 전부인가?”
드넓은 던전의 내부, 휑한 숲속의 성현이 우두커니 선 채 중얼거렸다.
수도권 전 지역에 등장한 기습적인 몬스터들의 습격이다.
그는 악마종이라는 녀석들까지 나타난 만큼, 무엇이든 단서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놈의 던전에서 수상쩍은 장소를 발견했던 것도 그렇고.
동반 출현한 수천여 개에 달하는 던전 중 뭐라도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하아.”
하지만 결과는 한숨이 나올 뿐이었다.
놀랍게도 조사에 나선 성현은 그 많은 던전들에서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직접 쓰러뜨리거나, 군단에게 휩쓸려 널브러진 몬스터의 시체들만이 잔뜩 뒤엉켜 있을 뿐.
단서가 될 만한 장소나 새로운 몬스터 따위는 없었다.
악마종에게 느껴지던 특이한 기운은 어디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진실에 닿을 기회가 생겼다고 생각했더니… 이제 남은 단서라고는 이것뿐이고.’
[당신을 주시하고 있는 모든 적을 제거하십시오.]
성현의 시선이 둥둥 떠 있는 메시지로 향했다.
첫 번째 퀘스트가 막 끝난 시점, 던전을 클리어 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떠오른 메시지창이다.
그가 받았던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특수 연계 퀘스트였으니, 다음이 있을 거라곤 예상을 했던바.
하지만 그가 받은 연계 퀘스트는 세부적인 내용이 나오지 않았다.
아직 제대로 활성화조차 되지 않은 퀘스트다.
‘이전에 받았던 것처럼 퀘스트의 내용은 상황이 닥친 뒤에나 알려 줄 모양인데, 혹시 이번에 등장한 던전 같은 것들이 무더기로 나오는 건 아니겠지…….’
성현과 군단이 빠른 대처에 나서 피해를 최소화하긴 했지만, 아무런 피해 없이 막아 낼 수는 없었다.
사람들이 밀집한 도시 한복판에 주로 생성되는 던전의 특성이 있는 데다, 일방적으로 공격 받는 입장인 만큼, 생성과 동시에 활성화되는 기습적인 던전을 완전히 틀어막기란 불가능했다.
거기다 정체모를 차원 너머의 존재가 정말 그를 노리고 있다면 다음엔 더 강력한 몬스터가 나타날 것이다.
실패한 녀석과 똑같은 수준대의 몬스터를 보내줄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싸움의 승패와 상관없이 지금보다도 더 많은 피해를 입을 터였다.
‘그래서 먼저 원인이나 방법을 알아내서 사고를 방지하려 했지만 실패해 버렸어.’
목숨을 노리고 있는 적은 자신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정작 자신은 상대의 정체는커녕 자그마한 단서조차 찾지 못하고 있으니, 그로선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성현의 시선이 돌아갔다.
백명의 길드장이자, 이지스의 간부인 한승희였다.
“공략도 다 끝난 던전에 틀어박혀선 뭘 하고 있어?”
“찾는 게 있어서. 그나저나 다른 쪽 상황은 어때?”
“수도권에 나타난 던전들은 모두 끝났어. 백룡과 태산 길드도 마무리가 된 모양이야. 네가 없으니 우리보다야 피해가 더 컸지만.”
한승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나마 서울과는 달리, 다른 쪽에선 S급 던전이 거의 나타나진 않아 적정선에서 수습이 가능했다.
굳이 악마종의 존재를 제하더라도 39곳의 S급 던전이 구역 안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생성됐다면 국내의 7대 길드들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이번 던전들의 웨이브가 유래 없는 수준이었고, 이 정도 피해만으로 막아 낸 게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단순히 수습해 낸 게 중요한 건 아니야. 이번 사건 이후로 출몰하는 던전들의 수가 또다시 큰 폭으로 늘어났어. 반면 해외엔 전혀 해당 사안이 없고. 언제든지 똑같은 일이 또 벌어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아. 혹시 이번 일이 왜 벌어진 건지 짐작 가는 거라도 있어? 너 비밀 같은 거 많잖아.”
