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색출 (2)
도시로부터 떨어진 외각 지역.
수십 여 명의 천하 길드 소속 헌터들이 모여 있었다.
인적도 많지 않고 시골이나 다름없는 장소였지만, 그렇기에 시선을 피하기엔 제격이었다.
“언제까지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 거지?”
“이제 곧 명령이 떨어질 거다. 본토로부터 훨씬 많은 수의 증원이 있을 거라고 했으니까.”
“몸이 근질거리는군. 어서 빨리 나서서 쓸어버리고 싶은데.”
여기 있는 헌터들은 벌써 며칠이나 먼저 들어와 대기하던 참이었고, 따분함에 무기를 슥슥 갈고 있을 뿐이었다.
구석진 자리에 숨어 대기하고 있으니 사람을 마주할 일도 없고, 별다른 사건이야 당연히 없다.
하지만 그때.
콰아아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벽면이 박살났다.
그 안으로 우르르 들이닥친 녹색의 괴물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키이이익!
“모… 몬스터?
“젠장,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갑작스레 들이닥친 고블린들의 등장.
당혹스러운 상황이었지만 헌터들은 재빨리 무기를 들어올렸다.
“다들 정신 차려! 어디에 던전이 생겨났는지는 몰라도 빨리 찾아서 처리해야 된다!”
던전으로 인해 은신처 주변이 시끄러워지면 현지 지역 길드의 헌터들이 찾아올 것이었고, 자연스레 시선에 노출될 수 있었다.
때문에 괜한 사건이 생기기 전에 그들이 던전을 처리할 셈이었다.
어차피 고블린 정도라면 금방 처리할 수 있었다.
전투도 아닌 그저 가볍게 몸을 푸는 정도일 뿐.
“컥……?”
“뭐, 뭐야!”
하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가장 앞에 서있던 헌터들 중 몇몇이 달려드는 고블린에게 베여 쓰러지고 만 것이다.
이 곳에 있는 인원 중 대부분이 고위 헌터로 분류 받는 B급 수준의 헌터들이었다.
이 정도 헌터들이 F급 수준의 고블린에게 쓰러지는 것은 갓난아기에게 얻어맞은 성인보다도 더 한 꼴이었다.
“너희들 고블린 따위에게 당하다니 제정신이야?”
“이, 이런 젠장! 보통 고블린이 아니라고!”
콰악!
“끄아아악!”
말하기가 무섭게 고블린의 창이 날아들었다.
그제야 후위에 있던 이들이 고블린들을 자세히 보았고, 놈들이 걸치고 있는 장비부터가 달랐다.
무려 레어메탈제 무기에 마법 부여까지 되어 마력이 느껴지는 장비들이었다.
헌터들도 손에 넣기 힘든 장비들을 주렁주렁 걸치고서 무장한 고블린이라니.
그 넓은 중국 땅에서도 이따위 사례는 단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이 새끼들이……!”
콰직!
헌터가 고블린의 가슴팍을 깊게 베어냈다.
제대로 얻어맞아 갑옷을 가볍게 뚫어내며 베어진 깊은 상처.
“키이이익!”
하지만 그럼에도 고블린은 벌떡 일어났다.
군단 강화 특성으로 인한 생명력 증가 효과는 일반 수하들이라도 치명상을 한두 번 더 버티게 만들어주었다.
심지어 후위로부터 날아든 광역 전격 마법에도 직격당한 녀석만이 충격에 잠시 비틀거렸을 뿐, 주변의 고블린들은 가볍게 몸을 털어내고선 덤벼들었다.
무려 80퍼센트에 달하는 전격 저항 덕분이다.
“제… 젠장 이게 말이…….”
콰아아앙!
반대편 벽이 무너지며 나타난 괴수의 커다란 몽둥이에 후위의 헌터들이 으깨졌다.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나타난 홉고블린들이었다.
“크르르륵!”
“트, 틀렸어.”
고립되어버린 천하 길드의 헌터들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제 B급이나 C급의 헌터들로선, 성현의 군단 중 정예급 수하의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
* * *
털썩!
“컥…….”
무릎 꿇은 남자가 진한 피를 토해냈다.
천하 길드의 대간부로선 믿기지 않는 일방적인 패배.
그의 앞엔 가면을 쓴 성현이 서있었다.
