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독사 (3)
콰아아앙!
자욱한 흙먼지 사이에서 물러선 한인호.
시야를 온통 가린 모습이었지만, 감각으로 꿰뚫어 본 그는 주변에 선 존재들을 볼 수 있었다.
‘이지스의 헌터들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군.’
한인호를 향해 가장 먼저 달려든 것은 웨어울프 일족이었다.
평범한 인간이라기엔 변형된 늑대인간의 모습.
전 세계로 따져도 극소수에 불과한 변신계 능력자들이 한 길드에 이렇게 많이 모여 있을 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몬스터 특유의 막무가내식 전투 방식도 아니었다.
후웅!
웨어울프 전사의 날카로운 손톱이 정면에서 날아들었다.
물론 한인호는 그를 가볍게 피해냈지만, 곧바로 후속 공격이 물 흐르듯 들어왔다.
단순히 검을 든 몬스터와는 다르게, 인간이 체계화된 검술을 사용하듯.
웨어울프 일족도 그들만의 제대로 된 무투술을 지니고 있었다.
늑대인간의 강인한 육체로 구사하는 무투술은 굉장히 위협적이었고, 웨어울프를 포함한 마족들은 군단 내의 정예급 전력이자 하나하나가 청성 측 간부급 수준의 상당한 전력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인호의 앞에서 통할 전력은 아니었다.
콰드득!
“크아아아!”
한인호는 바로 뒤편에서 달려드는 커다란 늑대인간 하나를 베어 갈랐다.
사각을 노려보려 했던 것이지만, 한인호의 감각 앞에선 어림도 없는 수였다.
가슴팍을 깊게 파인 채 바닥을 나뒹군 웨어울프 전사.
물론 웨어울프들은 어지간한 상처는 가볍게 회복할 수 있는 특유의 강력한 재생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크륵…….”
하지만 바닥을 나뒹군 웨어울프 전사는 꿈틀거리기만 할 뿐, 다시 일어서진 못했다.
한인호의 검에 깃들어 있던 독에 중독된 것이다.
강인한 육체를 지닌 데다 독 내성을 최대한 끌어올렸음에도, 직접적인 공격은 단 한 번 허용하는 것조차 치명적이었다.
“인간의 모습을 한 몬스터라……. 신선하긴 하다만 이런 식으로 해봐야 끝을 내지 못할 텐데.”
“과연 그럴까!”
후우웅!
그의 바로 뒤편에서 성현이 나타났다.
순간이지만 한인호조차 눈치채지 못했을 만큼 빠른 움직임이었다.
다급히 몸을 빼낸 한인호는 그의 검격에 겨우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지만, 차이를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움직임이 갑자기 빨라졌다.’
[군주, 카론의 그림자를 흡수하였습니다!]
[‘민첩성’ 특성이 활성화됩니다!]
특성의 힘을 발휘한 성현의 움직임은 방금보다 훨씬 빨라졌다.
독 내성을 조금 더 끌어올리는 데 특성을 투자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해서는 한인호를 몰아넣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저래 봬도 국내 최고라 불리는 헌터였으니까.
콰아아앙!
그때, 바로 옆에서 날아든 주먹에 땅이 움푹 파이며 주저앉았다.
뒤를 노린 웨어울프 로드, 로칸의 기습이었다.
“크아아아!”
흉포한 본 모습을 드러낸 로칸은 연달아 한인호를 향해 날카로운 손톱을 휘둘렀고, 벽과 도로가 무 썰리듯 동강났다.
강인한 힘과 속도를 두루 갖춘 로칸의 맹공.
거기에 더해 철갑 거미 여왕 ‘니아드라’와 데스 나이트를 이끄는 ‘칼라일’까지 나서서 거들었다.
무려 세 명의 군주가 한꺼번에 달려드는 것이었고, 주위의 성현과 그의 정예급 소환수들까지 쉴 틈을 주지 않고서 몰아붙였다.
아무리 한인호라 해도 쉽지 않은 상대였다.
촤아아악!
뒤로 주르륵 밀려난 한인호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간부를 비롯해 청성의 다른 헌터들은 모두 군단에 의해 발목을 잡혔고, 결코 좋지 않아 보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인호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발버둥 치는 꼴이 재미있군. 뭘 믿고 혼자 와서 설쳐대나 했더니.”
“도망치느라 바쁜 녀석이 허세 부리기는.”
“그건 내가 할 소리인데. 여유 있어 보이는 척 하고는 있지만… 슬슬 무리 아닌가?”
“뭐?”
성현을 바라보던 한인호의 입가가 씩 올라갔다.
