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일인군단
츠츠츠츠츳!
온통 바스라진 잔해 더미로 가득 찬 장소.
사방에서 치솟았던 불길들은 간신히 잡혔지만, 격렬한 전투의 흔적으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알 수 있듯 그 피해가 막대했다.
거체를 지닌 자이언트 앤트들의 시체가 널브러진 그림자 아래.
부상당한 천하 길드의 인원이 곳곳에서 실려 나갔고, 대간부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부상 없이 멀쩡한 모습이었지만,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심각하기 짝이 없었다.
“놈의 얼굴을 똑똑히 봤다는 거지?”
“그래, 애초에 이딴 능력을 쓸 네크로맨서가 또 어디 있는데!”
똑같은 말을 묻는 남자의 말에 라우가 버럭 소리쳤다.
이 꼴이 나 버린 이상 착각할래야 착각할 수도 없었다.
그들의 본거지에서 쏟아지던 수많은 개미.
도저히 네크로맨서 한 명이 다루었던 거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그 수가 많았다.
심지어 한 개체마다의 무력 역시 규격 외였다.
기존에도 S급 던전에나 등장하는 자이언트 앤트는 그 자체로 강력한 몬스터였다.
하지만 이번에 그들의 앞에 소환된 개미 군단의 힘은 결코 일반적인 강함이 아니었다.
성현의 그림자를 품고 있는 개미들은 일반 자이언트 앤트보다 더욱 질기고 강했고, 천하 길드의 대간부들조차도 쏟아지는 개미 군단을 마냥 간단히 무력화할 순 없었다.
워낙 쏟아진 숫자가 많은 데다가 일부 원소에 대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지 않나, 머리가 날아가도 덤벼들 만큼 생명력까지 훨씬 질겼으니 말이다.
“방심이나 하고 자빠져 있던 우리 전부가 그놈에게 완전히 당해 버린 거라고! 눈앞에서 그딴 식으로 놓쳐 버리다니.”
성현의 얼굴을 떠올린 라우가 이를 빠득 갈았다.
상대가 먼저 싸움을 피하고서 등을 돌렸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야말로 완패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결과였다.
이탈하게 된 헌터 전력에 더해 재산상의 피해까지 매우 심각했다.
이나마도 먼저 포탈을 타고서 돌아간 성현이 남아 있던 개미들의 소환을 해제하며 피해가 줄어든 것이었다.
만약 그 정도 숫자의 몬스터가 죽을 각오로 끝까지 들이받고서 싸웠으면 길드의 피해가 훨씬 더 컸을 게 뻔했다.
물론 성현도 수만에 이르는 자이언트 앤트를 여기서 잃고 싶진 않았기에 돌려보낸 것이었지만.
“설마 포탈을 통해 역으로 공격을 당할 줄이야. 그것도 고작 헌터 하나가 불쑥 나타나 휘젓고 돌아가다니…….”
“완전히 당했어. 수를 쓴 것과 별개로, 놈의 실력이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단 훨씬 뛰어나다.”
대간부들이 한마디씩 이야기했다.
일방적인 공세에나 익숙하지 설마 이렇게 역공을 당할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그 어떤 미친 녀석이 자신들이 연 포탈을 타고서 중국, 그것도 천하 길드의 본거지 한복판에 나타날 생각을 하겠는가?
오히려 그런 사실 때문에 꼼짝없이 허를 찔려 버린 것이다.
뭣보다 그간 세계구급에서 놀던 천하 길드였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능력을 지닌 네크로맨서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적사 길드는 지금쯤이면 이미 전멸 당했겠지.”
“한국의 일 때문에 공석이 하나 더 생겨 버렸군.”
“같은 나라에 있던 놈들은 뭐 한 거야? 저 정도 능력이라면 전력을 더 보내 달라고 하던가.”
성현의 힘이 설마 이 정도일 거라고는 미처 전해 듣지 못했다.
그저 재난관리국의 엄태오가 요청한 수준대로, 적사 길드 정도가 함께 나서면 제압이 가능할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성현에 대해 잘 몰랐던 건 재난관리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울을 지배하고 있던 청성과 화신, 양 길드에게 견제를 당하던 재난관리국의 헌터들이다.
