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일인군단 (3)
“젠장, 이성현 그 자식… 아직도 안 나타나고 뭐 하는 거야!”
한승희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말투든 겉모습이든 꽤나 초조해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게 이지스의 길드장인 성현이 자리를 비운 지 벌써 일주일이란 시간이 넘게 지났다.
물론 성현이 일을 잔뜩 떠넘기고서 용건이 있답시고 사라져 버리는 게 한두 번 겪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도중에 연락도 한번 하지 않고서, 이렇게 자리를 비운 기간이 길어진 적은 없었다.
“설마 천하 놈들에게 당한 건 아니겠지?”
“그럴 리는 없을 거다. 녀석이 죽었다면 길드의 헌터들이 멀쩡히 활동하고 있을 리가 없으니까.”
불쑥 끼어든 성찬일이 말했다.
그들이 몸을 담고 있는 이지스 소속의 직속 헌터들은 사실 인간이 아니라 성현의 소환수 중 하나였다는 사실.
길드 내부에서도 이러한 비밀을 알고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네크로맨서인 성현이 쓰러졌다면 그에게 종속된 소환수인 길드원들도 멀쩡하지 못할 것이다.
“뭣보다 우리도 문제없이 멀쩡하고 말이야.”
성찬일이 슬쩍 팔을 벌린 채 말했다.
길드의 깊은 비밀을 알고 있는 그들 역시 피의 맹약으로 이루어진 관계였다.
성현이 죽으면 마법으로 묶인 자신들도 위험해졌다.
물론 이는 성현이 한승희에게 했던 새까만 거짓말이었지만, 그들로선 성현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 방법이 없었다.
“무사하다면 그나마 다행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난리통에 어딜 가있는 건데?”
“그건 알 수 없지. 어쨌든 문제는 가만히 길드장을 기다리고 있기엔 지금 상황이 심각하다는 거다.”
성현이 자리를 비운 공백 사이.
천하 길드의 헌터들이 국내의 수도권 지역 내로 엄청난 숫자가 들이닥치고 있었다.
서울 인천 경기,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 중국 길드들의 침공이다.
분명 천하 길드는 지역간 이동을 돕는 보주를 잃은 탓에 인력을 보내는데 훨씬 더 많은 비용을 투자해야만 했다.
헌데 놈들은 오히려 더욱 사활을 걸고서 끌어 모을 수 있는 모든 자원을 꺼내들었다.
이는 이미 천하 길드가 점령했던 지역 곳곳에서 균열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기 떄문이다.
사실상의 속국 형태로 만들어 버린 해외의 몇몇 국가는 물론, 중국 내부에서조차 돌아가는 판도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고 있는 세력이 많아졌다.
수년 전에 천하 길드의 아래로 뭉쳐 한 세력으로서 공고히 되었다고는 해도, 아직 자신의 세력을 거느리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한때 자신의 지역 내에서 왕이나 다름없는 행세를 하던 대간부들은 누군가의 아래로 머리 숙이는 게 반가울 리 없었다.
길드의 장악력이 떨어지고 이전과 같은 전 지역의 지배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즈음, 천하 길드는 산산이 흩어지며 균열이 생길 거라는 말이다.
때문에 그들은 사활을 걸고서 한국 전체를 모조리 뒤엎고서라도 보주들의 회수를 진행해야 했다.
“놈들의 숫자 자체는 말할 것도 없고, 대간부들까지 대거 찾아왔다. 오히려 내부에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모조리 이쪽으로 보낸 듯 해. 그런 반면 이지스의 간부들은 대부분 자리를 비운 상태로군.”
성찬일이 달갑지 않다는 듯 말했다.
이지스 길드 간부들의 공백, 던전 공략을 위해 성현이 모조리 불러들인 탓이다.
그나마 일반 길드원의 경우 상당수가 남아있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미 전면전에 버금갈 만큼 경기 남부와 서울 지역에 동시다발적인 전투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두 거대 길드의 세력을 흡수하고서 항복한 헌터들, 그리고 이지스를 원하고서 새롭게 합류한 헌터들까지.
굳이 성현의 마족들이 아니더라도 이전보다 훨씬 덩치가 커진 이지스 길드였지만, 그럼에도 규모에 있어선 천하 길드와 비할 바가 되진 못했다.
