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일인군단 (4)
“네가 어떻게 여길… 이지스도 공격을 받고 있었을 텐데?”
“그 정도는 길드에서도 알아서 처리할 수 있어.”
성현이 씩 웃으며 말했다.
과거 이지스가 성현의 마족들을 채워 넣기 위해 대강 만든 길드였다곤 해도,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서울과 경기 남부 지역까지 모조리 먹어 치운 국내 최대의 길드.
그 아래에 놓인 산하 길드들만 해도 세력이 굉장했다.
성현과 그의 군단을 제외하고도, 성현의 뒤를 든든히 받쳐 주기에 충분히 유의미한 세력이 된 것이다.
덕분에 천하 길드가 발목을 잡기 위해 공격을 해 왔다고는 해도, 성현은 거기에 병력을 분배하거나 신경을 쓰지 않고서 충분히 뒤를 맡길 수 있었다.
그러자 백룡의 길드장, 진서연은 말을 이었다.
“우릴 도와주러 온 건가?”
“벌써 두 번째인 거 알지?”
“하…….”
그의 말에 진서연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같은 녀석에게 신세를 두 번이나 지다니.
궁지에 몰린다거나 누군가의 도움 따위를 받는 것도 그녀에겐 익숙치않은 일이건만, 이런 적은 난생 처음이었다.
후웅!
바로 그때, 성현의 등 뒤로 날아드는 섬뜩한 칼날이 있었다.
성현은 곧장 검을 휘두르며 공격을 옆으로 흘려 냈고, 슬쩍 거리를 벌리며 물러섰다.
그러자 상기된 얼굴의 대간부 라우가 그를 향해 말했다.
“여기에 네놈 하나 합류한다고 뭐가 바뀔 것 같나? 마침 잘됐어. 그렇지 않아도 네놈의 행적을 찾고 있었으니까.”
이대로 한국을 통째로 집어삼킨다 한들 공간의 보주를 회수하지 못하면 모두 무의미한 일이 될 뿐.
길드의 목적을 위해선 저 녀석이 빼앗아 간 보주를 다시 되돌려 받아야 했다.
무엇보다 그때 받았던 치욕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까지 더해 주어서 말이다.
콰아아앙!
“크아아악!”
“뭐… 뭐야?”
하지만 그 때, 뒤바뀐 주변의 분위기에 라우의 시선이 돌아갔다.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중국 헌터들의 비명 소리.
백룡과의 싸움에선 분명히 우위를 점하며 이끌어 나가던 천하 길드였지만, 성현과 함께 등장한 카르고트 군단이 저들을 압도하는 중이었다.
비등한 싸움이 아닌 거의 일방적이다 싶을 정도로 쓸려 나가는 전장의 형세였다.
“크어어어!”
중국 헌터들은 도끼를 치켜들며 달려드는 카르고트들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A급 헌터든, B급의 헌터든 똑같았다.
백룡을 상대로 지니고 있던 수적 우위는 카르고트들이 합류하며 완전히 사라진 데다가, 몬스터 하나의 수준마저도 저들의 위에 서 있었다.
이는 S급 이상의 간부급, 그리고 심지어는 수뇌부인 대간부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콰아아아앙!
“큭……! 젠장!”
매섭게 달려드는 카즈라의 기세에 메이파가 주르륵 밀려났다.
지금이라도 라우와 함께 성현을 잡아야만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그럴 틈이 나지 않았다.
저 수많은 카르고트의 대부족장이 그녀를 집요하게 쫓고 있었다.
날아든 커다란 도끼가 빌딩의 한 켠을 살벌하게 뜯어내었고, 흩날리는 잔해 파편 속에서 메이파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정도 수준의 보스 몬스터가 대체 어디서……!’
천하의 대간부이자 지금껏 수많은 S급 던전을 공략해 오던 그녀다.
S급 헌터들 사이에서도 최상위권의 실력자라 해도 무방한 수준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앞에 나타난 저 보스 몬스터의 수준은 어지간한 S급 던전으로선 흉내도 내지 못할 정도의 강력함이었다.
이 괴수를 빠르게 해치우고 합류하기는커녕, 과연 자신이 제압할 수 있을지조차 견적이 잡히지 않는 상대.
콰아아앙!
“컥……!”
순간적으로 가속한 카즈라의 돌진에 메이파가 한참을 튕겨져 나갔다.
카즈라의 뿔에 복부가 꿰뚫리는 치명상을 입은 그녀의 상태.
피를 한껏 토해 낸 그녀는 비틀거리며 겨우 일어났다.
‘이, 이런…….’
메이파로서는 완전히 처음 본 보스 몬스터의 특성이 갑자기 튀어나온 탓에 대처가 늦어 버렸다.