그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전력에 비해,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성현을 노리고서 반격을 하려 들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네크로맨서를 상대할 때 장기전으로 가면 불리한 쪽은 당연히 그를 상대하는 쪽이다.
빠르게 싸움을 끝낼 생각이었다면 느긋하게 소환수들이나 베고 있기보다는 네크로맨서인 성현부터 공격해오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가 굳이 먼저 성현을 향해 달려들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큭……?”
순간 성현의 몸이 휘청였다.
후들거리는 다리는 제대로 몸을 지탱하지 못했고,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성현의 피부는 어느새 거뭇거뭇하게 변해 있었다.
“주군……!”
“독에 대한 저항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한들, 면역이 아닌 이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설마 그것도 모르고서 내 앞에 선 건 아니겠지.”
워낙 지독한 한인호의 독기는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이었다.
만독불침 같은 최상위 특성이 없는 이상, 한인호의 독을 완전히 무력화시키기란 불가능했다.
그나마 도핑 포션의 중첩을 통해 독에 대한 저항력을 최대한 끌어올린 것이었는데도 이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이는 다른 군단의 수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털썩!
독기에 중독된 수하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성현과 마찬가지로 독에 대한 내성을 얻었다 해도 그 한계가 보다 빠르게 찾아온 것이었다.
아무리 수가 많아 봐야 같은 범위 안에 있는 이상, 몇 명이든 동시에 당하게 되는 건 똑같았다.
그나마 로칸이나 니아드라와 같은 군주들은 기본적으로 지닌 막대한 체력 덕에 버틸 수 있었지만, 일반 수하들로선 더 이상 버티기란 무리였다.
“날 상대하고 싶었다면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우든가, 백룡의 진서연이라도 데려왔어야지.”
“큭… 벌써 이렇게 될 줄은…….”
성현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무릎을 짚었다.
“외부에 알려져 있는 독의 효과는 절반도 안 되는 수준에 불과하지. 직접 베이지만 않는다면 버틸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자체가 안일하기 짝이 없는 거다. 국내를 차지하고 나서, 바깥에서 몰려들 놈들을 상대하려 할 때나 꺼내려 했던 수지만……. 네놈과 함께 주변의 목격자들까지 다 제거하면 되겠지.”
한인호가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오랜 활동을 해온 한인호였음에도, 아주 소수를 제외하고선 그동안 감춰왔던 독의 진정한 위력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싸움을 끝내려 들었어야 했던 건 오히려 성현이었을 뿐.
처음에 느꼈던 것보다도 훨씬 지독한 독기가 알게 모르게 성현의 몸을 갉아먹고 있었다.
“라고 할 줄 알았어?”
“…뭐라고?”
“미안하지만, 네 능력에 대해서라면 다 듣고 왔거든.”
터억!
비틀거린 성현은 다시 무릎을 딛고 일어섰다.
성찬일이 청성에게서 완전히 돌아선 이상 한인호의 힘에 대한 비밀도 지켜 줄 리가 없었다.
그런 마당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여길 홀로 찾아왔을 리는 없었다.
물론 비약의 저항력으로는 부족한 게 사실이라 독으로 속이 진탕된 것이 느껴지긴 했지만, 성현은 재빨리 손을 휘저었다.
파앗!
성현은 인벤토리에서 꺼낸 해독제를 집어 들었고, 병 안의 포션을 곧장 입으로 털어 넣었다.
한인호와의 일전을 앞두고서 신경 써 만든 해독제다.
엄청난 재료와 마력까지 쏟아부은 최상품답게 즉시 성현의 몸에 퍼지던 중독의 효과들이 사라지고 회복되었다.
“후우, 이제 좀 살 것 같네.”
정신을 차린 성현이 멀쩡해진 몸으로 털고 일어났다.
강력한 제독뿐만이 아니라 회복 효과까지 부여되어 있었고, 이런 게 아직 열댓 개나 더 있었다.
또다시 독기가 쌓일 걸 생각해도, 싸움에 주어질 시간은 얼마든지 충분하다는 말이다.
“…또 포션이냐?”
“어디 계속 싸워 보자고.”
“그래 봐야 헛수고다. 주변이 보이지 않나 보지?”
인상을 팍 찌푸린 한인호가 말했다.
설마 자신의 독이 해독제 따위에게 치유될 줄은 생각도 못 했지만, 그렇다고 변하는 건 없었다.
성현의 주위로 수많은 소환수가 쓰러져 가는 모습.
확실히 수천 가까이 되는 이 모든 수하들에게까지 먹일 해독제는 없었다.
“다들 물러나.”
