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색출
덜컹!
인천항에 밀입국한 중국측 헌터들이 어둑한 건물 안에 한가득 서있었다.
최소 백 여 명이 넘는 숫자.
전원이 천하 길드의 헌터들이었다.
하지만 이 곳에 선 모두가 천하 길드의 헌터인 것은 아니었다.
최소한 모든 지역을 국내 길드들이 꽉 잡고 있는 한국이니 만큼, 천하 길드라 한들 내부에서의 도움이 없다면 몰래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핫, 이번에도 다들 무사히 도착하셨군. 멀미는 다들 안 하셨죠?”“시답잖은 농담을 하기는. 약속한 보수는 여기 있소.”
“아이고, 감사합니다!”
허리를 꾸벅 숙인 김석호가 거액의 현찰을 건네받았다.
물론 여기서의 현찰은 봉투 안에 담긴 귀여운 액수가 아니었다.
여러 개의 박스 채로 잔뜩 담겨오는 돈다발에 그의 뒤편에 있던 다른 길드원들까지 냉큼 달려와 돈을 건네받았고.
김석호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사람 한 명당 이만한 수수료를 떼어먹을 수 있다니. 하하, 이만한 장사가 또 따로 없다니까.”
“길드장님, 저희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요?”
“뭐?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옆에 선 직원의 말에 김석호는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돈벌이가 좋긴 해도 너무 깊게 발을 들인 게 아닌가 싶어서요. 아무래도 불안하시지 않습니까?”
“불안 같은 소리. 요즘 들어 길드 운영 팍팍한 거 몰라서 그래? 살벌한 시기에 그렇지 않아도 먹고 살기 힘들어죽겠는데, 백룡에선 산하 길드라고 쥐어짜내려 하잖아. 그런 와중에 청성이든 천하든 두둑이 챙겨준다 하니 거절할 이유가 없지. 외국 길드든 뭐든 일단 입에 풀칠을 해야 애국심이 생겨나는 법이라고.”
김석호는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현찰들을 내려다보았다.
“거기다 이번 기회에 인천의 주인이 바뀔 지도 모르지. 처음에 붙어먹을 때야 좋았지만, 너무 과격해서 감당하기 힘들어. 시대가 어느 때인데 헌터들도 인텔리해야지.”
“하지만… 그러다 걸리기라도 한다면, 검제의 성격이라면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럴 걱정 없어. 확실하게 조치를 해뒀으니. 벌써 이만한 인원을 빼돌렸는데도 백룡에선 까맣게 모르고 있잖아.”
김석호는 자신감에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한치의 의심도 없이 확신하는 것이 다소 거만해보이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도 그럴게 김석호는 백룡의 내부 사정에 대해 훤히 꿰뚫고 있었다.
백룡이 중소 길드로서 진서연을 중심으로 모여 세를 불리기 막 시작하던 시절.
길드장인 진서연의 범상치 않은 힘과 재능을 본 김석호는 기꺼이 그들에게 자금원이 되어주며 줄을 섰다.
결국 진서연과 백룡이 인천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거대 길드가 되며, 당시의 그 선택은 최고의 결정이 되었다.
길드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얻은 데다가 타고난 사업 수완으로 신항을 통째로 관리하며 백룡의 자금원이 되어주었다.
던전 사태가 발생하기 전, 이미 자리를 잡은 사업가였던 김석호의 능력은 백룡에게 상당한 쓸모가 있었다.
“제대로 된 사업가라면 리스크를 지고서 투자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지.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야. 어차피 청성에 중국까지 끼어든 이상 백룡도 오래 버티지 못할 거고. 함께 가라앉는 것보단 손을 털고서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보면 돼.”
오로지 힘만이 법칙인 헌터들의 세계였지만, 그 곳에서도 눈칫밥과 정세를 읽는 감각은 통용되었다.
십 여 년 전에 백룡 길드에게 줄을 대었듯, 이젠 그만 갈아탈 때가 되었음을 직감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김석호와 길드원에게 중국의 헌터가 다가왔다.
“이제 어느 쪽으로 빠져나가면 되는 거지?”
“아, 예. 길은 미리 준비해뒀으니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저희가 맡은 구역 쪽은 비교적 덜하긴 하지만, 저번 사건이 터지고 나서 백룡 녀석들이 원체 뒤지고 다니거든요. 잠시만 기다리시죠.”