“아니, 나도 그 이유를 찾고 있었지. 보다시피 허탕이고.”
성현이 팔을 슬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굳이 자신을 죽이러 온 괴물들이 쏟아진 거란 말은 하지 않았다.
“아무튼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순 없겠어. 이번 기회에 인원을 더 충원해서 오히려 기회로 만들어야겠지.”
한승희가 입술을 잘근 씹으며 말했다.
그동안 구역 내에 여러 산하 길드들을 거느리는 방식으로 운영해 왔던 국내의 거대 길드들이다.
본 길드엔 B급 이상의 정예들을 모집했지만, 그래봐야 길드 인원이 일정 규모를 넘어서면 구역 내에 배정시킬 수 있는 고위 던전 수가 뒷받침되어 주지 못했다.
더 많은 구역을 얻으려고 길드끼리 다툼이 생기고 목숨까지 걸면서 전면전을 치르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인해 생성되는 던전들의 수도 늘어났으니, 그런 걱정 따윈 없이 고위 헌터들을 모조리 끌어모으며 길드 덩치를 불리는 데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러한 방식으로 성장하는 것엔 한계가 있기에, 출몰하는 던전의 수가 마냥 늘어나는 이 현상이 위험한 것도 맞았다.
그래도 어차피 당장은 막질 못하는 현상, 최대한 이용이나 하면 그만이다.
물론, 성현도 그녀의 뜻에 동의했다.
“그래, 지금으로선 대비를 하는 것밖엔 방법이 없겠어. 하지만 그 전에…….”
성현의 시선이 휙 옆으로 돌아갔다.
인벤토리에서 기다란 창을 꺼내 집어든 성현은 순식간에 투창을 날렸고, 던전의 내벽 한 쪽을 통째로 박살 냈다.
콰아아아앙!
“가… 갑자기 뭐 하는 거야?”
깜짝 놀란 한승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표정하게 있다가 난데없이 이런 화풀이라니.
하지만 성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발을 박찼고, 순식간에 피어오른 먼지 속으로 들어가 팔을 뻗었다.
콰드득!
“커헉……!”
아무도 없던 공간,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난데없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붕 떠서 날아온 남자가 그녀의 발치에 나뒹굴었다.
“이, 이건 뭐야?”
“조금 전부터 내 뒤를 졸졸 따라붙던 녀석이지.”
“하지만 난 전혀 몰랐는데…….”
“은신 특화 특성을 지니고 있는 녀석이니까. 등급도 최소 A급 끝자락은 되는 것 같고.”
성현에게 한 대 얻어맞은 남자는 부상이 컸는지 신음을 흘릴 뿐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일부러 힘을 빼서 치긴 했는데, 조금만 더 세게 쳤으면 아예 죽었을 듯 했다.
감쪽같았던 은신 실력을 감안해 수준을 예상했다만, 그쪽에 비해선 전투 능력은 비교적 떨어지는 모양이었다.
아예 잠행을 전문으로 길드에서 키운 헌터인 것 같았다.
“어… 어떻게…….”
“던전 안에까지 따라오길래 언제 습격하려 하나 했더니, 끝까지 먼저 덤벼들진 않더군. 내가 뭘 하는지 감시하고 싶었던 건가?”
성현이 남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로선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한눈에 봐도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사건 때문에 집적거릴 외국 길드가 있지 않나 싶었는데… 넌 또 어디에서 온 녀석인지 한번 보자고.”
* * *
집약된 공간에서 다수의 던전이 생성되는 장소.
시민들에게야 많은 불편을 초래하겠지만, 사실 헌터 업계에선 매우 큰 매력을 지니는 구역이었다.
던전은 위험하지만 경험치와 보상을 토해내기 마련이었다.
특히나 길드를 주도하는 최상위 헌터들인 S급 던전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한데 S급 던전 39곳이 생겨난 서울의 유래 없는 사건에 대해서, 지금쯤이면 국적을 불문하고서 들을 만한 이들은 모두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중국을 통째로 무릎 꿇리며 모두의 주목을 끌었을 상황.