헌데 그런 반면 카즈라는 몬스터 주제에 이미 그녀의 싸움 방식에 대해 알고 있다는 듯이 덤벼왔다.
헌터도 아니고 몬스터와의 싸움에서 되려 분석당한 채로 싸우다니, 난생 처음 겪는 일이었다.
“메이……!”
“지금 다른 쪽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큭!”
라우가 등을 돌리려 하자, 곧장 성현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분명 네크로맨서가 언데드 소환수 하나 없이 검을 들고서 먼저 덤벼드는 기이한 광경이다.
한데 제대로 검을 마주 섞게 되자, 눈앞의 상대가 네크로맨서라는 생각 따윈 들지 않았다.
파앗!
급소를 아슬아슬하게 빗겨 간 성현의 칼날.
분명 검과 검으로 맞붙었음에도 철저히 성현이 이 싸움을 주도하고 있었다.
이전에 중국에서 잠깐 마주쳤을 때보다, 그가 보이는 움직임은 훨씬 더 빨라져 있었다.
“네놈… 그 사이에 대체 무슨 짓을…….”
“벌써 그런 소리가 나오기엔 너무 이른데. 미안하지만,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어.”
애당초 그의 주위로 느껴지는 기운부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고.
성현을 마주하고 있는 라우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 * *
진서연을 포함한 백룡 길드의 헌터들은 싸움을 중단하고서 전장에서 이탈했다.
이미 천하 길드와의 치열한 싸움으로 인해 무시 못 할 피해를 입었기에 부상자 치료 및 재정비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싸움이 멈춘 것은 전혀 아니었다.
애초에 백룡 길드의 헌터들이 물러난 것은 괜히 휩쓸리지 말고 잠시 물러나 있으라는 성현의 말 때문이었다.
오히려 훨씬 격해진 전장은 아비규환을 방불케 했다.
키이이이익!
까마득하게 몰려드는 수많은 그림자의 군단.
이곳 항구 인근을 모조리 메워 버릴 만큼 온갖 몬스터들이 미친 듯이 쏟아져 나왔다.
일반 길드원들이 이 수많은 몬스터의 파도 앞에 속절없이 쓸려 나감은 물론.
그나마 유의미하게 저항할 수 있는 S급의 전력들조차 군주들의 공격에 하나둘 사냥당했다.
단순 간부들이라면 모를까 천하 길드의 대간부들은 국내의 9대 길드장들과 거의 비슷한 취급을 받던 이들인 만큼, 아무리 성현의 군주들이라 해도 쉽게 잡아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하나 열한 번째 필드의 공략을 완전히 마치며 큰 폭으로 성장한 군주들의 레벨.
거기다 퀘스트로 인한 대량의 추가 보상까지.
열흘에 가까운 미친 듯한 사냥 속에서 성현과 모든 군단의 하수인은 큰 폭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이전의 기준 따위는 무의미해졌다.
열한 번째 필드에서부턴 그곳 몬스터들의 수준도 훨씬 강해진 만큼, 그에 걸맞게 더 많은 보상과 경험치를 주었고, 덕분에 이런 놀라운 성장을 보일 수 있던 것이다.
콰득!
“이게 마지막인가.”
성현은 축 늘어진 헌터의 몸뚱이를 옆으로 휙 던졌다.
격렬한 전투의 흔적으로 곳곳이 파괴되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항구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완전히 종료되며 싸움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철컹!
그의 바로 뒤편에 있는 이즈나와 칼라일, 그리고 주변에 선 카즈라 등.
S급의 적 전력들을 처치하고 돌아온 군주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천하의 여러 간부는 물론, 대간부만 무려 열 명 가까이 쓰러뜨린 눈부신 활약을 보인 이들이었다.
물론 성현의 군단 내에서 군주급의 손실은 단 하나도 발생하지 않았다.
“큰 피해 없이 거둔 완승입니다. 다만… 주군께서 말씀하셨던 것에 비하면 놈들의 숫자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옆으로 다가온 이즈나가 말했다.
그러자 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나게 몰려들던 항구 지역을 완전히 쓸어 버리며 탈환에 성공했지만, 정작 놈들을 이끈 천하의 길드장 웨이홍은 이 자리에 없었다.
이번 싸움에 동원된 대간부들의 숫자도 미리 첩보망을 통해 알아낸 것보단 적었다.
“처음 백룡 길드를 공격했을 때만 해도 놈은 본대와 함께 있었어. 뭔가 의도한 노림수는 아니겠지. 설마 이 곳이 밀려 버릴 거라곤 상상도 못 했을 테니까.”