치지지직!
김석호가 시선을 주자 길드원은 허리춤의 무전기를 들고는 말했다.
주변의 망을 보도록 시킨 길드원들과 연락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무전기로부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뭐야, 왜 그래 이거?”
“아, 아마 통신에 문제가 모양입니다. 저희가 직접 확인하러 나가보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일단 안에서…….”
콰아아아앙!
갑작스러운 요란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잠궈놓았던 건물의 문과 주위의 벽까지 박살나며 뻥 뚫렸고, 안에 있던 이들이 충격에 비틀거려 땅을 짚게 될 정도였다.
“이런 미친!”
“무… 무슨 일이야!”
“다 쓸어버려!”
콰직!
안으로 들이닥친 백룡의 헌터들이 검을 빼들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험악한 꼴에 헌터들이 하나둘 쓸려나갔고, 동조자인 산하 길드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다 알고 온 자리에 달아나려 하거나 반항을 해봐야 소용없었다.
“이런 쓰레기 새끼들이…….”
뒤이어 들어온 자리엔 백룡의 길드장, 진서연까지 서있었다.
이를 빠득 간 그녀의 표정은 결코 좋지 못했다.
단순히 뒤통수를 맞은 것을 넘어, 앙숙 관계인 천하 길드의 헌터들이 자신의 구역 안을 활보하고 다녔다는 것이 자존심까지 건드렸다.
“벌레마냥 어디로 숨어들어오나 했더니… 겁도 없이 내 구역 안에서 기어들어온 거였단 말이지.”
쿠웅!
진서연이 난간을 박차고 아래로 내려섰고.
순식간에 김석호의 목을 낚아채어 들어올렸다.
“커, 컥……!”
“김석호, 네가 배신을 해?”
거의 초창기부터 함께 했던 이였기에, 그만한 신뢰 관계가 있었다.
만약 성현에게서 얻은 정보가 아니었다면 용의 선상에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뒤늦게 강도 높은 조사에 나서자 해외 헌터들의 밀입국을 도운 것은 물론, 청성에게 백룡의 정보까지 팔아먹은 정황이 확인되었다.
“대… 대표님! 자,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저도 놈들한테 협박을 당해서 그런 겁니다! 청성이 저희 가족한테까지……!”
“개소리 지껄이지 마.”
콰드드득!
김석호의 목이 기이하게 비틀리며 핏줄기가 튀었다.
순식간에 절명한 김석호의 시신이 바닥에 널브러졌고, 그녀는 쓰레기 버리듯 시체를 발로 차 옆으로 치웠다.
길드원들에게 하나둘 무력화되고 있는 헌터들을 지나쳐 가자, 그녀가 선 탁자 위엔 배신자들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장부와 기록들이 있었다.
그를 낚아챈 진서연은 기록들을 읽어 내렸다.
“젠장, 요란하게도 해먹었군.”
여기서 붙잡은 숫자는 얼마 되지도 않게 느껴질 만큼, 천하 길드의 헌터들이 인천항을 통해 국내로 들어선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미 국내로 들어온 수가 엄청날 테고, 셴룽 이상의 대간부격 최고위 헌터들도 섞여있을 것이었다.
“그 녀석의 말이 정말 맞았어.”
김석호가 백룡을 배신했을 거라는 정황은 물론, 국내로 들어왔을 천하측 헌터의 예상 규모와 인원수까지.
자신에게 해주었던 영왕의 말 대부분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 녀석… 이런 정보를 어떻게 확보한 거지?”
* * *
[퀘스트 현황]
[국내에 숨어든 모든 천하 길드의 헌터들을 색출하여 제거하십시오!]
[한 명당 상당한 양의 추가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109/2684)]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좋아, 백룡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군.’
성현이 자신의 앞에 번쩍 나타난 메시지들을 바라보았다.
백룡 길드의 헌터들이 항구로 들어온 마지막 인원을 쓸어버리며 퀘스트 상의 목표 중 백 여 명이 순식간에 올라간 것이었다.
이번 퀘스트는 미리 공지되었던 대로 자신이 직접 나서든 남의 손을 빌리든 간에 보상이 똑같이 들어왔다.
