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누구에게나 계획은 있다
대표실에서 이루어지던 대화가 끝이 나고.
정부측 헌터들은 방을 빠져나와 황급히 길드 건물을 떠났다.
그러자 그 모습을 지켜본 강일훈이 성현을 향해 다가왔다.
“놈들이 돌아가던데. 이야기가 끝난 건가?”
“그래, 잘 해결됐지.”
“설마 그 녀석들의 헛소리에 넘어간 건 아니겠지?”
“나를 뭘로 보고.”
우려 섞인 강일훈의 말에 성현은 피식 웃어 보였다.
그간 이지스와 함께 보인 독특한 성현의 행보로 인해 정부의 헌터들은 그를 쉽게 구슬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성현은 이미 그들의 속내를 훤히 꿰뚫고 있었고, 서로의 위치 차이를 자각시켜 주는 것이야 간단한 일이었다.
그들은 성현에게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고,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이 빈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진짜 속내만 훤히 꿰뚫린 데다가, 경고를 들을 뿐이었다.
정말 사회를 정상화시키고 싶다면 이지스가 국내를 모두 차지할 때까지 자신에게 최대한 협력하라고 일러두었다.
물론 그들에게 정말 협력 같은 협력을 기대할 리는 없었다.
그저 뒤에서 사고 치지 말고 가만히나 있으라는 게 진짜 뜻이었다.
과연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애초에 놈들은 겉으로 내세운 정상적인 사회로의 회귀 따위 하고 싶을 리가 없었다.
“어쨌든 이쪽 일은 부탁할게. 당분간 업무량은 조금 많을 거야. 서울을 통째로 흡수해 버린 탓에 한창 정신이 없을 때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고 가라. 넌 여기에 발목을 붙잡혀 있을 때가 아니니까.”
강일훈은 알고 있으니 가보라는 듯 팔을 저었다.
이미 저번 자리에서 성현으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해들었던 그였다.
성현이 비록 가면을 벗고서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했다고는 하나,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을 뿐이지 아직 모든 비밀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여태 단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는 마족들의 존재와, 이지스 직속 헌터들이 대부분 인간이 아니라 군단의 몬스터라는 건 철저히 비밀이었다.
덕분에 보통의 직원들에겐 맡길 수 없는 일들이 있었고, 한승희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사람이 바로 강일훈이었다.
강일훈은 청성의 간부 출신으로서 상당히 유능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무작정 힘을 내세워 싸움박질만 해대는 대부분의 헌터들과는 달리, 이 쪽 업계에 대한 깊은 이해도가 있었고, 팀을 이끌며 사무에 대한 감각과 경험도 많았다.
한 대형 길드를 이끌던 한승희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맡은 업무를 잘 처리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부탁한다.”
* * *
“야, 그거 들었어? 청성이 완전히 박살 났다는 거.”
“당연하지. 오늘 종일 그 이야기만 주야장천 나오고 있는데.”
거리의 시민들이 수군거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전국의 방송사와 언론들은 종일 한 가지 소식에만 집중했다.
무려 수도권의 거대 길드 다섯 곳이 동시다발적으로 충돌한 대형사건.
그것도 서로의 운명을 건 총력전이 밤 사이에 벌어졌고, 다음날 아침엔 이미 운명이 결정되어졌다.
서울을 양분하던 거대 세력, 청성과 화신 길드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렸고.
해당 길드의 간판이자 수뇌부인 대다수의 S급 헌터들이 사망함은 물론, 길드장인 한인호와 최성준까지 사망했다.
국내 헌터계를 이끌던 두 거물과 거대 세력이 한순간에 몰락해 버린 대격변이었다.
바로 전날에조차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두 길드가 쓸려나가며 텅 비어버린 서울은 이번 전투의 주역인 이지스 길드의 몫이 되었다.
이지스 길드에선 발빠르게 움직여 각성자의 지나친 횡포를 막는 내부 규정의 서울 지역 확대 적용을 발표했고.
법에 대한 사실상의 면책권이 있는 것이나 다름없던 대형 길드 소속 헌터들 역시 예외는 없었다.
이러한 소식은 금방 전파를 타고서 수많은 시민들의 귀에 들어갔다.
그동안 이지스의 구역 내에서 이미 적용이 되고 있던 규정이었기에, 비각성자인 일반 시민들의 입장에선 당연히 반기지 않을 수 없었다.