반 허수아비 상태라고는 하나 정부 집단을 통째로 주무르는 권력에, 대형 길드 이상 가는 자체적인 정보망이 있었지만, 두 길드가 서울에 존재하는 이상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워낙 빠른 성현의 성장 속도에 더해, 청성과 화신 길드조차 제대로 정보를 접할 수 없었던 그에 대해 제대로 알 리가 만무했다.
“젠장. 이딴 개망신이 따로 없지.”
“지금 망신 같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
대간부들 사이의 분위기가 단번에 무거워졌다.
지금 그들이 처한 문제는 단순 습격으로 인한 패배 따위가 아니다.
금고에 있던 물건들까지 거하게 털어 간 성현이다.
하지만 천하 길드에겐 그런 자잘한 손해 정도는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 있었다.
바로 천하 길드가 지닌 최고의 아티팩트이자 전략 자산인 공간의 보주를 모조리 빼앗겼다는 것.
지금 그들 길드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참이었다.
* * *
“공간의 보주는 천하 길드의 근본이나 다름없어. 그런 물건을 빼앗겼으니… 지금쯤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겠네.”
한승희가 큭큭 웃으며 고소를 머금었다.
누구라고 한들 국내 길드도 아닌 외국 길드들이 근처에 기웃거리며 설치고 다니던 것을 마음에 들어 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단신으로 쳐들어가 천하 길드의 본거지 한복판을 초토화하고선 아주 큰 엿을 먹여 주었으니, 직접 보지 않아도 속이 시원해질 정도였다.
“확실히… 믿은 보람이 있군.”
벽에 기대어 있던 성찬일 역시 한마디 거들었다.
외국 길드 탓에 청성 내에서 한인호와 대놓고 마찰을 빚을 정도였던 성찬일의 경우 말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성현과 손을 잡은 이유도 바로 외국 거대 길드들의 개입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잠깐, 마침 다 모였으니까 하는 말인데. 넌 왜 길드 업무를 안 돕는 건데? 청성도 사라진 마당에 맨날 당연하다는 듯이 빠져 있네.”
한승희가 성찬일을 휙 바라보며 말했다.
“난 그런 방면의 일은 해 본 적이 없다. 길드장도 아닌 데다가, 나머지 일은 내 밑의 간부들이 알아서 하곤 했으니까.”
“해 본 적이 없어? 그럼 배우면 되겠네.”
“길드에 들어올 때 약속에선 그런 내용이 없었는데.”
“누군 약속해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목청을 높인 한승희가 한껏 그를 몰아세웠다.
한때 청성의 수뇌부였던 그를 불편해하던 것도 사라졌는지 거침없는 그녀의 모습이다.
물론 성찬일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서 대꾸할 뿐이었지만.
“진정해. 그래도 약속대로 일을 도울 유능한 인재 한 명은 구해 왔잖아.”
“한 명? 그러면 뭐해? 일이 두 배로 늘었는데!”
어중간하게 거드는 성현의 말에 한승희가 대꾸했다.
곤란함을 느낀 성현은 시선을 슬쩍 돌렸지만, 옆에 물러서 있던 강일훈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길드 업무에 능숙한 강일훈이 돕고 있긴 하지만 쏟아지는 일에 비하면 만족스러울 만큼 변화가 있진 않은 모양이다.
하기야 청성과 화신이라는 국내 최대의 길드 두 곳을 집어삼킨 직후였으니, 쏟아지는 업무의 양에 불만을 가지는 건 당연했다.
다행히도 이야기의 논점을 다시 본론으로 돌린 건 성찬일이었다.
“어쨌든 네가 놈들의 모든 보주를 빼앗은 덕에 모든 활동에 제동이 걸릴 거다. 길드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까진 아니라고 해도, 최소한 여태까지 벌여 온 방식은 포기해야겠지.”
성현은 천하 길드에게 체급을 고려해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피해를 주었고, 한국을 노리려던 그들의 계획에도 중대한 차질이 빚어졌다.
무엇보다 이번 사건으로 인한 보주의 부재는 천하 길드에겐 급소를 얻어맞은 치명타나 다름이 없었다.
제약이 거의 없는 지역 간 공간 이동을 통해, 드넓은 구역에 걸쳐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던 게 천하 길드의 최대 강점이었다.
