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색출 (3)
콰득!
“컥……!”
순식간에 뒤틀린 남자의 시야.
청성의 헌터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무언가 대처를 할 새도 없이 반쯤 찌그러져 버린 남자였고, 그의 옆에 선 동료들은 깜짝 놀라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보나보나 한인호가 시킨 짓일 테고. 너흴 살려둘 필요도 없겠지.”
“여, 영왕?”
“네 놈이 어떻게 여길……!”
맨 손으로 가볍게 검을 부러뜨려버린 성현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서있었고.
헌터들은 상대의 정체에 대해 곧바로 알아챘다.
네크로맨서라는 게 믿기지 않을 완력이었지만, 영왕의 신체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건 저번 싸움 이후로 청성 길드 내에서라면 다 알려진 뒤였다.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헌터들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명백한 수적 우위에 포위를 하고 있음에도 먼저 검을 휘두를 생각은 쉽사리 하지 못했다.
무려 간부급을 제거하기 위해 은밀히 움직였던 그들이었지만, 영왕이 이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단 것은 이미 그들의 움직임이 훤히 읽혔다는 것이다.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상황.
물론 이 상황을 전혀 예상을 하지 못했던 건 저들 뿐만이 아니었다.
“이건 대체 무슨…….”
여기 선 모든 이들 중에서 가장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그들의 사이에 낀 강일훈이었다.
난데없이 길드로부터 암살자들과 함께 자신을 제거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더니, 이젠 영왕이 나타나 그걸 막고 있다.
다른 이가 보면 영락없이 자신이 이 일을 꾸민, 배신자나 다름없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청성의 암살자들도 당연히 그와 같은 생각을 하였다.
“역시 네 놈이 내통을 하고 있던 거였나!”
“죽여버려!”
휘릭!
격한 반응과 함꼐 그들의 뒤편에 서있던 헌터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들의 짠 계획과 상황은 이미 틀어져버렸다.
S급 헌터인 영왕을 그들의 힘만으로 당해낼 수는 없는 법.
하지만 얌전히 당해줄 생각은 없었고, 본래의 목표였던 강일훈 만이라도 확실히 제거할 생각이었다.
콰드드득!
그러나 기이한 소리와 함께 검이 뜯겨져나갔다.
검을 뽑아든 성현은 검은 기운이 일렁이는 칼날을 휘둘렀고, 뻗었던 검들과 함께 헌터들을 베어 갈랐다.
미처 눈으로 쫓지조차 못한 아주 빠른 움직임이었다.
[군주, 몰고르의 그림자를 흡수하였습니다!]
[‘단순무식’ 특성이 활성화됩니다!]
오우거 군주 ‘몰고르’의 특성.
잠시 동안 다른 마법과 특성을 활용하지 못하는 대신, 그동안은 폭발적인 근력을 얻게 된다.
페널티가 있는 만큼 그 성능 하나는 확실했다.
콰아아앙!
“크아아악!”
거의 폭발에 가까운 굉음을 낸 성현의 검격에 바닥을 나뒹굴며 쓰러진 청성의 헌터들.
굳이 다른 기술을 사용할 것도 없이 압도할 수 있는 상대라, 아무런 부담 없이 꺼내들 수 있던 특성이었고.
괜히 이래저래 검을 주고받을 것도 없이 빠르게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제, 젠장! 다들 정신…….”
촤아아악!
성현은 단숨에 헌터의 목을 베어냈다.
나뒹굴었던 헌터들은 일어나 저항해보려 했지만, 이 압도적인 차이 앞에선 발버둥을 쳐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물론 그렇다고 등을 돌려 도망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성현은 주저 없이 마지막 남은 청성의 헌터까지 베어버렸다.
‘이… 이건.’
제 자리에 얼어붙은 강일훈이 성현을 바라봤다.
하위 헌터도 아닌 청성의 A랭크 헌터들을 허수아비를 쳐내듯 쓸어버린 광경이다.
그것도 네크로맨서라는 직업명이 무색할 정도로 소환수 하나 꺼내들지 않고서 저들을 모두 쓰러뜨렸다.
