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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 아래 경험치 800 지하던전-115화 (115/202)

115화 독사

촤르륵!

커다란 서류 더미 속에 쌓여있는 한승희.

책상 앞에 앉은 그녀는 고개를 푹 떨궜다.

“지친다. 지쳐.”

한승희는 아예 쌓인 서류들까지 옆으로 치우며 고개를 파묻었다.

사실 무려 S급의 헌터인 그녀의 체력상 몸이 먼저 지칠 일 따위는 없었다.

아무리 굴려진다 해도 몸뚱이의 튼튼하고 회복력도 뛰어나다보니 과로사로 죽는 것보다야 늙어죽는 게 먼저일 정도였다.

하지만 골치 아픈 업무에 계속해서 시달리다보면 정신력이 고갈되기 마련이었다.

‘믿고 맡기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뭐…….’

한승희가 짧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백명, 오성, 비류 등 이지스 산하에 있는 대부분의 길드 관리를 모조리 그녀에게 맡긴데다가, 이지스의 모든 지부에 더해 본 길드의 업무까지도 해결해야 했다.

심지어 거대 길드가 그렇듯, 직접적으로 속한 건 아니더라도 구역 내에서 활동하는 지역 길드들의 문제까지 있었다.

그런 수많은 단체와 인원이 본 길드의 승인이 필요한 온갖 업무를 성현이 아니라 모두 한 사람이 맡게 되었으니, 당연히 정상적인 업무량이 쏟아질 리가 없는 것이다.

이는 이지스 길드의 덩치가 불어나면 불어날수록 심해졌다.

“이성현 그 자식… 이번엔 정말 쓸 만한 인력을 하나 구해온다더니 믿어도 되는 거겠지?”

또 다시 길드를 비우고 어디론가 향한 성현이 제대로 약속하고 떠났던 걸 떠올린 한승희가 중얼거렸다.

물론 성현이 정말 자신의 업무를 덜어줄 사람을 데려온다는 걸 처음에야 믿지 않으려 했던 그녀였다.

그도 그럴게 지금 한승희가 처리하고 있는 업무들은 아무나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지스 길드 내의 수많은 헌터들은 인간이 아닌 마족들이었다.

당연히 그들의 존재를 감안하고서 지휘를 하고,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자연히 성현과 엮인 비밀에 대해 알아야 했다.

한 마디로 확실히 믿을 수 있을 자가 아니면 업무를 맡기는 게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당장 한승희가 이끌던 백명 길드 안에도 수많은 실무진들이 있지만 데려와 업무를 거들도록 시키지 못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길드 간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 속에서 능력도 있고, 비밀 누설의 걱정도 없는 그런 인재를 밖에서 냉큼 구해오기란 어려울 것은 당연한 일.

한승희도 그걸 알고서 크게 기대를 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자길 믿어보라며 호언장담을 하고 갔었잖아… 완전히 거짓말은 한 걸 아닐 테고.’

“한승희.”

“뭣? 까… 깜짝이야……!”

불쑥 나타난 기척에 한승희가 허리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잠시나마 기척조차 전혀 느끼지 못했던 그녀였기에 반사적으로 반응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방문 안으로 들어선 이는 청성이 보낸 암살자가 아닌 성찬일이었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평소엔 잘 보이지도 않더니.”

엉거주춤한 자세로 성찬일을 마주한 한승희가 말했다.

그라는 걸 알았음에도 다소 경계심을 가진 듯한 그녀의 태도였다.

‘솔직히 말해 아직도 믿기 어렵단 말이지… 저 녀석이 이지스에 숙이고서 들어오다니.’

한승희의 시선이 성찬일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녀는 아직도 성찬일이 자신들과 같은 편에 섰다는 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3성이라는 최고 수뇌부의 자리에 있던 그가 청성을 등지고서 이지스에 합류하다니, 솔직히 지금도 미심쩍은 감정이 있었다.

하지만 성찬일은 그런 그녀의 기색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 입을 열었다.

“길드장이 전해달라더군. 움직일 시간이라고.”

“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움직이다니?”

한승희가 인상을 슬쩍 찌푸리며 물었다.

성현에게서라면 사전에 전해들은 게 없었다.

하지만 성찬일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할 뿐이었다.

