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누구에게나 계획은 있다 (2)
“차, 창고가…….”
“마침 잘 왔네. 이지스에서 넘기고 간 물건들이야.”
서울에 위치한 흑련 길드의 본거지.
물류를 위해 준비된 거대한 창고들이 한가득 차 있었다.
말 그대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각종 던전 자원들.
종류를 가리지 않고 엄청난 양은 물론이거니와, 그것도 하나같이 고품질의 돈이 될 만한 품목들이었다.
“이런 걸 다 어디서 가져온 건지…….”
곰 가면의 남자가 멍하니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지스에서 가져온 물건만으로 거의 과부하 직전일 만큼 여러 창고들이 한꺼번에 포화 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뭐, 조금 당혹스럽긴 하지만 이게 다 돈다발이라는 거니까. 우리도 덩치가 많이 불어난 덕에 아직까진 어찌어찌 소화가 가능하고.”
흑련의 길드장, 서연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지스 길드의 물건 중 암시장을 거쳐야 할 품목들은 모조리 흑련의 손을 거치기로 이미 암묵적인 합의가 된 상태다.
그 덕분에 최근 흑련 길드가 얻는 수익은 여지껏의 기록들을 가뿐히 넘어섰고, 그 자금은 다시 흑련의 확장에 쓰였다.
두 길드가 무너지고 난 뒤, 어느새 7대 길드의 구성으로 바뀌어 버린 세력의 판도.
이런 격변의 여파는 양지가 아닌 음지에서도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흑련은 국내 최대의 세력이 된 이지스 길드를 등에 업고서 수도권 지역의 암시장들을 완전히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비교적 마이너한 뒷골목의 사정이었기에, 유례없는 강력한 후원자를 바탕으로 세력을 뻗어 나가는 흑련을 막아 낼 수 있는 세력이 국내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의 사업은 급속도로 확장되었고, 덕분에 성현이 쏟아내는 던전의 물량들도 거뜬히 소화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도 이 많은 물건은 다 어디서 나는 건지… 어째 갈수록 쏟아내는 양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야 서울 전역을 접수한 데다 원래의 구역까지, 예전 9대 길드 중 세 곳의 몫을 쓸어담듯 했으니 쏟아져 나오는 상품의 양도 엄청나겠지. 물론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예상을 한참 뛰어넘은 양이긴 하지만 말이야.”
이지스 길드에서 나오는 모든 자원이 흑련을 거칠 필요는 없었다.
이지스는 어디까지나 양지에 있는 길드였고, 이미 정식적인 판로를 통해 거래를 하고서 일부를 암시장에 쏟아내는 양이 이 정도라는 것이다.
애초에 이지스가 두각을 드러내기 전부터 성현이 쏟아내던 물건들을 생각해 보면, 마치 마르지 않는 화수분이라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어쨌든 영왕을 선택한 것은 역시 성공적이었어.”
청성과 이지스 사이에서 이루어졌던 그녀의 선택.
당시 리스크가 있긴 했지만 정답을 맞춘 데 돌아오는 보상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결과를 보여 주고 있었다.
어느새 그들의 영향력은 어지간한 대형 길드들도 흑련의 아래에 숙이고 들어와야 할 정도였다.
“물론 양지의 길드와 깊게 손을 잡은 만큼 리스크도 존재해. 이지스가 무너지면 우리도 위험해진다는 뜻이니까. 그러니… 우린 우리의 뒷배가 무너지기 않게 잘 협력해 줘야지.”
타악!
서연화는 곰 가면의 남자에게서 서류를 건네받았다.
창고쪽에 잠시 시선을 빼앗기긴 했지만, 그녀를 찾아온 것은 바로 이쪽의 용건을 위해서였다.
“어디… 쓸 만한 정보는 물어왔을까.”
흑련은 덩치를 불리며 사업망을 곳곳에 펼쳐두기 시작했고.
국내, 그리고 해외에까지 암시장의 사업망들을 확장하며 자연히 듣는 귀도 넓어졌다.
음지에서 나도는 정보와 소문들, 그리고 외부의 거대 세력들의 정보까지 수집을 해가며 이지스를 위한 정보망으로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비교적 만들어진 역사가 짧아 자체적인 정보망이 부족했던 이지스였기에, 서로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최적의 협력 관계였다.
“이건…….”
