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종지부 (2)
타악!
가면을 벗은 성현이 한인호의 앞에 섰고.
경악한 한인호의 표정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변했다.
“네… 네놈은 그때 그……!”
“날 기억하고 있다니 의외인데.”
한인호는 성현의 얼굴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찾아가 내쳤던 길드의 직원이자, 별 볼 일 없던 일반인.
가차 없이 버렸던 길드의 부품이었기에 기억에서 지워 뒀지만, 얼굴을 마주한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영왕이라는 이명과 함께 길드의 치명적인 적이 되어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알 수 없었다.
지금쯤 빚더미 속에 파묻혀서 허덕여야 할 녀석이었지만,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네놈이 왜… 아니, 그렇다면…….”
한인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며 뒤바뀌었다.
도저히 그의 머릿속에선 이해 가지 않는 일이었다.
각성조차 하지 않은 일반인이 불과 몇 달도 되지 않아 S급을 넘어 자신을 능가했다니.
그나마 각성 사실에 대해선 압류팀 팀장인 오재완이 알고 있었지만 딱히 길드장에게 보고 될 만한 사안은 당연히 아니었기에, 이후 성현이 하급 헌터로서 각성했다는 사실조차 듣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내가 재능이 좀 있었거든. 성장이 빨랐지.”
“그걸 지금 나더러 믿으라는 거냐!”
“믿든지 말든지.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
쿠우우웅!
그들의 바로 왼편, 갑작스레 나타난 서리트롤 군주 ‘그롬’이 성큼성큼 벽을 타고선 건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반대편에선 미끄러지듯 나타난 벤시 여왕 메이트리아가 있었고.
사방의 거리에서 군단의 군주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군주들이 이곳에 나타나고 있는 이유라면 간단했다.
그들을 붙잡고 있던 청성의 S급 전력, 최고 간부들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당해 버렸다는 것.
군주 하나가 나타날 때마다 최고 간부 하나가 쓰러졌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주군.”
“그쪽도 끝났나 보네. 수고했어.”
심지어 이즈나와 카론까지 어느새 성현의 곁으로 다가와 섰다.
이는 언데드로서는 완전한 상성인 빛의 힘을 다루는 성녀 ‘유은하’를 그들이 처치하고서 돌아왔다는 것이다.
한인호로서는 믿을 마지막 카드마저 불타 사라졌다는 뜻이었다.
정말 아무런 지원조차 없이 혼자만의 능력으로 거대 길드인 청성을 완전히 깨부순 성현의 힘이었다.
“얼굴도 감추고 다닌 데다가 사사건건 방해를 하기에 좋지 못한 관계에 있던 녀석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길드에서 쫓겨난 복수를 하겠다고 이 일들을 꾸민 거였군.”
“그냥 쫓아내기만 했으면 여기까지는 안 왔겠지.”
“네놈의 길드에서 벌이고 있던 특이한 행동들도 이제야 이해가 갈 것 같군. 늦깎이 헌터라 비각성자 따위에게 감정 이입이라도 했다 이거냐?”
조소를 머금은 한인호가 말했다.
거대 헌터 길드인 이지스에서 자발적으로 헌터의 특권을 일부 내려놓으려 들던 이유에 대해선 알 수 없었지만 이젠 알게 되었다.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는 성현의 모습에 한인호는 이를 빠득 갈았다.
“네가 선심 쓰듯 아량을 베풀어 봐야 그놈들은 정신 못 차리고 더 많은 걸 요구하려 들 거다. 오히려 네놈에게 목줄을 채우려 들겠지. 놈들은 언제나 그래 왔으니까. 내가 앞장서 이런 세상을 만들지 않았다면 지금 같은 대우는커녕 헌터들은 놈들 아래에서 죽을 때까지 굴러다니기나 했을 거다.”
던전이 처음으로 발생한 이후, 전 세계에서 벌어진 대재난에서 한인호를 비롯한 수많은 국내의 헌터들은 생존을 위해 몬스터들과 싸웠다.
오랜 경험을 쌓아 A급들은 물론 S급 헌터까지 다수 포진해 있는 지금이라면 모를까.
당시 이제 막 각성한 헌터들이 쏟아지는 던전을 막는 데엔 당연히 엄청난 피해가 생겼고, 죽는 이들도 끊임없이 나왔다.
한인호도 주변의 그런 희생을 직접 목격해 가며 겨우 살아남았다.
그리고 헌터들이 성장을 거듭해 던전에 대한 통제가 어느 정도 가능해지려 할 무렵.