거기다 핵심 전력인 성현과 이지스의 직속 간부들이 빠지기까지 했으니, 전력상 완전히 열세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인천을 통해서 쏟아지는 놈들의 수가 엄청나.”
“보주를 잃은 이상 항구를 거칠 수밖에 없는 거겠지. 백룡 길드에서 최대한 놈들이 밀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틀어막아봤을 테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니까.”
“이대론 인천이 통째로 천하 길드에게 넘어갈 거야. 그러고 나면 훨씬 많은 중국 헌터들이 수도권 전역으로 쏟아져 나오겠지.”
“그래, 일단 입구부터 틀어막아야 한다.”
뜻이 맞춰진 한승희와 성찬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룡과의 동맹 관계는 청성을 상대하기 위해 일시적이었을 뿐, 더 이상의 깊은 관계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무너진다면 그 다음은 이지스 길드의 전역으로 쏟아질 놈들의 공격이 이어진다.
일단 수도권으로 통하는 가장 가까운 입구인 인천 지역부터 틀어막아야 한다는 것.
덜컥!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너는…?”
그때, 갑작스레 끼어든 목소리에 그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들의 앞에 나타난 것은 재난관리국의 국장, 설기태였다.
* * *
쿠구구궁!
연달아 폭발이 터져나오고 있는 전장.
수많은 헌터들이 뒤엉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평소 심심찮게 벌어지곤 하는 지역 길드 간의 싸움으로는 흉내도 없을 만큼 커다란 규모의 싸움.
백룡 길드와 천하 길드와의 전면전이었다.
서걱!
달려들던 수 명의 헌터들이 순식간에 베여 나뒹굴었다.
그리곤 그들의 시체를 밟고서 가장 앞에서 앞장서는 한 명의 헌터.
백룡의 길드장, 검제 진서연이었다.
“조, 조심……!”
콰득!
진서연은 앞을 가로막는 자들을 잔혹하게 베어가며 길을 뚫고 나가는 중이었다.
필사적으로 앞으로 나서며 길을 뚫고 있는 이유.
저들에게 빼앗긴 항구들을 다시 되찾기 위해서였다.
만일 이대로 항구를 놈들에게 내어주게 된다면 중국에서 그야말로 엄청난 숫자의 헌터들이 쏟아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국내의 세력들로선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긴다.
“젠장.”
진서연이 이를 빠득 갈았다.
그야말로 미친 듯이 쏟아지는 천하 길드의 헌터들은 베어도 베어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길드의 명운이 걸린 싸움답게 놈들은 그야말로 모든 전력을 끌어 모았고.
최소 B랭크 이상의 고위 헌터들이 던전에서 스켈레톤 몬스터가 쏟아지듯 쏟아지고 있었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전력은 대간부들이었다.
콰아아앙!
요란한 폭발이 터져 나오며 주변을 휩쓸었고, 미리 몸을 빼낸 진서연은 훌쩍 뒤로 물러났다.
폭발의 위력만 보더라도 평범한 헌터의 것은 아니었고.
곧이어 날아드는 칼날에 그녀는 재빨리 검을 휘두르며 쳐내야 했다.
“죽여주마!”
“네놈은……!”
카가가각!
기운부터가 완전히 다른 남자의 공격적인 검격이 진서연을 압박해왔다.
물론 검 실력만으론 누굴 데려온다 한들 밀리지 않을 그녀였기에 공격을 흘려내며 오히려 상대에게 역공을 가할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그녀가 재빨리 검을 뻗으려는 순간.
후웅!
곧이어 날아드는 암기들이 진서연의 목을 노렸다.
남자의 검술과 발을 맞춘, 매우 빠르고 날카로운 암기 공격에 진서연은 몸을 급히 빼내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간신히 둘의 합공에서 벗어난 그녀는 눈앞에 선 두 명의 헌터를 마주했다.
“대간부나 되어선 동시에 달려드는 꼴이라니.”
“착각하지 마라. 네 놈 따위에게 낭비할 시간이 없을 뿐이니까.”
타악!
라우와 메이파.
