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퀘스트 인 (5)
쿠우우웅!
아주 빠른 속도로 굽이지는 통로들 사이를 돌파해낸 비룡 안타라스.
거대한 유적지대의 입구 앞에 안타라스가 착지했고, 성현은 가볍게 바닥에 내려섰다.
“넌 여기 남아서 입구를 지켜줘.”
“크르르륵!”
성현의 말에 안타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란하게 날아든 덕분에 시간을 아꼈지만, 오는 동안에 통로 사이를 서성이는 악마종들의 시선을 잔뜩 끌어버렸다.
아마 곧 이 곳을 향해 놈들이 몰려들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건너 뛴 본대에 비하면 많지 않은 수였고, 안타라스 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앞에서 진하게 느껴지고 있어.’
아직 직접 마주한 것도 아니고, 거리가 가까워진 것만으로도 앞서 마주한 악마종들과는 차원이 다른 탁기가 뿜어져 나왔다.
굽이진 통로가 끝이 난 그의 앞엔 커다란 유적지가 세워져 있었다.
성현은 주저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퀘스트 마커가 있었다면 편했겠지만… 워낙 고약한 기운이라 찾는 게 어렵진 않겠어.’
반쯤은 폐허 상태인 아주 오래된 건축물들이 웅장한 모습으로 줄지어져 있었다.
마치 옛 도시의 일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성현은 그 사이를 지나치며 느껴지는 기운을 향해 다가갔다.
한 편, 지나치는 벽들엔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잔뜩 새겨져 있었다.
성소에서 얻은 ‘기억의 고서’에서 봤던 문자들과 아주 유사했다.
“여긴……?”
그렇게 해서 건물들 사이를 빠져나온 공간.
성현의 앞엔 의식이 치러진 듯한 커다란 장소가 펼쳐져 있었다.
여러 개의 거대한 기둥들이 천장까지 맞닿아 있었고, 알 수 없는 표식들이 그려져 있는 원형의 제단이 중심부에 있었다.
알 수 없는 불길한 마력으로 가득 찬 장소.
마나의 맥 같은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건 대체……?’
성현의 표정이 당혹감에 감싸이던 찰나.
바로 뒤편에서 흉측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내게 찾아왔군.”
키이이익!
괴물의 목소리와 섞여 나오는 정체불명의 목소리.
성현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이 곳 악마종들의 군주라는 걸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물씬 느껴지는 기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인간의 말을? 너도 일반 몬스터가 아닌 마족이었나?”
“마족?”
악마의 목소리에 조소가 가득 담겼다.
뒤를 돌아본 성현은 주위를 마구 둘러보았지만, 목소리가 정확히 어디서 들려오는 진 알 수 없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불쌍한 인간 같으니.”
“불쌍하면 뭐라도 좀 알려주지 그래. 너희 정체는 뭐고, 여긴 대체 왜 나타난 건지.”
“네 놈을 제거하라는 명이 내려왔기에 내가 직접 찾아온 거다.”
“나를 제거하라고……?”
가볍게 내뱉은 악마의 말에 성현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렇다면 차원 너머의 존재가 내 존재를 인식하기라도 했다는 건가.’
이 악마종들은 방금 막 생성된 던전에서 나타난 존재들이었다.
헌데 누군가의 명령을 받았다는 것도 모자라, 정확히 성현 자신을 노리기 위해 왔다는 말까지 했다.
이는 다른 차원의 존재가 이미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던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위의 존재가 있다는 것이었다.
“너흰 이 세계를 적으로 두고 있는 건가?”
“아니, 적당히 처분할 장소가 필요했을 뿐.”
“처분?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조금 더 제대로…….”
“여흥은 여기까지다, 인간.”
콰아아아앙!
요란한 폭음과 함께 오래된 건물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사방으로 튕겨져 나오는 잔해 더미가 쏟아졌고, 그 사이로 거체의 괴물이 나타났다.
쿠우우웅!
방금까지 마주해왔던 악마종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거대한 몸집.
군단의 골렘 군주 발텐조차도 크지 않게 보일 정도의 크기였다.
놈의 등에는 수 천 여개의 팔 다리가 달려있었고, 온 몸에 곳곳에 위치한 눈알들이 일제히 성현을 응시했다.