가끔 청성의 최고 간부들과 함께 작전을 나선 적도 있던 강일훈이었지만, 그들과 비교해서도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반항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겠어.’
침을 꿀꺽 삼킨 강일훈은 뽑아들고 있던 자신의 검을 늘어뜨렸다.
어떤 이유로 찾아온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자신의 목숨은 저 자의 뜻에 걸려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실망인데. 내 목소리도 바로 못 알아채고.”
“뭐… 뭐라고?”
영왕이 꺼낸 영문 모를 소리.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강일훈은 눈을 번쩍 뜨며 반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의 연속에 정신이 없어서 알아채지 못했던 강일훈이었지만, 저 말을 듣고 나자 알 수 있었다.
달그락.
성현은 자신의 가면을 벗어 얼굴을 보였다.
“저… 정말 너라고?”
드러난 성현의 얼굴에 강일훈은 멍하니 바라봤다.
그동안 베일에 감싸여 있던 영왕의 정체가 다른 녀석도 아니고 성현이었다니.
눈앞에 직접 보이는 광경조차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쩌다보니 이렇게 됐어.”
“어쩌다보니라니… 헌터가 되었다는 건 알았지만, 각성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네가 어떻게…….”
말문이 턱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은 물론 영왕의 정체를 밝혀내려 두 눈을 붉히던 청성 길드 내에서도 아예 용의선상에도 없던 그였다.
그도 그럴게 성현이 청성 길드에서 억울하게 쫓겨난 이후.
헌터로 각성한 시점과 가면을 쓴 영왕이 청성과 마찰을 빚은 시점은 거의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즉, 성현은 각성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청성의 산하 길드를 박살내고, 그 이후엔 이지스 길드라는 거대 세력의 수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단순히 성장 속도가 빠르다의 범주를 한참이나 넘어선 일이었고, 상식상 불가능하다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사정이야 천천히 설명해줄 테니 일단 자리부터 피하자. 이러고 있는 추적해 올 수 있으니까.”
성현이 주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길목에 널브러진 시체들과 핏자국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한인호의 명을 직접 받아 간부급을 제거하러 왔던 인원인 만큼, 연락이 두절되어 돌아오지 않는다면 곧바로 후속 조치를 취할 것이었다.
빨리 자리를 뜨는 편이 좋았다.
“…그래.”
강일훈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 * *
“청성에 있을 적에 힘을 숨긴 것도 아니었단 말이지.”
“조건부 각성자라 특별한 능력을 얻은 덕에 성장이 빨랐어. 이런저런 일들도 있었고.”
벽에 기댄 채 이야기를 이어가는 성현.
그를 바라보는 강일훈의 시선이 흔들렸다.
자리를 옮겨 대강의 사정을 듣고 나서도 믿기 어려웠다.
청성은 물론 국내 거대 길드 간의 판도를 통째로 흔들어놓은 ‘영왕’이 바로 자신의 옆에 있었다니.
이쪽 업계에 몸을 담으면서 놀랄 일이야 언제나 많았지만, 오늘처럼 머리가 멍해질 정도의 일은 처음이었다.
“아무튼 그동안 속인 건 미안하게 됐어.”
“아니, 당연히 말을 하면 안 됐지. 나라도 그랬을 거다.”
강일훈은 청성의 간부였다.
아무리 친분이 있다 해도 당연히 말을 해서는 안 될 일이었고, 오히려 역으로 그를 속이고 이용해 청성의 정보를 빼내려 시도하지 않은 것만 해도 이쪽 업계에선 굉장히 양심적인 행동일 터였다.
“오히려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니 감사해야할 쪽이지. 나 정도는 충분히 버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고맙다.”
감사를 표한 강일훈은 팔짱을 끼고선 성현을 바로 보았다.
“그래서… 무슨 볼 일이 있어서 날 찾아온 거지? 슬슬 본론을 꺼내지 그래.”
“본론이라니?”
“괜히 빙빙 돌려서 말할 필요 없어. 내 목숨을 구해주려는 게 전부였다면, 굳이 나에게 얼굴과 정체를 드러냈을 리가 없지. 신용과 별개로 네 정체를 아는 사람은 최대한 적을수록 좋고, 저 녀석들만 처리하고서 떠났다면 훨씬 깔끔했을 테니 말이야.”
