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일인군단 (5)
포탈의 너머, 두 헌터가 마주하고 있는 상황.
처참한 폐허를 마주한 웨이홍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천하 길드의 모든 본거지가 무너져 버린 상태다.
저들이 반격을 할 거라곤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차였기에, 자신의 모든 기반이 이미 무너져 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조차 어려웠다.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건 성현이었다.
“천하 길드도 결국 다른 세력들을 흡수하며 덩치를 불려온 거지. 네가 여태까지 벌여온 게 있긴 해도, 격차를 인정하고서 얌전히 내 밑으로 들어온다면 목숨 정도는 살려 줄 수 있어.”
“네놈이 감히……! 주제도 모르고 그따위 소리를 지껄여! 사지를 찢어 죽여 주마!”
콰아아앙!
격분한 웨이홍이 거칠게 발을 박찼다.
어지간한 S급 헌터들은 따라하지도 못할 빠른 움직임이다.
순식간에 성현의 앞까지 치달은 그의 날카로운 검격.
쩌어어어엉!
“뭐… 진짜 고개 숙일 걸 기대한 건 아니야.”
성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피하거나 흘리지 않고 정면에서 맞부딪쳤음에도, 성현의 모습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방금의 힘 싸움에서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는 네크로맨서인 성현이 소환수들을 소환하기도 전에 제압할 생각이었지만, 생각도 못한 전개에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확실히 넌 군주 하나로 처리할 수 있을 수준은 아니지. 하지만 그래 봐야 내 적수가 되기엔 무리야. 한 달 전이라면 모를까.”
“뭐라고?”
[군주, 네이아의 그림자를 흡수하였습니다!]
[‘저주술사’ 특성이 활성화됩니다!]
[디버프 ‘쇠약’ 효과가 발동됩니다!]
[디버프 ‘부패’ 효과가 발동됩니다!]
[디버프 ‘저주’ 효과가 발동됩니다!]
.
.
.
“이… 이놈이……!”
순식간에 그를 향해 씌워진 수많은 디버프들.
그와 동시에 성현의 등 뒤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수많은 눈동자가 웨이홍을 마주하였다.
* * *
“크아아아!”
사방에서 달려드는 괴수들의 무리가 포효를 내질렀다.
쏟아지는 그림자 군단을 마주한 웨이홍은 쉴 새 없이 몸을 놀리며 검을 휘둘렀다.
이미 초토화된 중국 본토의 천하 길드 세력.
그를 도와줄 길드원들이 남아 있지 않음은 물론이거니와, 한국에서 포탈을 타고 넘어오는 이도 없었다.
콰아아앙!
“크헉……!”
머리 위에서 커다란 불덩이가 떨어져 내리며 웨이홍이 튕겨 나갔다.
비룡 안타라스의 강력한 화염이었고, 어지간한 화염 속성 몬스터와는 비교도 안 될 만한 강력한 화력에 그는 온몸에 화상을 입었다.
성현이 건 저주 마법 때문에 움직임이 굼떠졌고, 공격을 당할 때에도 이처럼 더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크르르륵!”
무려 다섯이 넘는 군주들에게 둘러싸인 웨이홍.
원래 웨이홍의 실력상 어지간한 수준대였다면 S급의 보스 몬스터든 뭐든 단박에 베어 버리며 해치웠을 것이다.
하지만 성현의 군단을 이끌고 있는 군주들은 평균적인 S급 던전 속 보스들과는 궤를 달리했고.
하나하나가 천하 길드 측 대간부급에 필적하거나 그 이상이었다.
한데 이런 압도적인 전력 차이 앞에서 디버프까지 주렁주렁 달고 나자 웨이홍으로선 도저히 빠져나갈 출구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크욱…….”
“슬슬 한계가 온 것 같네.”
“닥… 쳐라……!”
웨이홍은 간신히 말을 잇는 사이에도 재차 피를 토해냈다.
이미 한계에 다다른 신체.
무투 계열에 있어 거의 정점에 가까울 정도로 다다른 그이긴 했지만, 무투계 헌터들의 특성상 이런 식의 저주 계열 마법엔 비교적 약점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이처럼 수적으로 압도적인 열세에 처한 상황은 웨이홍에겐 절대 익숙하지 않았다.
천하 길드는 세계의 그 어떤 길드보다 숫자와 규모면에 있어선 앞섰다.