오히려 방심했기에 길드장이 자리에 있지 않고 사라져버린 상황.
그렇다면 다음 움직임이야 뻔하다.
보주를 빼앗겨 초조한 녀석이 최대한 빨리 물건을 회수하기 위해 움직였을 동선이라면 하나뿐일 테니까.
* * *
콰아아아앙!
서울에 위치한 이지스의 본사 입구.
요란한 폭발과 함께 정문이 통째로 날아갔고, 그 안으로 수백여 명의 헌터가 우르르 들이닥쳤다.
천하 길드의 헌터들이었다.
“하… 이 자식들 급하긴 급했나보네.”
헛웃음을 흘린 한승희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들이닥친 수백여 명의 헌터 중 대간부들이 잔뜩 늘어선 것은 물론, 천하 길드의 길드장 웨이홍까지 앞에 서 있었다.
세계구급에서 노는 저 정도 거물의 얼굴은 몰라볼 수가 없었다.
거만한 얼굴의 웨이홍은 한 발 앞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목숨이라도 건지고 싶다면 순순히 말하는 게 좋을 거다. 네놈들이 훔쳐간 물건은 어디에 있지?”
“길드가 산산조각날 게 무섭긴 한가 봐. 하기야 보주만 없어도 길드가 와해되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까.”
한국을 먹어 치우든 말든 천하 길드의 입장에선 보주가 없으면 기존의 세력은 절대 유지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중국 전체를 밑으로 둔 저 거만한 녀석이 보주를 되찾기 위해 급하게 여기까지 행차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보주의 위치라면… 나도 몰라서 말해 줄 수가 없네.”
한승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러자 웨이홍의 표정은 단박에 험악해졌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입을 다물겠다는 거냐? 무의미하다는 걸 알 텐데.”
“어차피 어떤 빌어먹을 자식과 계약을 맺은 탓에, 뒤통수 친다고 목숨을 건질 수가 없거든? 그리고 믿는 구석도 있어서 말이야.”
“헛소리를… 어차피 한국이 내 손안에 들어오는 건 피할 수 없다. 숨어 버린 너희 길드장과 보주를 찾아내는 것 따윈 시간문제에 불과해.”
정면 승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저들도 알고 있을 터.
보주를 숨긴 뒤 시간이라도 끌어 볼 속셈인 듯 하지만, 어차피 한국을 통째로 먹어 치울 마당에 협상이 통할 리가 없었다.
“어설프게 머리 굴리는 놈은 단명하기 마련이지. 어차피 간부야 많을 테니, 일단 네놈부터 죽여 주마.”
터엉!
검을 뽑아든 웨이홍이 한승희를 향해 발을 굴렀다.
S급 헌터인 한승희조차 반응하지 못했을 만큼, 매우 빠른 가속이었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선 웨이홍의 칼날.
“큿……?”
“죽어라.”
한승희의 목을 향해 날아드는 칼날.
뒤늦게 반응한 그녀의 움직임은 너무 늦었고, 꼼짝없이 베일 수밖에 없었다.
빠아악!
하나 갑작스럽게 끼어든 발길질에 얻어맞은 웨이홍이 튕겨져 나갔다.
분명 옆에서 나타날 그 어떤 방해물이 없었음에도 끼어든 변수.
거기에 더해 튕겨져 나간 웨이홍은 시야가 갑자기 뒤틀리더니 풍경이 바뀌었음을 눈치챘다.
파아아앗!
“포… 포탈?”
바닥을 굴렀던 웨이홍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금까지만 해도 이지스의 본사 안에 있던 그는 전혀 다른 장소로 나와 있었다.
갑작스럽게 생성되었던 포탈과 함께, 그 안으로 밀어 넣은 누군가의 발길질.
“남의 건물 안에서 민폐 끼치지 말고, 너희 땅에서나 싸워 보자고.”
웨이홍의 앞에 선 성현이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주변을 둘러본 웨이홍은 그제야 자신이 중국 본토로 건너오게 됐음을 눈치챘다.
그것도 완전히 폐허가 된 천하 길드의 본거지 중 하나였다.
“네놈 설마… 내 보주를 사용해서……!”
죽일 듯이 노려보는 그의 눈빛에도 성현은 그저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릴 뿐이었다.
그의 짐작대로 성현은 이미 던전의 포탈을 이용해 자신의 군단을 움직였고, 중국에 위치한 천하의 모든 본거지들을 털어 주고 있었다.
저들은 손쉽게 한국을 손에 넣을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지만, 이미 천하의 모든 직속 거점은 말끔히 초토화되어 있었다.
“이곳이 마지막 남았던 천하 길드의 거점이니. 너도 여기서 함께 끝을 내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