서류 속에 담긴 내용에 서연화의 표정이 변했다.
안팎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심상찮은 움직임을 감지해 낸 것이다.
“벌써 움직이려는 건가. 생각보다 빠른데?”
“확증까지 잡았으니, 이 정도면 영왕 그 녀석도 좋아할 겁니다.”
“그래, 이지스에게 바로 넘겨줘. 우리에게도 거슬리던 녀석들이었는데, 이번 기회에 청소가 되겠네.”
* * *
“크아아악!”
던전을 가득 메운 좀비들의 울음소리.
온몸이 불그스름한 빛을 띠고 있는 데다가, 겉모습과는 달리 움직임이 매우 민첩해 일반적인 좀비가 아니었다.
무려 A랭크대 던전에서 등장하는 수준대의 몬스터, 크림슨 좀비였다.
콰직!
성현은 맨손으로 달려드는 좀비의 머리를 통째로 날려 버렸다.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머리에 풀썩 쓰러진 크림슨 좀비.
하지만 그의 주위엔 거의 백 여 마리가 넘는 좀비 떼가 있었고, 방금의 차이를 봤음에도 성현을 향해 두려움 따윈 없이 달려들었다.
역시 이미 한번 죽어 본 녀석들은 겁이란 게 없다.
콰아아앙!
“키이이이익!”
성현의 뒤편에서 나타난 그림자 군단이 달려드는 크림슨 좀비들을 순식간에 짓밟았다.
발악하거나 달아날 여지조차 없이 순식간에 쓸려나가는 좀비 떼의 모습.
성현은 이미 던전의 대부분을 지나와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좀비들을 족히 수 천 마리 이상은 잡았지만, 자신이 직접 처치한 건 몇십 마리도 되지 않았다.
콰득!
마지막 좀비가 오우거의 발치 아래 짓밟힌 이후.
성현은 말끔해진 공간을 훑어보았다.
“이 정도 위치면 슬슬 보스룸이 나올 때인데. 저 앞쪽인가.”
던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상한 성현은 군단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얼마 전부터 외부 활동을 병행하기 시작한 성현은 벌써 여덟 번째의 A급 던전을 도는 중이었다.
단순 성장을 위해서라면 몬스터의 수준이 높은 데다가, 8배의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지하 던전에서 사냥을 이어가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물론 명성이든 돈을 위해서든 S급 던전을 한번 돌면 되는 문제였지, 굳이 A급 던전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것은 맞지 않았다.
하지만 성현이 이곳을 찾은 건 단순히 그런 걸 위해서가 아니었다.
“슬슬 손님을 맞아야 하니 조금 더 서두르자고.”
어설프게 잠겨 있는 던전의 문 앞에 선 성현.
그가 옆으로 잠시 비켜서자, 고대 골렘 한 기가 자신의 커다란 주먹을 휘둘렀고, 칭칭 감긴 쇠사슬과 함께 문을 통째로 날려 버렸다.
콰아아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내부의 공간.
방이라 생각이 되지 않을 만큼 아주 거대한 공간이었고, 최소 수백이 넘는 크림슨 좀비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위치한 유독 커다란 덩치의 크림슨 좀비.
이 던전의 지배자인 보스 몬스터였다.
“크아아아아!”
성현의 모습을 본 거대 좀비의 우렁찬 포효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시작된 좀비들의 움직임.
일제히 입구 앞에 선 성현을 향해 수많은 크림슨 좀비들이 달려들었다.
“처리해.”
그러자 성현은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고.
뒤편에서 서 있던 군단이 좀비들을 향해 입구에서 쏟아져 나왔다.
성현의 군단 휘하에 있는 수하들은 전원이 최소 S랭크대 던전 수준이었다.
그런 반면 이곳은 A랭크의 등급대의 던전에 불과했다.
A급과 S급간의 간극이라면 굳이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큰 격차가 있었기에, 이들의 싸움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는 뻔했다.
콰아아앙!
“크에엑!”
무참히 짓밟히는 크림슨 좀비들.
A랭크대의 몬스터들이라면 어딜 가서도 꽤나 부담스러운 존재들이었음에도, 성현의 군단 앞에선 그저 나풀거리는 종이쪼가리에 불과했다.
물론 이는 보스 몬스터라 해도 차이는 없었다.
콰직!