온갖 생명체들이 뒤섞인 듯한 끔찍하게 흉측한 구조와 생김새.
마치 추악하다는 단어를 그대로 형상화시켜둔 듯한 모습이었다.
[연계 - 보조 퀘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교만의 대악마, ‘바르고스’가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악의 존재를 반드시 제거하십시오!]
[임무에 실패할 시, 중대한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페널티……?’
이런 문구가 나타난 건 처음이었기에, 성현의 표정이 꿈틀였다.
반드시라며 강조를 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동안 받은 대부분의 퀘스트와는 어조부터가 달랐다.
하지만 어차피 퀘스트를 받은 이상, 페널티를 주든 말든 놓칠 생각 따윈 없었다.
“물어보고 싶은 건 많지만… 이쪽도 시간이 15분밖에 안 남았거든.”
스릉!
성현은 주저 없이 자신의 검을 뽑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발치의 그림자가 뻗어지더니, 그의 주위로 이즈나를 비롯한 네 마족 군주가 섰다.
통로에서 벌어진 악마종들과의 싸움에서 가장 큰 전력인 이들을 살짝 뒤로 빠지게 한 데엔 이유가 있었다.
“…정말 끔찍하게 생긴 녀석이로군.”
로칸이 인상을 팍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 뿐만 아니라 나타난 마족 군주들은 눈앞에 선 바르고스에게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꼈다.
이는 이즈나나 로칸이 성현의 수하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조금 더 본원적인 거부감이 놈들에게 일었고, 마족이나 일반적인 몬스터와는 결부터가 달랐다.
“잔챙이 몇 마리 따위 한꺼번에 불살라주마!”
콰아아아아!
바르고스의 입에서 맹렬한 불꽃이 터져 나왔다.
미처 피할 범위를 주지도 않고서 전방위적으로 뒤덮어버리는 바르고스의 화염 숨결.
그 위력 또한 아주 강력해 조금이라도 닿는 모든 것을 녹아내리게 만들었다.
화르르륵!
하지만 거센 불길은 성현의 양 옆으로 갈라지며 그의 주위를 비껴갔다.
네이아가 펼친 방어 마법 덕분이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어?”
“오래는 아니에요.”
네이아가 입술을 잘끈 깨문 채 대답했다.
리치들의 군주인 그녀의 마법 실력이야 말할 필요가 없었지만, 저 화염 숨결의 위력은 그녀의 방어 마법으로도 오래 버틸 수 없을 정도였다.
“일단 저 입부터 다물게 만들어야겠어.”
성현이 이즈나에게 시선을 주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어 마법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바르고스가 계속 불을 뿜어내는 중이었다.
이대로 가둬둔 채 자신들을 태워 죽일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순순히 당해줄 수는 없었다.
콰아아아앙!
바르고스의 머리 위에서 생성된 거대한 불덩이가 떨어지며 요란한 화염 폭발을 일으켰다.
물론 방금까지 상대하던 악마종들의 보스인 만큼, 저 정도 마법 한 방으로는 큰 피해를 기대할 순 없었다.
하지만 폭발의 여파로 인해 바르고스의 몸뚱이가 흔들리며, 불길이 잠시 멈췄고 성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촤아아아악!
순식간에 달려든 성현이 바르고스의 몸뚱이를 갈랐다.
마력을 머금어 검은 빛으로 물든 성현의 칼날은 물리적인 거리보다도 훨씬 더 깊게 베어가를 수 있었고.
굉장한 양의 검은 피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바르고스의 몸집이 워낙에 거대하고 비대한 탓에, 전체에 비하면 상처의 크기는 한참 작은 편이었다.
오히려 바르고스만 자극할 뿐이었다.
“그아아아아!”
바르고스는 왼 쪽에 달린 유일한 팔을 성현을 향해 세차게 휘둘렀고, 엄청난 범위를 휩쓸며 건물들을 초토화시켰다.
놈의 움직임을 읽고서 미리 몸을 뒤로 빼내던 성현이었음에도, 미처 완전히 피하진 못해 공격에 휩쓸리고 말았다.