처음에야 모두가 그들을 ‘영웅’으로 치켜세웠지만, 어느 정도 안전이 보장되기 시작하자 다른 목소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부는 강력한 헌터의 힘을 두려워해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법과 규제를 내세웠고, 대다수가 일반인인 시민들도 그러한 정책에 힘을 실어 주었다.
헌터의 숫자 자체는 비각성자들에 비해 턱없이 모자랐기에 정상적인 절차로는 이러한 일들을 막을 수 없었다.
물론 이런 힘을 지니게 된 헌터들이 그런 규제 밑으로 기꺼이 들어갈 리는 없었다.
정작 쏟아지는 몬스터에게서 사람들을 지키고, 죽어라고 던전을 막아 봐야 등 뒤에선 견제나 하고 있던 저들의 모습에 완전히 뒤를 돌아 섰고.
유능한 헌터들을 모아 길드를 결성했던 당시의 한인호나 최성준이 앞장서 그들을 갈아치우며 지금과 같은 사회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당장이야 세상을 얻은 것만 같겠지. 하지만 나라 밖에서 몰려들 헌터들, 그리고 안에서도 등 뒤를 노릴 쓰레기들까지 한가득인데 네놈 혼자 감당할 수 있겠나?”
“…아까부터 말이 많네.”
“뭐라고?”
“충고는 고맙다만 그거야 내가 알아서 할 문제지. 네가 신경 쓸 건 아니야. 어차피 넌 여기서 죽을 테니까.”
“이, 이런 건방진 새끼가! 웃기지 마라!”
얼굴이 새빨개진 한인호가 버럭 소리쳤다.
끝이 다가오자 말이 길어진 그의 꼴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한 성현의 태도에 한인호는 격분해 검을 움켜쥐었다.
양다리에 꽂혀 있던 사슬을 잘라낸 그는 땅을 거칠게 박차고선 성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온몸의 상처들과 이미 바닥난 체력.
십여 년이 넘게 쌓아온 모든 세력 기반을 잃었고, 몸을 빼낼 수 있을 만한 퇴로조차 막혔다.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마지막 발악을 하는 그의 모습이었지만, 물론 무의미한 짓일 뿐이었다.
콰드드득!
“커억……!”
한인호의 복부를 길게 꿰뚫은 메이트리아의 낫.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날아든 데스나이트들의 대검이 한인호의 온몸을 꿰뚫며 한가득 꽂혔다.
한인호는 온몸이 관통당한 채 피를 쏟아내었고.
아무리 헌터라 한들 즉사하는 게 정상인 수준의 상처였지만, 국내 최고의 헌터라 불리던 남자답게 피를 토해내며 두 눈을 뜨고 있었다.
쿠웅!
물론 그래 봐야 목숨이 얼마 남지도 않은 상태에서 꼼짝도 할 수 없이 무릎을 꿇고 있는 것뿐.
성현은 그런 그의 앞으로 저벅저벅 다가섰다.
“끄으으으…….”
온몸을 비틀며 다시 검을 쥐려 드는 한인호.
청성의 헌터였던 것도 아닌, 그들의 발닦개 노릇이나 하던 일반 직원 출신 따위에게 죽어 줄 순 없었다.
그리고 그런 한인호의 모습을 성현은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너와의 일에선 거창한 이유 같은 건 필요 없어. 어차피 난 내 복수를 하려는 것뿐이고, 잘못한 게 있으면 돌려받아야지.”
서걱!
성현은 가볍게 들어 올린 검을 휘둘렀다.
* * *
길드장 한인호의 죽음을 끝으로 청성 길드와의 대대적인 싸움은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모든 최고 간부가 사망하고, 길드장까지 당하고 나자 청성의 남은 간부진이나 헌터들로선 저항할 수 있는 구심점을 잃었다.
전장에 있던 모두가 무기를 버리고 그들에게 투항했고, 아직 싸우지도 못했던 다른 지부들 역시 순순히 저항을 포기했다.
청성 길드가 완전히 공중분해된 마당에 그 아래에 있던 산하 길드들은 말할 것도 없이 앞다투어 이지스 길드의 밑으로 들어왔다.
수도권에서 각 길드 간에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만 알 뿐, 제대로 상황 파악이 되진 않았는지 아직 언론사에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진 않았다.
하지만 이지스 길드는 빠르게 서울 지역을 통째로 흡수하며 손에 넣는 중이었고, 곧 전국이 시끌벅적해질 것이었다.
국내 최대의 양대 길드가 동시에 무너져 내렸고, 그 자리를 결성된 지 몇 달도 안 된 길드가 차지할 테니까.
