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퀘스트 인 (2)
“흐아암.”
테이블에 앉은 성현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예전 같았으면 출근을 해서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거나, 최근 같았으면 정신없이 던전을 공략하고 있었을 낮 시간대다.
하지만 당장 산적해 있던 급한 일들을 모두 처리해 낸 성현이었고, 테라스에서 커피나 홀짝거리면서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로선 간만에 누리는 느긋한 시간이었다.
‘요즘 너무 바쁘게 쏘다니느라 마음 편히 쉬고 있을 시간도 없었으니. 이 정도는 쉬어 줘야지. 움직임을 봐선 당분간 큰 싸움이 벌어질 일도 없어 보이니까.’
성현은 달그락 잔을 내려놓았다.
이번 싸움을 끝낸 뒤 천하 길드를 완전히 흡수해 버린 이지스다.
그동안 세계구 급의 몇몇 거대 길드의 경우 전력상 우위에 있다곤 해도, 워낙 천하 길드 자체의 규모가 커서 굳이 직접 충돌하진 않았다.
얻는 것에 비해 너무 지지부진한 싸움이 이어지거나 과하게 투자될 수 있는 상대.
하나 길드가 박살나며 갈기갈기 찢겨진 이상 이야기는 달라졌다.
지금 상황에 이지스 길드를 무너뜨리면 무주공산이 되어 있는 중국까지 함께 먹어치울 수 있는 것이었다.
외국에서 그들을 향해 덤벼들 만한 메리트가 컸다.
다만 지금의 조용한 낌새들만 봐도 알 수 있듯, 이지스 길드를 향해 마냥 쉽게 달려들진 못했다.
그 거대한 규모의 천하를 무너뜨린 이지스 길드의 저력.
규모는 비교적 작다 해도 쉬운 상대는 결코 아니라는 것이었고, 서로 간의 눈치 싸움까지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론 국내에 7대 길드들도 남아 있긴 했지만 당분간 돌아가는 눈치나 볼 뿐이지, 체급 차가 벌어진 이지스 길드를 상대로 무슨 짓을 하기란 어려웠다.
성현 역시 해외의 길드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것도 아는데, 굳이 힘과 시간을 들여 가며 먼저 싸울 필요도 없었다.
‘갑작스러운 변수가 생기는 게 아닌 이상, 당장 큰 싸움에 휘말릴 일은 없을 거야. 상황이 바뀔 때까진 마음 편히 던전이나 공략하고 있으면 돼. 다만, 지금 걸리는 건 하나뿐이지.’
성현의 시선이 슬쩍 옆으로 향했다.
반투명한 시스템 메시지가 그의 시야 안에 둥둥 떠 있었다.
[퀘스트가 생성 중입니다.]
“…이게 대체 뭐냐는 거지.”
성현이 턱을 기대며 비스듬히 시선을 보냈다.
퀘스트가 발생한 것도 아닌데 직접 보여 주지도 않고, 이런 모호한 메시지가 둥둥 떠다닌 지 벌써 며칠째였다.
천하 길드와의 싸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타났던 시스템 창.
아직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진 않았지만 무언가 퀘스트가 발생할 거라는 건 확실해 보였다.
‘여태 퀘스트야 여러 방식으로 주어졌지만, 이런 메시지가 나타난 건 처음 보는 패턴이야.’
그간 이래저래 다양한 퀘스트를 처리해 오던 성현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퀘스트와는 달랐고, 이런 경우엔 대개 보상이든 내용이든 특별한 점이 담긴 퀘스트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 주어질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을 점쳐 본 결과, 성현이 가장 유력하다 생각하는 것은 12번째 필드에 대한 타임 어택이었다.
‘이미 저번 필드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퀘스트가 진행되었으니, 똑같은 방식으로 또 주어진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지.’
마침 성현이 군단을 움직여 새로운 필드에 막 진입하기 시작한 단계이기도 했다.
성현이 지금 직접 던전에 들어가 싸우고 있진 않아도 그의 집 지하실에선 이미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점령한 11번째 필드의 완전한 점령과 자원 개발 등의 작업을 하는 동시에, 이미 군단의 일부 병력은 다음 필드로 향했다.