“하하… 역시 눈치는 좋아.”
성현이 피식 웃어보였다.
빠르게 본론으로 넘어간다면 그야 좋았다.
“나랑 같이 일이나 하자.”
“일을 하자고? 이지스로 들어오라는 건가?
“그래. 간단하지?”
성현이 강일훈을 찾아와 정체를 먼저 밝힌 이유.
이지스 길드는 대부분이 성현의 직속 군단에 속한 마족들이었고, 산하 길드까지 합쳐도 길드 내의 핵심적인 간부진에선 인간은 그 수가 굉장히 적은 편이었다.
기껏해야 백명을 이끄는 한승희, 그리고 최근 마음을 굳힌 성찬일까지 둘 뿐이었다.
수많은 산하 길드들을 흡수하며 이지스 길드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고 있는데, 정작 비대해진 길드의 중요 업무를 맡길 만한 간부진이 적었다.
일반 직원 중 실무직들의 인원이 충분함에도, 평소 한승희에게 업무가 과다하게 쏟아지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배신의 걱정 없이 확실히 성현이 신뢰할 수 있는 헌터 출신 간부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
“그래서 날 찾아온 거였나? 하기야… 무려 영왕이 직접 나타나 구해줬으니, 빼도 박도 못한 배신자가 되었네. 선택지가 없는 걸.”
강일훈은 헛웃음을 흘렸다.
오로지 심증만으로도 간부인 자신을 제거하려던 차였는데, 이런 직접적인 정황에 자신의 변명이 먹힐 리가 없었다.
보나마나 청성은 어떻게든 그에게 보복하려 들 것이다.
이제 그로선 목숨을 구하려면 이지스에 몸을 맡기는 것뿐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해서 청성의 보복 때문에 꼭 우리 길드에 들어올 필요는 없을 걸.”
“그건 무슨 소리지?”
“배신 걱정이 없으니 제안을 한 것일 뿐. 굳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선택지를 강제할 필요는 없어. 어차피 청성은 곧 사라질 거거든.”
“잠깐, 너 설마…….”
“청성은 이 싸움을 최대한 장기전으로 끌고 갈 생각이겠지만, 난 그럴 생각이 없어서 말이야.”
성현은 이 청성과의 싸움을 길게 가져가면 불리해진다는 걸 잘 알았다.
청성과 함께 양대 길드인 화신, 그리고 그 길드장인 염제 최성준의 전력은 굉장했다.
당장은 비등하게 싸우는 듯 보여도 끝까지 간다면 규모의 차이로 인해 혼자서 상대하고 있는 태산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것이다.
경기 북부의 태산이 화신 길드를 붙잡아 주고 있는 사이에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청성에서 끌어들이려 하는 해외 길드들 역시 천하 길드가 전부가 아닐 터였고, 국내를 완전히 틀어쥔 것도 아닌 상태에서 제 3세력과 지속적으로 소모전이 벌어진다면 청성과 결판을 내기 전에 상당한 힘을 갉아 먹히고 말 것이다.
무엇보다 많은 세력이 국내로 한 번 발을 들이고 얽히기 시작하면, 한인호를 쓰러뜨린다 해도 그 이후에 벌어질 일 자체만으로도 골치가 굉장히 아파진다.
청성과의 싸움을 매듭짓고 나서도 더 큰 파도가 몰아칠 수 있었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선 최대한 빨리 청성을 치워버려야 했다.
‘청성은 뒷짐 지고서 구경이나 할 셈이겠지만… 내가 그 장단에 맞춰줄 이유 따윈 없다. 천하 길드를 잠시 틀어막아둔 이때, 단 번에 결판을 내야지.’
쿠구구구구!
“크르르르!”
성현의 등 뒤로 비룡 안타라스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거대한 와이번 군주의 등장에 놀란 강일훈이 흠칫 물러섰다.
성현의 등 뒤에 일렁이는 그림자와 무수히 많은 기척들.
전투를 앞둔 거대한 군단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당장 결정이 어렵다면 결과를 듣고서 정해도 좋아. 청성 길드는 오늘 안에 끝장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