성현이 주위의 수하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의 명령에 군단은 드넓은 독기의 범위 밖으로 일제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금방 비워진 자리.
성현과 그의 뒤에 선 군주들 넷을 제외하고선 아무도 없게 되었다.
“겨우 그 녀석들만으로 나와 싸우겠다는 거냐? 네크로맨서라는 녀석이 고작?”
“아니, 바톤터치일 뿐이야.”
콰드드드득!
“키이이익!”
성현이 말이 마치기 무섭게, 바로 발밑에서 땅굴을 파고 나온 자이언트 앤트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길게 뻗어진 성현의 그림자 속,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은 채 남아 있는 군단은 아주 많았다.
* * *
“키이이익!”
끊임없이 사방에서 몰려드는 몬스터들.
한인호는 그들을 차례차례 베어 갈랐다.
분명 한인호는 던전의 몬스터든 헌터든 간에, 다수를 상대함에 있어서도 매우 강한 편이었다.
아무리 숫자로 밀어붙여 봐야 보통 S급의 맹독 특성을 통해 금방 해결할 수 있었다.
어지간히 강한 적이 아닌 이상, 일일이 검을 휘두르지 않아도 독기에 중독되어 녹아내리기 마련이었으니 말이다.
하나 반대로, 한인호에겐 독기를 제외하고선 그 어떠한 범위형 공격 수단도 없었다.
사방을 둘러싼 군단의 무리가 단체로 중독되려 하면, 또 다른 군단이 쏟아지며 바뀌었고.
아무리 베고 베어도 숫자가 줄어들지 않았다.
‘이건 말도 안 돼. 이미 도시에 풀어뒀던 소환수들만 거의 수만에 가까운 규모였는데… 대체 얼마나 더 남아 있다는 거지?’
다른 종을 제외하고서 당장 눈앞에 쏟아지고 있는 자이언트 앤트만 해도 벌써 엄청난 숫자를 베어냈다.
현재 청성의 헌터들을 모조리 묶어 두고 있는 군단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믿기지 않을 규모.
한 명의 네크로맨서가 최소 십만 단위 이상의 군단을 지니고 있다는 소리였다.
거기다 문제는 놈들의 숫자뿐만이 아니었다.
츠츠츠츠츳!
“젠장!”
한인호의 몸에서 희뿌옇게 빛나는 저주의 표식.
리치들의 군주이자, 저주술사 ‘네이아’가 오랜 캐스팅 끝에 한인호에게 새겨 넣은 강력한 디버프였다.
그렇지 않아도 수적 열세인 상황에, 약화 마법으로 인해 전반적인 움직임에 큰 지장이 생겼다.
“죽여 주마!”
콰아아앙!
“후, 제법 위험했어. 이제 와서 네크로맨서라고 본체를 먼저 잡을 생각이 마구 드나 보네.”
한인호의 공격을 피해 뒤로 훌쩍 빠진 성현이 한숨을 돌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싸움을 빨리 끝낼 필요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던 한인호였지만, 지금은 그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다.
“입 다물어라!”
한인호는 정면에서 들이닥치는 서리 트롤 한 마리를 반토막 내었다.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군주들의 방해와 양옆에서 불꽃이 날아들었지만, 가뿐히 따돌리고 피해내었다.
네이아의 강력한 디버프까지 걸린 상태에서 한인호는 놀라울 정도로 매우 잘 싸우는 중이었다.
이는 한인호의 S급 특성, 절대감각 때문이었다.
특성을 통해 극도로 활성화된 그의 감각은 말 그대로 주위에 벌어지는 모든 것을 읽어버렸다.
그 덕에 온 사방에서 날아드는 공격과 압박을 모조리 피하고, 놀라울 정도로 빠른 반사신경을 통해 매서운 반격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S급 특성 아니랄까 봐 효과 하나는 굉장히 뛰어났다.
하지만 성현은 그 놀라운 모습 앞에서도 절대 서두르지 않았다.
“역시 들었던 대로 굉장하긴 하네. 하지만 그 특성을 유지하려면 체력을 굉장히 깎아먹을 텐데. 벌써부터 그래서야 감당할 수 있겠어?”
성현의 입가가 씩 올라갔다.
그는 저 ‘절대감각’을 유지하는 데에 얼마나 많은 체력이 소모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특성의 효과가 워낙 뛰어난 만큼 동반되는 비용도 커지는 것이다.
“이 새끼가 감히… 누구 앞에서……!”
“아직 많이 남았으니 걱정하지 마. 어디 네가 지쳐 떨어져 나갈 때까지 해보자고.”
이제 시간은 늘 그래왔듯, 네크로맨서의 편이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