“오늘 밤, 청성과 결판을 지을 거다.”

* * *

덜컥!

유은하가 방문을 열어젖히고서 들어섰다.

그녀는 자리에 앉은 한인호와 마주하였다.

“천하 길드에서 연락이 왔다면서?”

“그래, 다시 국내로 헌터들을 파견할 거라 하더군. 몇 년 전부터 동남아 지역 곳곳을 들쑤시고 다니더니 그 쪽 문제가 마무리된 모양이야. 덕분에 한국에 인원을 크게 돌릴 여력이 된다고 하고… 덕분에 해외의 다른 거대 길드까지 당장 끌어들일 필요는 없겠어.”

한인호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여태껏 천하 길드가 다른 국가들에게도 마수를 뻗느라 집중하지 못했더라면, 이젠 어느 정도의 피해 정도는 쉽게 감수하고서 힘껏 밀어붙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곧 국내로 천하의 헌터들이 쏟아질 것이었고, 그 전력을 받아내는 건 고스란히 이지스와 백룡 길드의 몫이었다.

“용병들은 모두 도착했겠지?”

“그래, 여덟 길드 모두 빠짐없이 도착했어. 돈이야 엄청 깨졌지만, 뭐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유은하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청성은 천하 길드를 움직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고, 외국의 용병 길드들을 잔뜩 끌어들여 국내로 불러들인 참이었다.

그것도 보통의 용병 길드가 아닌, 어지간한 국내 대형 길드 이상의 유명 세력들을 잔뜩 끌어온 것이다.

9대 길드와 동급 수준의 거대 전력까지는 아니라 해도, 큰 돈 주고서 여럿을 끌어들여온 만큼 S급 헌터들이 여럿 있었다.

“놈들이 먼저 움직이려는 순간, 용병들이 움직여 뒤를 쳐줄 거야. 물론 그 녀석들만으로 뭐가 되지는 않겠지만, 어차피 천하 길드가 본격적으로 들이닥치기 전까지만 시간을 벌어주면 그만이니까.

용병들의 역할은 이지스나 백룡 길드가 먼저 움직이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는 것이었다.

상당한 돈을 들인 만큼 9대 길드라 해도 결코 무시하지 못할 전력이었고.

곧 쏟아질 천하 길드의 헌터들까지 고려한다면, 이번 싸움을 수렁에 빠뜨려 장기화시키는 데엔 충분하다.

“그래, 굳이 먼저 나서 싸워줄 필요는 없지. 놈들끼리 서로 전력을 깎아먹게끔 내버려두고서 이대로 지켜보고만 있으면 돼.”

끼익.

의자를 젖힌 한인호가 어두운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자신들의 박살난 본사 건물까지도 내려다보이는 높은 빌딩의 위.

내부 정보가 새어나간 탓에 원래의 계획이 몇 차례 헝클어지긴 했다만 그렇다고 한들 바뀔 건 없었다.

놈들이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해봐야 큰 그림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고, 그 끝은 정해져 있었다.

쿠우우우웅!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요란한 굉음이 저 멀리서부터 터져 나왔다.

꽤나 먼 거리에서부터 벌어진 일이라, 땅을 미세하게 울릴 진동이었지만 S급에 달하는 한인호와 유은하는 자신들의 빌딩 안에서도 그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뭐지?”

‘설마.’

인상을 찌푸린 한인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커다란 통창의 앞에 선 그는 먼 거리에서 전투의 여파로 파헤쳐진 구덩이들과 불빛을 볼 수 있었다.

어두운 밤을 밝히며 치솟아 오르는 불길.

빌딩 사이로 쏟아져 오고 있는 그림자의 군단이 있었다.

* * *

“그아아아아!”

츠츠츠츠츳!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들이 눈앞의 거리들을 가득 메웠다.

스켈레톤, 와이번, 오우거 등. 종을 구분하지 않고서 거대한 군단이 도시를 가로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세계구급의 거대 던전에서나 쏟아질 법한 몬스터 군단.

하지만 저 몬스터 군단은 겁에 질려 달아나는 시민들을 지나치고서, 청성 길드를 향해 전진해올 뿐이었다.

이미 오는 길에 마주친 청성 길드측 지부 몇 곳은 완전히 초토화되었고, 저들이 적대하는 게 누구인지는 뻔했다.