천하 길드의 대간부가 둘이나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그 중 검을 사용하던 남자, 라우는 살벌한 살기를 흩뿌리며 성큼 다가섰다.
“건방진 놈들. 그동안 주제도 모르고 우리의 발목을 잡아왔다고 생각하겠지만, 이 따위 소국의 길드 따위 짓밟는 건 아무 것도 아니다.”
“…….”
입술을 깨문 진서연의 시선이 이리저리 돌아갔다.
각개격파조차 쉽진 않을 대간부들이었는데, 저들 둘이 한꺼번에 달려든다면 승산을 잡기란 어려웠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주변 전장의 상황이었다.
전장에 나타난 천하 길드의 대간부는 저 둘이 전부가 아니었고, 이미 그녀가 있지 않은 쪽에선 대간부들의 활약으로 속수무책으로 밀려나는 중이었다.
같은 S급이라 해도 백룡의 최고 간부들로선 천하의 대간부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대간부인 셴룽이 과거 그녀와 치열하게 싸우며 승부를 가렸듯, 진서연이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쓰러뜨릴 수 없는 수준대의 실력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대간부들이 한꺼번에 동원되어 들이닥치고 있으니 당연히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
라우와 메이파가 그저 진서연을 붙잡고만 있어도 속수무책으로 결판이 나버리는 상황.
총력전 양상으로 흘러가게 된 이상, 중국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천하 길드와 국내의 9대 길드 중 하나인 백룡과의 대등한 싸움이 성립될 리가 없었다.
“괜히 머리 굴릴 생각 따윈 마라. 길드장께서도 이미 한국에 도착하셨으니. 네놈들은 이제 끝이…….”
콰아아앙!
“크아아아아!”
바로 그 때, 옆 거리의 건물들이 우르르 무너지며 괴수들의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헌터들로선 너무나 익숙한 몬스터 특유의 울음소리.
하지만 헌터들로 가득한 이 곳에 난데없이 몬스터가 나타나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뭐, 뭐야 저건?”
“몬스터?”
갑작스레 전장에 난입한 몬스터 무리들.
무너진 건물 사이로 반인반수의 모습을 한 괴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무엇보다 당황스러운 것은 저것들이 대체 무슨 몬스터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겉모습으로 봐선 누가 봐도 던전의 몬스터인 건 확실해보였지만, 그럼에도 그들로서는 난생 처음 보는 종의 몬스터였다.
어지간한 몬스터들의 패턴은 지난 십여 년간 수없이 기록되어 왔기 때문에, 새로운 몬스터의 출현은 매우 드물다는 점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그 순간.
메이파의 등 뒤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콰아아아앙!
“큭……? 이게 갑자기 무슨……!”
거대한 괴수의 돌진에 튕겨져 나간 메이파가 황급히 몸을 빼냈다.
겨우 직격은 피했음에도 온 몸이 욱신거려왔다.
아무리 다른 쪽을 바라보며 방심했다고는 하나, 방금의 그 속도는 그녀조차 순간 따라잡지 못했을 정도였다.
쿠웅!
“크르륵!”
방금의 돌진으로 인해 흩날리는 잔해들 사이로, 카르고트들의 군주 ‘카즈라’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커다란 덩치와 위협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군주.
한 눈에 보기에도 보통의 몬스터가 아니다.
쉽지 않은 적이라는 사실에 대간부인 라우와 메이파의 감각마저도 경고를 보내왔다.
[카르고트 대부족장 ‘카즈라’]
[등급 - 군주]
[레벨 - 381]
[보스의 위압감], [맹렬한 돌파], [괴력]
“느껴지는 기운으로 봐선 최소 S급 이상. 그것도 보스 몬스터라니, 이건 대체…….”
‘…설마.’
놀란 것은 진서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검은 그림자와 마력을 품고 있는 보스급 몬스터.
이미 본 적이 있는 광경이었고, 이 자리에 누가 찾아온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빼앗긴 물건을 받으러 왔으면,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날 찾아왔어야지.”
“네… 네놈은……!”
건물 위에서 나타난 남자의 모습.
고개를 들어올린 라우는 검을 콰악 움켜쥐었고, 성현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어떻게 겨우 시간은 맞춘 모양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