아직 남은 인원도 많았는데 2레벨이 한꺼번에 오를 정도의 상승폭이라니, 보상은 굉장히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는 거지?”
성현과 마주하고 있던 곰가면의 남자가 말했다.
그러자 성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 것도.”
서연화의 오른팔이자, 흑련의 간부.
자신이나 곰가면의 남자나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었기에 아직도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이라지만, 그래도 구면이긴 했다.
이번 상황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서며 정보를 넘겨왔으니 말이다.
“흑련이 나와 손을 잡는 걸 그리 탐탁지 않아하더니. 생각보다 협조를 잘 해주네.”
“아직도 널 신뢰해도 되는지 모르겠다만… 길드장의 결정이라면 따를 뿐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온 이상, 결정을 무르기엔 이미 한참 늦었지.”
곰가면의 남자가 말했다.
흑련은 이미 중립의 입장을 버리고서 이지스와의 한 배에 탄 운명이었다.
거대 길드 간의 세력 구도가 급변하며 격변의 시기가 왔고, 암시장의 길드라 해도 그 변화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청성의 성향상 그들이 수도권 전체를 집어삼키게 된다면 흑련의 위치 역시 위험하게 될 거란 서연화의 판단이 있었고.
그녀의 결정대로 이미 이지스의 편에 선 이상, 어중간하게 행동하는 것은 오히려 스스로 목을 죄는 독일 뿐이었다.
“저번에 건넸던 정보에서 빠져있던 나머지 인원의 위치들이다. 한 명도 빠짐없이 숨어든 모든 헌터의 위치를 찾아냈지.”
곰 가면의 남자가 성현에게 자료를 건네주었다.
그러자 그를 받아든 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흑련이 비공식적으로 정보를 수집해왔다는 건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솜씨가 좋아. 이번에 세력을 확장하고부터 나서는 더더욱 그렇고.’
그동안 서울 전역의 뒷골목을 꽉 쥐고 있던 흑련 길드였다.
하지만 그 바깥 지역에선 미치는 영향력이 한정되어 있었는데, 이지스 길드와의 새로운 관계를 맺고 나선 완전히 이야기가 바뀌게 되었다.
성현이 약속한 경기 남부는 물론, 새로이 인천 지역까지 확장을 펼치며 암시장들이 그들의 몫으로 넘어갔다.
물론 기존에 자리 잡고 있던 암시장 세력들 흑련의 진출에 반발하며 순순히 비키려 들지 않았지만.
아예 해당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9대 길드, 이지스의 비호를 받고 있는 흑련이었다.
암시장 길드가 뒷골목에서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양지에 있는 거대 길드들과는 체급의 단위 자체가 달랐다.
그렇지 않아도 국내 암시장 길드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수완이 좋은 곳이 흑련이었는데, 경쟁 길드들을 찍어 누르며 순식간에 암시장을 장악해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수도권 암시장 전역에 펼쳐진 흑련 길드의 정보망은 성현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들을 기대 이상으로 쓸어 담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노릴 거라는 건 아는지 곳곳에 흩어져 있군.’
지금은 흩어진 채 숨어있는 천하 길드의 헌터들.
단독으로 국내의 9대 길드를 압도할 수 있을 정도로 중국으로부터 충분히 인원이 들어온 다음에 공세를 취하기 시작할 것이다.
“알아서 하겠지만. 가급적이면 동시에 처리하는 게 좋을 거다. 꼬리가 붙었다는 걸 알고서 다시 뿔뿔이 흩어지면 찾기 어려워질 테니까.”
“물론 그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렇지 않아도 한 번에 다 잡아낼 작정이었으니까.”
츠츠츠츳!
피식 웃어보인 성현의 뒤편으로부터 새까만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수많은 기척들에 곰가면의 남자는 순간 숨을 들이켰다.
‘역시… 괴물이로군.’
그림자를 마주한 그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나왔다.
역시나 그와 처음 마주했을 때의 모습과는 완전히 딴 판이었고, 직접 싸워보지 않은 상대임에도 경외감마저 들 정도였다.
‘한 쪽의 편을 든 게 잘한 건지는 몰라도… 최소한 적으로 돌리지 않은 건 다행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