‘정말 끝났군.’
한편, 성현은 싸움의 흔적들이 수습되어 가고 있는 과정을 빌딩 위에 홀로 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억울한 누명과 함께 거대한 빚더미에 내몰려 낭떠러지 끝에 섰던 것이 불과 몇 달 전이었는데, 한인호에 대한 복수까지 끝내고 나자 묘한 감상에 빠지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정말 너 혼자 한인호를 처리했을 줄이야. 괴물이 따로 없다니까.”
백룡의 길드장, 진서연.
그리고 그 옆엔 태산의 길드장인 김진욱까지 함께 있었다.
“네가 영왕인가? 얼굴은 처음 보는군.”
“자, 잠깐. 뭐야 이젠 정체를 숨기지 않겠다는 거야?”
뒤를 돌아본 성현의 모습에 놀란 진서연이 멈칫하며 물었다.
가면을 쓰지 않은 성현의 모습 때문이었다.
물론 누가 강제로 벗긴 것도 아니고 쓰지 않고 있던 건 성현의 결정이었지만, 서스럼없는 그의 모습에 되레 놀란 것이었다.
“애초에 한인호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으니까. 청성을 무너뜨린 마당에 숨길 이유야 없지. 어찌 됐건 화신 길드 쪽도 잘 마무리된 모양이네.”
“그야 둘이서 동시에 달려들었는데 당연하지. 거기다 강북 지역은 우리가 손쓸 것도 없이 네가 이미 초토화시켰으니…….”
이곳에 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진서연과 김진욱은 화신의 최성준을 쓰러뜨리는 데에 성공했다.
아무리 화신 길드라 해도 백룡과 태산 두 거대 길드를 동시에 상대하기엔 무리였다.
심지어 그뿐만이 아니라 성현은 주요 전력이 자리를 비운 사이, 미리 군단을 움직여 화신 길드의 본사와 모든 지부를 습격해 강북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강북 지역도 이미 성현의 손에 떨어졌다는 것.
덕분에 싸움에서 달아난 패잔병 무리들은 저항을 할 기반조차 잃어버렸고, 한 번의 큰 승리만으로 싸움이 순식간에 끝이 나게 된 것이다.
“싸움은 완전히 끝이 났고. 그럼 이제 남은 건 전리품에 대한 협상뿐인가?”
성현이 슬쩍 말을 꺼냈다.
청성과 화신, 서울 지역을 차지하고 있더 두 거인을 쓰러뜨린 만큼 전리품 역시 굉장했다.
다른 세부적인 사안들이야 각 길드의 실무진들이 알아서 조율을 하겠지만, 길드장이 모일 만큼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바로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구역에 대한 문제였다.
“영역 배분 문제에 대해선 이미 이야기가 됐을 텐데. 기존에 묶여 있던 분쟁 지역들은 모두 넘겨받는 대신 서울은 넘기기로.”
“뭐… 백룡과 나눈 이야기지, 태산 길드까지 거기에 동의했던 건 아니니까.”
성현의 시선이 김진욱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김진욱은 간단히 답했다.
“이야기라면 나도 듣고 왔다. 빚을 진 입장에 더 내놓으라고 할 순 없는 노릇이지. 당장은 이 정도만으로 만족하겠어.”
이번 싸움에서 성현과 이지스 길드의 역할이 굉장히 컸다는 것은 그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홀로 청성 길드를 무너뜨리고, 대규모 군단을 움직여 외국 용병 길드를 쓸어버린 데다가 역으로 화신 길드의 후방까지 초토화시켰다.
진서연과 김진욱 모두 성현의 개입과 계획 덕에 목숨을 건지기도 하였고.
무엇보다 국내에서 가장 강력했던 양대 길드가 통째로 무너져 내린 만큼, 전력이 약해졌다 판단한 외국의 헌터들이 국내로 쏟아질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 영역을 욕심내다가 당장 자신들끼리 싸움박질해 봐야 자멸하는 꼴밖에 안 된다는 것은 이곳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애초에 해외 길드를 끌어들이는 청성과 화신 길드의 행동에 반발해서 임시로 마련된 동맹 관계였으니 말이다.
물론 9대 길드를 이끌고 있는 이 야심가들과 언제까지 손을 잡을 수 있을 지는 몰라도, 당장은 충돌할 때가 아닌 건 확실했다.
‘말이 통하니 다행이야. 그럼 슬슬 움직여 줘야겠군.’
슬쩍 시계를 확인한 성현이 생각했다.
이대로 모든 게 끝난 것이었으면 좋겠지만, 아직 그에겐 곧장 처리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