물론 성현이 그것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게 아니면 세 번째 가디언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겠지. 던전의 웨이브일 수도 있겠고… 어찌 됐건 던전 안에서의 일이라는 건 확실해.’
외부의 길드와 헌터 문제는 잠시나마 모두 정리가 마쳐진 상황이다.
당장 성급하게 적들이 쳐들어올 리는 없었고, 퀘스트가 발생할 만한 건수라면 지하 던전에 대한 것뿐이었다.
혹시 모를 변수에 미리 방비를 해 두도록 말을 해 놨으니 속수무책으로 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
“주군.”
그때, 이즈나가 성현의 곁으로 다가왔다.
정장 차림의 멀끔한 모습에 서류까지 들고 있는 모습.
하얀 머리칼이나 외모가 튀기는 했지만, 누가 보면 직장인인 줄 알 만한 차림이었다.
“다른 건 알겠는데… 그 안경은 뭐야?”
“길드의 사무직원 중 몇몇이 쓰고 있는 걸 봤습니다. 인간들 틈에 조금 더 자연스럽게 섞이기 위해 시도해 봤죠.”
“하하, 그런 거였어?”
성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외모가 받쳐 주니 뭘 걸쳐도 제법 잘 어울리는 편이긴 하지만, 역시 원래의 모습 쪽이 더 익숙했다.
“그런 문제라면 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어. 어차피 예전처럼 민감하게 생각할 필요 없으니까. 대놓고 사람들 앞에서 들키지만 않으면 돼.”
“아… 그런가요?”
고개를 끄덕인 이즈나는 안경을 휙 벗어던졌다.
그렇지 않아도 눈앞에 거치적거리던 게 조금 불편하던 참이었다.
“그나저나 나한테 할 말이 있던 것 같은데.”
“아, 네. 저번에 필요하시다 말씀했던 데이터들을 가져왔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직접 말씀드리는 편이 가장 빠르니까요.”
이즈나가 성현에게 제법 두툼한 서류철을 넘겼다.
놀랍게도 정부 기관과 이지스 산하의 각 길드에게 자료들을 전달받은 뒤, 이번 자료를 적절하게 취합해서 가져온 책임자가 바로 이즈나였다.
세상 물정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었던 예전 같았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생각보다 훨씬 빨리 가져왔군. 먼저 시킨 것도 아닌데 직접 나서서 맡겠다고 하더니… 요즘 들어 엄청 적극적이네.”
“이 길드라는 것도 결국 주군을 섬기는 하위 집단이니, 간부 격인 제가 제대로 사정을 알아야겠죠.”
그녀는 성현에게 합류한 마족 중에서도 가장 고참답게 바깥 세상에 대한 이해도가 가장 높았다.
바깥 세상에 비교적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듯한 로칸과는 다르게, 이즈나는 인간들의 사회를 이해하는 것에 대해 열의도 높았다.
이지스 길드 내부의 업무나 시스템에 대해서도 적극적이었고, 덕분에 경력자들에게도 복잡할 만한 길드 업무마저도 상당수 이해하고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거기다 몇몇 인간에게 새겨 둔 혈마법의 맹약도 안전장치에 불과할 뿐, 저희와는 다르게 저들은 완전히 믿을 순 없는 존재니까요. 지배력을 확실히 하기 위해 주군의 심복인 제가 길드 내에서 활동을 한다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몇 년이 지난 것도 아니고, 몇 달 만에 이렇게까지 해낼 거라곤 생각 못 했어.”
“주군께 도움이 되기 위해선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이즈나가 새삼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항상 잊을 만하면 치고 들어오는 그녀의 특기에 피식 웃어 버린 성현은 보고서를 펼쳤다.
“역시 예상대로네. 오히려 저번보다 악화됐어.”
턱을 괸 성현은 잠시 침음성을 흘렸다.
그가 요청했던 자료들의 정체는 바로 국내외의 던전 생성량에 대한 보고서였다.