“큭……!”
바닥을 나뒹군 성현이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의 머리 위로 이미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바르고스의 기형적인 팔이 그를 찌그러뜨리기 위해 내리 찍혔다.
콰아아아앙!
요란하게 뒤집어 진 일대는 텅 비어있었다.
로칸이 재빨리 달려들어 성현의 몸을 빼낸 덕분이다.
바르고스에게서 거리를 벌린 로칸이 성현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이 거리조차 놈에게선 안전하지 못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무지막지할 줄이야… 그래도 처음에 필요한 시간은 끌었다.’
“주군, 준비가 끝났습니다!”
“시작해!”
파아아앗!
성현의 말이 떨어진 순간, 검은 마력이 뻗어지며 바르고스의 몸을 감쌌다.
그 짧은 사이 완성이 된 네이아의 마법진이었고, 강력한 저주 마법이 바르고스에게 향했다.
아무리 강한 적이라 해도 디버프를 덕지덕지 먹이고서 싸운다면 훨씬 상대하기 수월해졌다.
물론 그 저주 마법이 통한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대악마, 바르고스의 특성으로 인해 모든 저주 마법이 무효화됩니다!]
“뭐……?”
성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바르고스의 기이한 입가가 씩 하고 올라갔다.
“내 앞에서 잔머리를 굴려봤자다!”
지하 유적지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는 바르고스의 갈라진 목소리.
휘리리릭!
곧이어 바르고스의 온 몸에서 뻗어진 수 천 갈래의 촉수들이 성현과 모든 군주들을 날아들었다.
바르고스의 덩치가 거대하다곤 해도, 녀석의 온 몸에 달린 수 만개의 눈이 사방에 달려있었고, 근처에 있는 모든 각도와 적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젠장, 날 죽이러 왔다는 게 괜한 소리는 아니었나보네.’
성현은 서둘러 촉수들을 베거나 피하며 물러섰다.
그 뿐만이 아니라 네 군주들도 견제를 받는 탓에, 제대로 반격을 해낼 수가 없었다.
수적 우위 정도는 유지하고서 싸울 전제였는데, 그것부터가 틀어진 상황.
심지어 조금 전의 공격들로 통해 알아본 결과, 놈은 물리 저항에 마법 저항까지 모두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다.
자체적인 방어력은 물론 덩치에 걸맞게 체력도 어마어마했고.
아직 제대로 공격 패턴을 보인 것도 아니었는데, 더 무식한 스펙만으로도 굉장한 위협이었다.
어지간한 S급의 보스 몬스터 수준을 가뿐히 넘어서는 강적이다.
급격히 강해져온 현재 성현의 힘으로조차 일반적인 싸움 방식으론 감당이 되지 않았다.
이 정도 난이도의 던전은 아무리 S급이라 해도 이례적인 수준, 아니 그가 아는 한은 처음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급박한 와중에 성현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이런 적을 상대로 군단의 병력을 모조리 끌고 와봐야 순식간에 짓밟혀서 사라질 뿐.
놈을 공략하기 위해선 무언가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콰아아아앙!
‘혹시 그거라면……?’
무수한 촉수들이 쏟아지던 그때, 성현의 머릿속을 번뜩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뒤로 물러서던 움직임을 그만두고서, 되려 바르고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기 시작한 성현.
이는 텔레파시로 그의 뜻을 전달받은 군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지막 발버둥이로군.”
조소를 머금은 바르고스의 목소리.
훨씬 많은 촉수들이 성현에게 향했고, 바르고스의 거대한 왼 팔마저도 번쩍 들어 올려졌다.
하지만 촉수와 팔이 내려찍히던 그 순간.
성현은 네이아의 단거리 공간 도약 마법이 그를 감쌌다.
촤아아악!
순식간에 반대편에서 나타난 성현이 바르고스의 가슴팍을 길게 베어갈랐다.
물론 덩치에 비하면 큰 의미가 없는 상처였고, 소용없는 발버둥일 뿐.
하지만 그 순간, 바르고스는 무언가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성현에게 베여진 주변 피부가 보랏빛으로 침식되어가고 있었다.
“다행히 독에 대한 저항은 없나봐.”
성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