꾸준히 시행해 온 방식답게 민심 잡기용으로 잠깐 하고 말 쇼가 아닌 걸 알았다.
물론 이지스 길드는 거기에 더해 기존에 활동하던 산하 길드와 지역 길드들의 장악까지 순식간에 끝마쳐 버렸다.
아직 세부 조율 사항이 잔뜩 남아 있긴 해도 그들이 불만을 가지거나 흔들릴 틈조차 주지 않은 것이다.
서울을 차지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이었으나, 내부적으로 흔들릴 요소는 발빠르게 봉합해 버린 이지스의 행보.
그런 그들의 움직임을 아주 불쾌하게 여기는 세력이 서울 지역 내에도 하나 존재했다.
“이런 젠장!”
콰아앙!
성난 남자의 주먹에 책상이 완전히 부서지며 반으로 쪼개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희번득한 눈빛을 돌리고 있는 남자.
그는 정부의 재난관리국 국장 ‘엄태오’였고, 정부 소속의 모든 헌터들을 이끄는 수장이기도 했다.
S급의 헌터답게 무서운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그의 모습에, 앞에 선 두 헌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서 있었다.
“새파랗게 어린 자식이 감히 누구더러…….”
엄태오가 이를 빠득 갈며 중얼거렸다.
성현이 내뱉은 당돌한 말들이 이지스 길드에서 빈손으로 돌아온 헌터들에게서 전해졌다.
물론 그가 보인 건 말뿐이 아니었다.
서울을 집어삼키자마자 보인 그들의 행보들은 이지스가 새로 얻은 구역들을 순식간에 장악해 나가게 해주었고.
이 틈을 이용해 자신들이 권력을 잡으려던 엄태오와 정부 측 헌터들에겐 아주 좋지 못한 소식이었다.
각성자 우위의 사회는 공직에 있어서도 다를 건 없었다.
어차피 한인호에게 얻어맞고서 허수아비 상태가 된 지 오래인 정부 기관들은 재난관리국의 힘과 영향력 아래에 뜻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를 이용해 적당히 정부와 법을 내세우며 이지스 길드에게 하나둘 제약을 걸고서 옭아맬 작정이었는데 계획이 완전히 빗나가 버렸다.
“이대로 가면 또 저 건방진 길드 놈들의 영향력 아래에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어떻게 찾아온 기회인데 그럴 수야 없지.”
엄태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각 구역들을 차지한 거대 길드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그 자리를 자신들이 차지해야만 했다.
헌데 청성과 화신 길드가 지니고 있던 모든 구역을 먹어치우고, 세력 마저도 차근차근 흡수하고 있는 이지스 길드였다.
그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대해지기 전에 먼저 손을 써야만 했다.
“말이 안 통하니 힘을 보여 주는 수밖에.”
“그렇다면… 직접 이지스 길드를 제거하실 생각이십니까?”“그래.”
“하지만 무려 청성과 화신 길드를 무너뜨린 녀석들입니다. 보통 강하다는 게 아니라는 소리인데 저희가 손을 쓸 수 있을지…….”
기존의 양대 길드에게도 견제를 당하며 꼼짝없이 억눌려 살던 재난관리국의 헌터들이었다.
한데 그 두 길드를 모두 쓰러뜨린 자와 대적한다는 것이었으니, 우려의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멍청한 자식, 오히려 그렇기에 가능성이 있는 거다. 그 두 길드를 상대로 총력전을 벌였으니 아무리 강하다 해도 피해가 극심할 수밖에 없어. 전력이 약해져 있는 지금이 아니라면 기회는 없다.”
타악!
엄태오는 뒤편에 걸려 있던 자신의 검을 집어 들었다.
물론 세력 단위로 맞붙는 건 여전히 그들에게 부담스러운 일이긴 했다.
하지만 그에겐 생각해 둔 방법들이 있었다.
“본부장들을 모두 소집시켜라. 이 자리를 요행으로 차지한 게 아니라는 걸 보여 주지.”
* * *
우우우웅!
대형 던전이 발생한 서울 시내의 대로변.
도로 아래 뚫린 커다란 구멍 사이로 음침한 기운이 새어 나왔다.
하필이면 출근 시간 대에 발견이 되어 교통 체증이 심각해질 터라, 빠른 처리를 위해서 지역 길드의 헌터들이 파견되었다.