“그래도 가장 오래 버티긴 했네. 이제 네 쪽이 마지막이야.”
성현은 감흥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검을 들이밀었다.
조금 전 흩어져 있던 천하의 길드원들이 사방에서 공격받고 있단 소식이 들려왔고, 그러자마자 성현이 그의 앞에 나타나 공격해왔다.
성현은 군단을 일제히 움직여 곳곳에 숨어있던 천하의 헌터들을 사냥했다.
덕분에 동시다발적인 공격을 받은 적들은 대처할 새도 없이 한 순간에 쓸려나간 것이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지금 이 순간조차 주르륵 올라가는 경험치와 레벨.
흩어져 있던 천하의 헌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처리되며 퀘스트 보상이 들어오고 있는 것이었고, 곧 한 명의 숫자만을 남기고 뚝 멎었다.
[이름 - 이성현]
[칭호 - 운명의 대적자]
[레벨 - 328]
[직업 - 네크로맨서]
[주요 능력치]
힘: 702 민첩: 644 체력: 635 마력: 678
[보유 특성]
상태창(S), 그림자 군주(S), 백귀야행(S)
순식간에 퀘스트를 처리하며 레벨이 두둑이 오른 성현.
퀘스트 덕에 이 곳에서 싸우던 와중에도 더 강해진 성현이었고, 덕분에 고작 여기 있는 천하의 대간부 혼자선 그를 감당할 순 없었다.
“같은 대간부급이라곤 해도 셴룽보다는 강한 녀석을 데려왔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녀석보다 못한 급을 보낼 줄이야. 이렇게 안일하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네 놈들이 잘 난척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따위 소국 따위 곧 한 놈도 빠짐없이 짓밟힐 테니까.”
이를 빠득 간 남자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물론 자신을 무릎 꿇힌 상대에게 저런 모습을 보여줘 봤자, 성현의 입장에선 우스울 뿐이었다.
“지난 10년이 넘도록 못한 일을 이제 와서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
“네 놈이 잡은 인원이 우리 천하의 티끌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게냐? 착각도 잘 하는구나. 네 놈들 따위 여태껏 다른 국가들에 우선순위가 밀렸을 뿐.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그래봐야 넌 여기서 끝이지.”
콰득!
성현은 거리낌 없이 남자의 목에 검을 틀어박아 숨통을 끊었다.
털썩 쓰러진 그의 시체를 옆으로 치운 성현.
퀘스트가 완료되며 마지막 하나의 레벨업까지 깔끔하게 이루어졌다.
“뒷정리는 끝났고… 이제 움직여줘야겠군. 아직 남아있는 일이 있으니.”
* * *
“설마 성찬일이 우리를 배신을 하다니… 그 자식 진짜 단단히 정신 나간 거 아냐?”
성녀 유은하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최고 수뇌부인 3성의 일원, 성찬일.
죽은 줄만 알었던 그의 배신이 확인되었고, 내부의 정보까지 새어나가고 만 것이다.
이지스에서 자신들의 계획을 눈치 채고, 화신이 태산 길드에게 발 묶인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내 계획에 결사적으로 반대하긴 했어도 먼저 배신할 정도의 녀석은 아니었다. 분명 놈이 입을 놀리며 구슬린 거겠지.”
한인호가 입을 열었다.
“내통자가 들키면서 인천 쪽은 백룡이 완전히 틀어막았어. 덕분에 천하 길드의 헌터들은 수도권에 들어서려면 지방을 거쳐 빙 돌아와야 하고.”
“그 정도는 괜찮아. 천하 길드는 피해를 입으면 입을수록 더욱 득달같이 달려드는 녀석들이니까. 놈들이 오래 치고 박을수록 우리들이 유리해질 뿐이야. 싸움은 이대로 길게 가져갈 거다.”
싸움이 장기화될수록 청성의 입장에선 반가울 뿐.
몇몇 계획이 꼬여감에도 청성이 마음 편히 뒷짐을 지고서 한 발 물러서있을 수 있는 게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지스와 관련해선 아직 남은 문제가 있다. 저번 습격에서 취약점만을 노리고 유유히 사라진 점이나, 백룡 길드에 심어둔 내통자를 바로 알아챈 점이나. 놈들은 마치 우리의 수를 훤히 알고 있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어.”