펼쳐진 자료들의 숫자만 봐도 알 수 있듯, 국내에서 생겨나는 던전의 수가 가파르게 늘어나는 중이었다.
물론 생성량이 늘어나는 특이 현상은 해외에서도 발견되었던 현상이다.
하지만 해외의 사례와 비교하기엔 너무 상승폭이 컸다.
유독 국내에서만 큰 폭으로 늘어나고 있는 던전의 생성량.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지난 십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특별히 던전의 생성량이 상승하는 현상은 발견된 적이 없었다.
한데 몇 달 전부터 전 세계적으로 이러한 일들이 벌어진 데다가, 유독 국내에선 훨씬 그 속도가 빨랐다.
물론 당장 지금 이 현상을 심각한 위기로 조명하는 언론이나 길드는 없었다.
인구 밀도가 높고 타 국가에 비해 각성자 비율이 높은 편인 한국이다.
오히려 활동하는 헌터에 비해 생성되는 던전들이 부족한 판국이었고, 그 때문에 길드들이 서로 경쟁해 왔다.
서울 지역이 국내의 핵심 지역이자 헌터 길드와 고위 헌터들 사이에서 각광받던 이유도 던전이 많이 나타나고, 높은 등급 대의 던전이 더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던전은 언제나 그래 왔듯 양날의 검이다.
당장이야 오히려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지만, 만약 이대로 끝없이 던전의 생성량이 계속 늘어난다면 국내의 헌터들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치달을 수도 있었다.
“재난 관리국에서도 조사에 나서고 있던 사안이라고 하지만, 아직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고 합니다.”
“도중에 알아서 줄어들길 바라야 하는 건가. 조금은 불안한데.”
벌써 최초의 던전이 생겨난 지 십여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각성자나 몬스터에 대한 것들도 의문점은 여전했다.
던전에 대한 의문은 과학적으론 밝혀낼 수 없는 영역이었고, 전례마저 없는 사례였으니 예측이 더욱 무의미해졌다.
정체 모를 현상이 끝나고 알아서 원래의 수치로 돌아가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쿠구구구구!
“…음?”
그때, 성현의 시선이 휙 옆으로 돌아갔다.
도시 한 쪽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질적인 기운.
그를 느낀 것은 이즈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근처에서 상위 등급의 던전이 나타난 듯합니다.”
“그래, 느껴지는 기운이 꽤 크네.”
최소 A랭크 이상.
어쩌면 S급에 달하는 최상위 던전일지도 몰랐다.
이지스의 길드 지부가 근처에 있는 데다가, 던전이 생겨난 뒤 몬스터가 쏟아지기까진 시간이 걸리니 그렇게 걱정할 건 아니었다.
“하지만 평소와는 뭔가 좀 다른데…….”
고위 던전을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닌데,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이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
“키이이이익!”
쩌렁쩌렁한 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후웅하고 지나갔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커다란 비행 괴수의 모습에 성현은 기겁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 미친……!”
“방금 나타났던 던전의 몬스터 같습니다.”
“그래, 기습 던전인 모양이야. 준비해, 비행 몬스터라면 특히 피해가 퍼지는 게 빠르니까. 우리가 직접 나선다.”
“네!”
길드의 시스템도 미처 대응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몬스터의 출몰이다.
피해가 커지기 전에 서둘러 막아야 했다.
하지만 성현이 인벤토리에서 검을 집어 든 순간, 땅이 뒤흔들리며 새로운 기척들이 우수수 나타났다.
쿠구구궁!
“이, 이건……?”
주변으로부터 느껴지는 수많은 던전의 기척들.
그의 감각이 닿는 범위 안에서만 최소 백여 개가 넘는 던전의 기척이 느껴졌다.
동시다발적으로 생성된 던전.
띠링 소리와 함께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특수 연계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다수의 고위 던전이 동시 출몰하였습니다! 서울 지역 내에 나타난 모든 S급 던전을 격파하십시오! (0/39)]
[각 던전을 공략할 시, 정수의 파편을 획득합니다.]
[남은 시간 ‘01:29:54’]
‘뭐, 뭐야 이건?’
멈춰 선 성현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