하지만 이곳에 나타난 것은 등급이 무려 A랭크에 중대형이라는 큰 규모의 던전이었고, 해당 구역을 맡고 있는 지역 길드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대의 던전이었다.
때문에 해당 길드가 직접 맡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서울의 새로운 주인인 이지스 길드에게로 곧장 연락이 갔다.
한데 연락을 받고서 나타난 이지스의 헌터는 모두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다.
“던전의 입구는 이쪽입니까?”
“아… 네! 대표님! 맞습니다!”
바짝 긴장한 남자가 서둘러 말을 내뱉었다.
그 역시 소속 길드원 수백여 명의 건실한 중견 길드를 이끌고 있는 길드장이었지만, 지금 그의 앞에 나타난 이는 자신과의 비교조차 실례일 거물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A랭크 던전에 이건 무슨…….’
이리저리 흔들리는 남자의 시선이 성현에게 향했다.
무려 한인호를 쓰러뜨리고서 서울 전역을 차지한 거대 길드의 수장.
거기다 그의 바로 옆엔 마찬가지로 S랭크의 헌터인 이즈나까지 함께 서 있었다.
어지간한 S랭크 던전에도 보이지 않을 호화스러운 라인업이다.
이들의 등장에 통제된 거리의 바깥에서 시민들까지 한가득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정말 영왕이 왔다니까!”
“저, 정말이잖아……? S랭크 던전이 나타났단 소리는 못 들었는데.”
“가면 벗은 모습은 처음 봐.”
구경하고 있는 시민들이 제각기 성현을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일반인은 접근도 못할 위험한 현장을 주로 드나드는 만큼, S랭크 헌터를 직접 보는 것은 톱스타를 보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경험이었기에, 많은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최근 줄곧 화제의 중심에 서있던 성현이었으니 더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어딜 가도 따라온다는 게 생각보다 조금 더 귀찮긴 하지만… 그래도 언제까지고 가면을 쓰고 다닐 순 없으니까.’
주변을 슬쩍 둘러본 성현은 이마를 긁적였다.
연락이 한참동안 끊겼던 사람들에게도 갑자기 전화가 쏟아지질 않나, 동네에 장보러 가는 것도 시선이 끌렸다.
허나 그래도 이들의 시선이 마냥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이렇게 바깥을 돌며 활동하고 있는 게 세간에 알려지는 것도 그의 계획 중 일부였으니까.
“저기, 대표님께선 여긴 어쩐 일로 찾아 오셨습니까? 이런 A급 던전까지 일일이 직접 나서실 필요는 없으실 텐데…….”
“그래야 녀석들이 저를 편하게 노리러 올 테니까요.”
“예……? 그게 무슨……?”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피식 웃은 성현은 홀로 던전의 입구로 들어섰다.
터엉!
어두침침한 던전 안으로 진입한 성현은 주변에서 하나둘 느껴지는 기척들을 읽었다.
그리곤 가볍게 쥐고 있던 검집에서 손을 떼어냈다.
“뭐… 굳이 내가 나설 필요는 없겠네.”
츠츠츠츠츳!
사방으로 뻗어지기 시작한 성현의 그림자.
던전 안에 있는 모든 몬스터들을 아득히 넘어서는 수많은 기척들이 그림자 속에서 하나둘 눈을 떴다.
“크르르륵!”
정부 측 헌터들은 성현이 저번 싸움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크나큰 오해일 뿐.
성현에겐 지하 던전의 점거한 필드들에게서 리젠으로 꾸준히 늘어나는 몬스터들이 있었다.
거기다 철갑 거미 여왕인 니아드라나 몇몇 종 같은 경우엔 자체적으로 번식하거나 알을 낳아가며 그 수를 계속 증식시켜나갔다.
키메라나 골렘 생산으로 인한 부수적인 추가 합류까지 더해, 늘어나는 군단의 수는 한두 번의 싸움이 난 것 정도로 억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청성과의 싸움으로 인해 소모되었던 병력보다 더 많은 수의 군단이 충원된 뒤였다.
“얌전히 있으라고 경고는 했다만… 겨우 그 정도로 가만히 있어 줄 정부 녀석들이 아니지. 기왕이면 빨리 찾아와 줬으면 하는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