실제로 길드간 싸움 방식에 있어서도 어지간해서는 규모로 찍어 누르는 방식을 선호했다.
하지만 네크로맨서인 성현을 상대로 그들의 규모를 내세워 봐야 헛수고일 뿐이다.
성현의 집 지하실에 있는 어마어마한 공간과 몬스터들의 개체 수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규모였다.
덕분에 이미 그에겐 인간 헌터들로는 흉내낼 수 없을 만한 규모가 갖춰져 있었고, 군단 병력의 질 역시 천하 길드보다 한 수 위였다.
평소처럼 단순 무식하게 규모로 밀어붙여서야 성현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챙그랑!
웨이홍이 끝까지 붙잡고 있던 검을 성현은 발로 차내었다.
빙글 돌아가며 튕겨진 검이 구석진 잔해 더미 앞에 박혔고, 성현은 그를 바로 앞에서 내려다보았다.
아무 말 없이 검을 치켜 올리는 성현의 모습에 웨이홍은 다급히 팔을 들어올렸다.
“자… 잠깐……! 인정하겠다!”
“인정?”
“천하 길드와 함께 네 밑으로 들어갈 테니 목숨만은… 내가 없으면 중국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을 거다.”
“하하, 그거라면 이미 늦었어.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싸우기 전에 말했어야지.”
“뭐, 뭐라고?”
어차피 천하 길드의 모든 본거지들이 통째로 날아간 마당에 웨이홍을 살려둔다 한들 큰 이점이 없었다.
오히려 중국 내에서 되도 않는 수작을 벌여올 게 뻔했다.
뭣보다 국내에 지속적으로 집적거리던 역사와 주변 국가에 벌여온 지난 행적만 보더라도 저 녀석을 살려둘 순 없다.
“어차피 내 계획에 네 자리는 없어. 즉, 그냥 사라져 주는 편이 나한테 제일 도움이 된다는 거지.”
“기… 기다……!”
서걱!
성현의 검이 휘둘러지며 붉은 선혈이 터져 나왔다.
* * *
파아아아앗!
“그쪽도 끝났나 보네?”
한승희가 포탈을 타고 돌아온 성현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래, 이쪽도… 잘 마무리됐네.”
주변을 한차례 둘러본 성현이 말했다.
이미 말끔히 상황이 종료된 건물 내부의 상황.
이지스의 본사 건물 안에 들이닥쳤던 천하의 다른 헌터들은 이미 모두 제압이 끝나있었다.
길드장을 따를 수백의 정예 인원을 따로 추려온 것인 데다가, 대간부까지 함께 있던 것을 생각하면 쉽게 당할 전력은 아니었다.
하나 웨이홍이 성현과 함께 포탈 너머로 사라짐과 동시에, 대간부 별로 하나씩 맡을 군주들과 데스나이트들이 등장하며 그들을 완전히 제압시켰다.
특히 대간부들의 저항은 거세질 게 뻔했기에 그들도 기습적인 포탈의 활용을 통해 중국의 다른 거점으로 보내 버렸다.
덕분에 이렇게 이지스 본사의 건물이 비교적 멀쩡한 데다, 뒤늦게나마 상황을 파악한 이들 몇몇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해 버리기까지 했다.
“근데 처음 포탈이 생기기 전에 말이야, 나 죽을 뻔했던 것 같은데. 내 바로 앞까지 접근했던 것도 다 계획된 거 맞지?”
“음… 물론이지.”
“어째 대답이 시원찮냐?”
째릿 바라보는 한승희의 시선이 성현을 쏘아보았고.
성현은 재빨리 주제를 옮겼다.
“투항자들은?”
“저기 모아 뒀어. 상황이 완전히 뒤집어진 걸 눈치챘는지 생각보다 순순히 백기를 들더라고.”
한승희가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제법 많은 투항자들이 구석에 몰려 있었다.
모두 무기를 버린 채 건물 한쪽 구석 바닥에 얌전히 주저앉아 있는 모습.
천하 길드에서 정예들을 끌고 온 걸 생각한다면, 의외로 적은 피해만으로 싸움이 마무리된 것이다.
그도 그럴게 수뇌부인 길드장과 대간부들이 갑작스럽게 생성된 포탈 너머로 모조리 튕겨 나간 데다, 군주급인 칼라일에 데스나이트들이 자리에 남아 저들을 상대했다.