성현을 향해 달려들던 거대 좀비였지만, 앞을 막아선 누더기 군주 ‘올렉’의 주먹에 얼굴을 얻어맞았다.
그러자 충격을 받은 녀석은 순간 자신의 육중한 몸을 가누지 못하며 휘청였고, 올렉은 놈을 바닥으로 찍어 누르며 몰아넣었다.
같은 좀비 계열의 군주에 거의 비슷한 덩치를 지닌 녀석들이었지만, 둘 간의 격차는 훨씬 컸다.
“그어어어!”
콰드드득!
올렉은 거대 좀비의 목을 그대로 완력으로 뜯어내 버렸다.
허무하게 떨어져 나간 보스 몬스터의 목이 바닥을 퉁퉁 나뒹굴었고, 남겨진 녀석의 몸뚱이가 쿵 소리와 함께 주저앉았다.
“제가 나설 것도 없었군요.”
타악!
성현의 곁을 지키던 이즈나는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아직 일반 크림슨 좀비들이 남아 있긴 했지만 보스가 죽은 이상 싸움은 이미 끝이 난 것이었다.
츠츠츠츳!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올렉의 발치 아래에서 검은 그림자가 뻗어졌다.
성현이 과거 올렉에게 불어넣어 주었던 그림자는 순식간에 주위로 뻗어졌고, 한창 전투 중이던 좀비들까지 의식을 잃으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곧이어 하나둘 일어서기 시작한 크림슨 좀비들.
방금까지 따르던 보스가 아닌, 새로운 군주 올렉의 휘하로서 군단에 종속된 것이다.
“이쪽 시체야 뭐… 어쩔 수 없지. 네이아에게 건네줄 수밖에.”
성현은 쓰러진 보스 몬스터의 시체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나름 우두머리급은 될 녀석이었지만, 군단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완전히 같은 종의 보스 몬스터는 둘 이상 거느릴 수 없었다.
불과 얼마 전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물론 이곳의 좀비들은 일반 좀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한 변종이긴 했지만, 같은 몬스터인 좀비 계열이라는 건 변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군주가 둘 이상이 되어 버리면 거느리는 수하들에 대한 주도권에 문제가 생기는 듯 했다.
“어쨌든 네 식구가 다시 늘어났으니 잘됐어.”
“그어어어…….”
올렉이 어눌한 발음으로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존에도 녀석이 이끌던 좀비들은 성현이 능력을 얻었을 초창기 때부터 싸워와 숫자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한데 거기다 청성이 고용한 외국 용병 길드들을 소탕할 때에, 올렉 휘하의 좀비들이 동원되어 제법 큰 전력 손실이 벌어졌다.
지하 던전 내에 좀비들의 리젠 장소는 없는 탓에 한번 잃은 병력이 충원이 되지도 않았고.
그런 와중에 이곳 던전의 좀비 수천여 마리가 올렉의 휘하로 새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감정을 읽기 어려운 녀석이긴 했지만, 올렉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한 듯한 반응이었다.
“그럼 이쪽 용건은 다 끝냈으니. 진짜 본론으로 들어가야지. 이즈나, 놈들은 지금 어디쯤이지?”
“방금 던전의 입구 부근을 모두 장악했습니다. 아무래도 안으로 들이닥칠 채비를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행동에 나선 걸 보니 인원은 모두 합류했나 보네. 겨우 스무 명이라. 내 목숨을 노리고 들어오는 것치고는 적긴 한데, 뭘 준비해 온 건지 한번 보자고.”
피식 웃은 성현은 등을 돌렸다.
* * *
후웅!
던전의 안으로 들이닥친 스무 명의 헌터.
좀비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는 통로엔 성현이 요란하게 싸우며 지나간 흔적들로 가득했다.
“놈이 이 안에 있다.”
엄태오를 비롯한 재난관리국의 헌터들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안으로 들어선 이들은 대부분이 A급에서도 상위의 실력자에, 무려 S급 헌터가 네 명이나 있었다.
물론 이 전력만으로 성현을 상대할 생각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허술하게 활동하는 것부터가 방심했다는 증거다. 기껏해야 우리끼리 손을 쓸 거라 생각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 안일함 덕에 여기가 네 무덤이 될 거다.”
스윽!
엄태오의 손에서 새하얀 빛을 뿜는 아티팩트가 꺼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