국내 지역에서만 한정된 던전의 급격한 증가세, 거기다 이번 S급 던전의 대량 발생 사건까지.
적당히 눈치를 보며 지켜보던 외국의 거대 길드들 중 누군가는 움직였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성현의 생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설마 이런 놈을 뒤에 붙여 둘 줄이야. 천하 길드까지 처리하고 나선 좀 잠잠해지나 싶었는데, 혹시 내 뒤에도 미행이 붙어 있던 건 아니겠지?”
“그 부분은 걱정 마. 확인해 봤는데 다른 간부들에겐 이상 없었으니까.”
찜찜하다는 듯한 한승희의 말에 성현이 답했다
혹시 몰라 다크 엘프 군주인 카론에게 다른 미행자들의 존재에 대해 조사해 보도록 시켰으나, 그런 낌새는 발견되지 않았다.
오직 성현만을 대상으로 한 미행.
성현과 한승희는 의자에 묶인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S급 헌터도 속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라면 보통 세력에서 굴릴 수 있는 인력은 아니고. 어느 길드에서 온 거지?”
성현이 남자에게 질문이 던졌다.
이런 임무를 맡은 녀석답게 차림새나 소지품에 길드 마크를 달고 있진 않았다.
하지만 성현의 질문에도 그는 아무런 반응조차 보이지 않으며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하… 그렇게 신사적으로 물어봐서 뭘 얘기나 하겠어?”
스릉!
답답하다는 듯 한승희가 검을 빼들었다.
헌터 업계에선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던전이라면 증거와 함께 존재를 말소시켜 버리기에 딱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심문에 대한 흔적 역시 남지 않는다.
온갖 더러운 짓들이 오가던 헌터 업계에서 고문 정도는 당연히 대수도 아니었다.
“그냥 나한테 맡…….”
“아니.”
하지만 성현이 나서려는 한승희를 막아섰다.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슬쩍 찌푸려졌다.
“왜 또? 네가 민간인들한테 잘해 주는 거야 난 불만 없어도, 이런 놈들한테까지 위선 떨어야 하는 건 질색이거든?”
“됐으니까 뒤로 물러나 있어. 알아서 할 테니까.”
입이 삐죽 나온 한승희는 얌전히 뒤로 물러섰다.
물론 성현도 먼저 공격을 당한 마당에 점잖게 나설 생각 따윈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헌터에겐 고통에 강한 내성이 있는 데다가, 그렇게 복잡하게 갈 필요가 없었다.
스르르륵!
성현의 그림자 속에서 지팡이를 든 여성이 나타났다.
리치들의 군주, 네이아.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놀란 남자가 흠칫 몸을 움츠렸다.
터엉!
하지만 무슨 일인지 그가 머리를 굴려 보기도 전, 네이아는 순식간에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고는 지팡이를 튕겼다.
파아아아앗!
“무… 무슨……!”
강력한 마력이 남자에게로 흘러들어 갔다.
당황한 남자는 황급히 저항했지만, 이미 보랏빛의 마력으로 감싸인 그의 눈동자는 서서히 풀려갔다.
“이건… 정신 조작 마법? 이런 것도 가능했던 거야?”
그 광경을 바라본 한승희가 놀란 듯 말했다.
기본적으로 정신계 마법은 등급의 높낮이를 불문하고서 사용할 수 있는 이가 매우 적은 계열이었다.
그중에서도 정신 조작 마법은 난이도가 매우 높은 데다, 성공 조건도 까다로워 멀쩡한 고위급의 헌터에겐 거의 통할 리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이미 무력화가 되어 꼼짝없이 묶여 있었고, 마법에 저항할 여력도 거의 없었다.
마법진까지 설치한 뒤 쏟아내는 네이아의 방대한 마력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파앗!
그렇게 흐르던 마력의 빛이 완전히 사라지자, 남자의 눈동자는 이미 완전히 풀린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때, 이제 좀 말할 생각이 들어?”
성현이 질문을 던졌고.
남자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