“그거야 성찬일이 배신했으니 당연한 거 아냐? 녀석이 다 불었을 거 아니야.”
“아니, 녀석이 정보를 미리 싸들고 나간 게 아니었으니 그건 불가능한 이야기지.”
성찬일은 미리 청성을 배신할 계획을 세운 게 아니었다.
그저 영왕에게 제압당한 이후, 이후의 상황까지 지켜보고서 설득을 당했을 뿐.
그런 우발적인 배신에 각 길드 지부들의 자세한 상황이나, 백룡 길드에 심어둔 내통자들의 정보를 성현에게 알려줄 수 있을 리는 없었다.
한 마디로 청성 길드의 내부에 문제가 있다는 것.
“그러니까… 이지스와 내통하고 있는 녀석이 우리 길드 안에도 있다는 거지?”
“그래, 그것도 최소 간부 이상의 신분에서 말이야.”
한인호가 확신을 가진 듯 말했다.
길드 안에 솎아내야 할 내부자가 존재했다.
“청소가… 필요하겠군.”
* * *
한인호의 명령이 떨어지고서, 청성은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에 나섰다.
이런 중요한 싸움에 앞서 배신자를 색출해내는 작업은 아주 중요한 만큼 순식간에 조사가 이루어졌다.
덕분에 배신자에 대한 내부 수사망은 빠르게 좁혀졌다.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지?”
청성의 간부, 강일훈.
그는 난데없이 수 명의 헌터들에게 둘러싸였다.
전원이 최소 A급 헌터인 데다가, 같은 청성 길드의 소속인 이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분위기는 명백히 그를 적대하고 있었다.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조사에 협조해주셔야겠습니다.”
“조사? 설마 날 배신자로 의심하고 있다는 거냐?”
“영왕에게 살해당했던 황씨 형제와 마찰이 있더군요. 황석일 씨와는 오래 전부터 경쟁적인 관계였고, 그의 동생인 황일우와도 낙하산 취급하며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낙하산 취급이 아니라 낙하산이 맞다.”
“어찌됐든 영왕은 그 두 형제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였습니다. 정황을 보면 단순히 길드를 공격하기 위함은 아니었던 것 같고, 개인적인 원한 관계라도 있어보였죠. 덕분에 길드 내의 간부진 중 연관성이 가장 높은 게 바로 당신입니다.”
“지금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나는 그 놈들하고 아무런 연관도 없어!”
강일훈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소리쳤다.
청성의 간부직임에도 성현과 개인적인 친분을 이어온 그였다.
허나 성현이 영왕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 하는데다가, 길드에 대한 배신행위 같은 건 전혀 하지 않았다.
당연히 억울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솔직히 혐의를 입증할 만한 물증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조치는 의심군에 대한 조사가 아니라 통보라서요.”
“뭐, 뭐라고? 설마 너희들…….”
“조사 결과, 마지막까지 남은 의심군 다섯 명은 제거하기로 위에서 결정이 났습니다. 대표님께서 빠른 일처리를 원하시고,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어쩔 수 없죠.”
스릉!
청성의 헌터들이 일제히 검을 빼들었다.
마땅한 물증은 없으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빠르게 일을 처리하라는 길드장 한인호의 말 한 마디였을 뿐.
최소 A랭크 이상의 전력인 간부들이라 해도, 언제든 갈아 끼울 수 있는 부품이라는 건 변하지 않았다.
“이… 이 새끼들이…….”
이를 빠득 간 강일훈이 검을 들었다.
청성의 간부직을 맡고 있는 만큼 강일훈이 A급 헌터 중에서도 상위의 실력자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이 정도 숫자가 한꺼번에 달려든다면 감당해내기란 무리였다.
이 정도 헌터들의 숫자 차이를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건 A급의 경지를 넘어선, S급의 헌터는 되어야 했다.
“의미 없는 발악을 하기는… 죽여라!”
포위하고 있던 헌터들이 강일훈을 향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검은 맨 손에 가볍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콰드드득!
맨 손에 찌그러져버린 헌터들의 검.
가면을 쓴 성현이 골목길의 그림자 속에서 나타났다.
“혹시나 해서 눈을 하나 붙여놨는데. 정말 이런 짓거리까지 벌일 줄이야. 혼 좀 나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