헌데 그 핵심인 보주가 사라졌으니 최대 강점이던 지배력의 약화를 불러오게 될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즉, 그동안 천하 길드가 보여 온 팽창주의적 행보에 제동이 걸림은 물론.
이미 손에 넣은 해외 국가들에 대한 지배력이 급격히 약화되며, 심지어 중국 내부의 결속마저도 위험했다.
“오히려 발악을 하려 들겠는데.”
“그래, 놈들의 성향상 순순히 포기하진 않을 거다. 이대로는 천하 길드의 존속 자체가 위협받는 것이라고 간주할 테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 어떻게든 빼앗긴 보주를 회수하려 들겠지.”
“그럼 이건 이제 어떻게 할 셈이야?”
한승희와 성찬일의 시선이 보주의 앞에 선 성현에게로 향했다.
지금 그들의 앞에 꺼낸 것이야 수십 여 개의 보주 중에 하나일 뿐.
이전보다 한국을 공격하는 데에 더 곤란해진 천하 길드였지만, 오히려 더 총력을 다해 올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물론 천하 길드가 노릴 게 무섭다고 이 보주를 버린다거나 다른 해외 길드에 넘긴다는 선택지 따윈 없었다.
애초에 그럴 거라면 시작조차 안 했다.
“어차피 천하 길드는 보주가 있든 없든 한국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을 거야. 기왕이면 시간도 벌고 더 많은 비용을 강요하는 편이 낫지.”
파앗!
보주를 집어 든 성현은 다시 자신의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이 보주들을 길드 내에 어설프게 보관했다가는 무조건 노려질 것이 뻔했지만,
성현은 인벤토리에 항상 넣어 두면 그만이었다.
한번 인벤토리에 들어간 물건은 성현이 스스로 꺼내기 전까진 결코 다시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사실상 보주를 도둑질당하거나 빼앗길 일 따위는 없다는 것.
“하지만… 마냥 묵혀 두기엔 아까운 물건이긴 해.”
성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띄워졌다.
길드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사용하라고 꺼내 두기엔 불안해도, 마침 적당한 용도로 사용할 구석이 있었다.
* * *
“역시… 던전 안에서 봤을 때도 느꼈지만, 굉장히 흥미로운 물건이네요.”
보주를 내려다보고 있는 네이아가 중얼거렸다.
리치답게 탐구욕으로 가득 찬 눈빛의 네이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아티팩트들의 마력을 훑으며 샅샅이 분석하고 있었다.
“어때, 써먹을 수 있겠어?”
“이 정도로 강력한 아티팩트를 비틀어 활용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에요. 하지만 마나의 맥을 활용한다면 불가능할 건 없죠. 시간만 충분하다면요.”
지금 네이아와 성현이 서 있는 장소는 여덟 번째 필드인 영원의 호수 지하이자, 지하 서고의 더 아래에 위치한 ‘마나의 맥’이었다.
충만한 마력으로 가득 찬 공간 속 리치들의 실력까지 합쳐진다면 불가능할 건 없다는 말.
‘재사용 시간이나 거리의 제약이 없는 반영구적인 포탈이라… 가능하기만 하다면 엄청난 수를 얻게 되는 거겠지.’
이전에 두 번째 가디언이었던 니아글리프가 멋대로 서울 지역 내에 또 다른 던전의 통로를 만들어 냈듯이.
이 보주들을 활용해 포탈을 자유자재로 만들어 낼 수만 있다면 앞으로의 군단 운용에도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지하 던전의 드넓은 각 필드들을 이을 수 있게 됨은 물론, 필요하다면 외부와도 통하는 새로운 통로를 만들 수도 있었다.
활용 방법이 무궁무진한 또 다른 무기를 얻게 된 셈이다.
“주군,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그때, 이즈나가 성현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러자 성현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간만에 진득하니 놀 수 있겠어.”
그들이 내려서 있는 필드의 지상.
11번째 필드로 통하는 입구 부근엔 어마어마한 몬스터 군단이 오와 열을 갖춘 채 성현의 명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곧 더 큰 파도가 올 것이었고, 그동안 성현은 자신을 포함한 군단의 레벨과 규모를 한껏 올려 둘 셈이었다.
겁도 없이 한국으로 발을 내딛을 이들로선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