콰아아앙!

“크아아악!”

머리 위로 날아든 거대한 괴수의 팔에 헌터들이 휩쓸려나갔다.

청성측 헌터들은 거리를 틀어막고선 저들을 막아서려 해봤지만 속수무책으로 쓸려나갈 뿐.

이 쏟아지고 있는 거대한 군단은 몬스터의 수도, 질도 보통의 S급 던전들을 가뿐히 상회할 정도였다.

하지만 각 지부가 아닌 청성측 본대에서 헌터들이 대거 나타나자 이야기는 달라졌다.

콰아아앙!

뜨거운 불길의 파도가 쏟아지며 거리에 있던 스켈레톤 전사들이 휩쓸려나갔다.

비상 상황에 S급의 전력을 지닌 최고 간부들, 그리고 그 아래 간부진과 모든 인원이 소집되었고.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길드장, 한인호와 유은하까지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이지스가 우리 구역 내로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는데.”

“그… 그게… 죄송합니다. 저희도 아직 파악을…….”

한인호의 날카로운 눈빛에 일반 간부 하나가 진땀을 뻘뻘 흘리며 답했다.

원래 분쟁 중인 거대 길드간에는 서로 상대방의 구역 내에 사람을 심어두는 것이 당연했다.

헌터들을 움직여 직접 공격해온다거나, 다른 공작을 위해 수상한 움직임이 있을 경우, 미리 파악을 해야 대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대규모의 기습이 벌어졌음에도 청성 길드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감지하지 못해 보고가 올라오지 않았다.

강남 지역 중심부에 군단이 직접 앞에 나타난 뒤에야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그야 나 혼자서만 찾아왔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

“…너는.”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한인호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가면을 쓴 성현이 그의 앞에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한인호는 순간 검에 손을 가져다대며, 그를 베기 위해 바로 발을 박찰 뻔 했지만 멈칫 멈춰 섰다.

“혼자서만 찾아왔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인데. 주변을 잘 둘러보지 그래.”

성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금 도시로 들이닥친 존재 중, 백룡 길드의 헌터나 이지스 산하의 헌터들조차 단 한 명도 없었다.

직접적인 이지스 소속의 헌터들조차 이즈나나 로칸 같은 마족이자 간부진들이 전부였다.

즉, 오로지 성현과 그를 따르는 몬스터 군단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설마… 정말 너 혼자서 이 곳까지 쳐들어 왔다는 거냐?”

“그래야 제대로 된 기습이 성립이 되는 거니까.”

성현은 천하 길드가 본격적으로 끼어들기 전, 청성과의 전쟁을 완전히 결판을 지을 작정이었다.

때문에 청성을 공격하기 위한 백룡과 이지스 길드 자체의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만약 요란하게 청성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면, 천하 길드를 더 빠르게 움직이게 만들든 다른 해외의 거대 길드를 끌어들이든.

직접 나서지 않고서 싸움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는 게 목적인 한인호는 수작질을 벌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

한인호의 입가에 기이한 웃음이 지어졌다.

정말로 혼자서 결판을 짓기 위해 이 자리에 온 듯한 영왕의 행동이었다.

독 면역을 지닌 백룡의 길드장 진서연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자신을 상대하겠다는 것이다.

심지어 주변의 수많은 간부들과 지부, 산하 길드원까지 오로지 자신의 소환수 군단만으로 쓰러뜨리겠다며 중심부로 찾아왔다.

“하하하! 이거 어지간히 우습게 보였나보군.”

한인호의 몸 주위로 거무스름한 기운이 일렁였다.

주변을 부식시키는 독기가 스멀스멀 퍼져 나왔고, 같은 편인 유은하나 최고 간부들조차 뒷걸음질치며 물러나야 할 정도였다.

‘독사’라는 그의 이명에 걸맞는 모습이었다.

“이 자리에서 죽여주지.”

이성의 끈이 살짝 끊어진 듯한 한인호의 모습이었다.

그는 엄청난 살기를 뿜어냈고, 겉으론 태연하기 짝이 없는 성현조차 침을 꿀꺽 삼켰다.

어찌되었건 첫 번째 단계는 성공적이었다.

‘후, 좋아. 그럼 시작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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