데스나이트들은 성현의 군단 내에서도 군주급이 아닌 수하급 사이에선 최정예로 분류되는 녀석들이었다.
길드장을 수행할 만한 천하 길드의 정예라 해도, 더욱 강해져서 돌아온 저들을 감당하기란 무리였다.
“혈마법은 이미 받아들인 건가.”
투항자들에게 다가간 성현이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헌터들의 신체 제각기 부위에 혈마법의 인장이 찍혀 있는 게 보였다.
“앞으로…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투항자의 대표격인 남자가 먼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성현은 시큰둥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거창할 건 없는데.”
파앗!
그때, 성현의 그림자를 통해 이즈나가 바로 옆에서 나타났다.
포탈을 통해 끌고 갔던 대간부들과의 대화를 마치고 온 길이었다.
“주군, 돌아왔습니다.”
“이번에 투항한 대간부들의 숫자는 어때?”
“총 네 명입니다.”
“나쁘지 않네.”
그녀의 보고에 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반 이상이 끝까지 저항하다 군주들의 손에 죽긴 했지만, 그래도 중국 본토의 상황을 보고서 전의가 꺾여 버린 덕인지 네 명의 대간부들은 순순히 투항의 뜻을 밝혔다.
이즈나가 새겨 줄 혈마법의 구속을 받아들인다는 조건을 승낙하고서 말이다.
“그럼 다른 쪽까지 합쳐서 투항한 대간부는 총 여덟인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이번 기회에 천하 길드의 모든 거점을 싹 털어버린 성현이다.
다만 그를 받쳐 주고 있던 산하 길드의 거점들까지 모조리 쓸어버린 건 아니었다.
헌터들의 세계에서 모든 주요 세력을 박살 내고서 무주공산으로 내버려 두면 큰 혼란이 불어닥치기 마련이다.
등급이 조금만 오르더라도 헌터를 상대로 공권력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중국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거기다 사회에 들이닥칠 혼란은 물론, 중국 전체가 앞으로 적대적일 수 있는 또 다른 해외 세력의 손에 들어가거나, 중국 내에서 적대적인 세력이 나타나 이전의 세력을 재건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중국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한국이 또다시 공격을 받을 수도 있는 일.
그래서 성현은 대간부 중 저항을 포기한 몇몇을 살려두어, 자신의 밑으로 받아들였다.
저번 싸움에서 정부의 재난관리국에게 그러했듯, 완전히 파괴하는 것보단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천하 길드를 내심 탐탁지 않아했던 몇몇 대간부는 길드와 함께 죽는 것보단 살아남아 세력을 넓히는 것을 택했다.
물론 여태 해외에 뻗쳐 왔던 지배력은 말끔히 포기한 뒤, 앞으로 자국 내 사정에나 신경 써야겠지만.
천하 길드가 통째로 날아간 데다, 보주가 없는 이상 당연한 수순이었다.
“정신도 없는데 절차가 끝난 인원들은 괜히 붙들고 있을 것 없이 중국으로 돌려보내 줘. 물론 세부 세항 조율해야할 간부급들은 제외하고.”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즈나가 등을 돌려 떠났고.
성현은 한승희에게 다가갔다.
“남은 일처리는 부탁해도 되겠지?”
“이 자식… 이라고 하고 싶지만. 이번은 일을 잔뜩 떠넘겨도 얌전히 넘어가줄게. 저 질긴 놈들 싹 처리해 버린 거, 나도 속 시원하거든.”
어깨를 으쓱인 한승희가 씩 미소를 지었다.
잠적했다가 나타나 준 성현의 타이밍도 그렇고, 말도 안 되게 강해져서 돌아온 성현의 전력을 직접 보았기에.
최소한 뒤에서 서포트해 주는 보람은 있었다.
훨씬 거대한 덩치의 외국 길드를 완전히 무찔렀으니 당장 자리엔 없어도 성찬일도 만족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싸움도 다 끝났는데 어딜 바로 가려고?”
“다음을 준비해야지.”
파아아앗!
성현은 바로 앞에 나타난 포탈의 입구에 섰다.
중국 길드 하나 잡아냈다고 모든 게 끝났다고 하기엔, 아직 처리해야 할 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