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빈집털이 (3)
“너희 구역으로 돌아갈 줄 알았더니. 왜 여기서 날 부른 거지?”
백룡의 길드장, 진서연이 주위를 슥 둘러보더니 말했다.
그녀가 선 자리는 인천항 인근의 한 폐건물.
두 길드장이 만나기엔 다소 엉뚱한 장소였다.
그러자 그녀를 기다리고 서있던 성현이 입을 열었다.
“늦지 않게 도착했네.”
“놈들에 대한 단서라도 찾은 건가?”
“그래, 최근 확보한 정보에 따르면 천하 길드의 헌터들이 곧 인천항에서 나타날 거야.”
“잠깐, 뭐……? 그건 말도 안 돼.”
황당하다는 듯한 진서연의 반응이 돌아왔다.
성현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도 그럴게 다른 장소도 아닌 백룡 길드의 지배 구역이다.
십 여 년 전에도 중국 놈들이 이 곳을 차지하기 위해 덤벼들었다가 진서연과 백룡 길드에게 깨진 것이었고.
그 이후로도 천하 길드에 대해 신경 쓰며 인천 지역을 완전히 틀어막아둔 덕에 수차례 충돌해 진출을 좌절시킨 그들이었다.
당연히 자신들이 관리하는 지역에서 문제가 발생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가 어딘지 잊은 건 아니겠지?”
“그래, 잘 알고 있지. 그거야 조금만 기다려보면 알 거고… 아, 마침 선물이 하나 도착했네.”
가까이 다가온 기척이 느껴지자 성현은 반가운 기색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둑한 그림자 속에서 스륵 나타난 다크엘프, 카론.
다가온 그는 짊어지고 있던 남자를 내동댕이치며 성현의 앞에 내려놓았다.
“컥……! 으으윽…….”
단단한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남자가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냈다.
청성 길드의 헌터나 수뇌부가 아닌 일반인 직원을 납치해온 카론.
남자는 머리에 자루를 씌워진 채 공포에 덜덜 떨고 있었다.
“보아하니 헌터는 아닌 모양인데. 이 녀석은 뭐지?”
“개인적으로 볼 일이 있어서.”
“…네가 일반 직원한테?”
“그래.”
성현은 청성의 일반 직원들과는 두루두루 문제 없이 지낸 편이었다.
일반적인 기업이라면 존재했을 임원들도 헌터 길드에선 고위직 자리엔 온통 헌터들 투성이였고, 덕분에 일반인 신분으로선 자기보다 위에 있는 이도 얼마 없었다.
물론 부서들 사이에서도 팀장이나 실장급끼리 알력 다툼이 있긴 했다.
하지만 성현은 맡았던 부서 특성상 그런 사내 정치질이고 뭐고 현장에서 바삐 뛰어다니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성현에게도 단 한 명에게 있어서만큼은 예외였다.
콰악!
카론이 남자의 자루를 벗겼고,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갑작스러운 빛에 눈가를 찌푸린 자산압류팀 팀장, 오재완이 초췌한 몰골로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
그는 성현과도 구면인 사이였다.
물론 오재완은 전혀 그 사실을 몰랐지만 말이다.
‘이… 이게 무슨……!’
자신의 앞에 서있는 두 사람을 본 오재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백룡의 길드장인 진서연, 그리고 이지스의 길드장인 영왕까지.
그야말로 엄청난 거물들이 나란히 앞에 선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오재완으로선 도저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난데없이 길드 본사가 습격당하고, 홀로 붙잡혀와 길드장들의 앞에 내팽개쳐지다니.
평소 냉정함을 잃은 적이 거의 없는 그로서도 제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그 자리에서 죽인 것도 아니고… 나를 대체 왜 잡아온 거지? 그럴 이유가 전혀 없을 텐데?’
물론 그가 이끄는 청성의 자산압류팀은 강남 지역 내의 어지간한 사람들은 이름만으로도 벌벌 떨 정도로 악독하기로 소문이 나있었다.
하지만 팀장인 오재완이나 팀 전체나, 그저 청성이라는 이름을 뒤에 업고서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순리를 따를 뿐.
정작 청성 내에선 아주 큰 비중이 있는 부서는 아니었다.
길드에 책잡힐 게 있는 일반인이나, 헌터라 하기도 뭐한 잔챙이들의 재산을 가차 없이 탈탈 털며 압류할 뿐.
이런 거대 길드나 거물급 헌터들과는 엮일 일 자체가 아예 없는 부서였다.
길드 내의 핵심 정보를 접하는 부서도 아니고, 굳이 이렇게 자신을 따로 붙잡아올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저… 저 같은 놈을 왜…….”
숨막힐 듯한 분위기 속에서 오재완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그러자 성현은 한 발자국 다가가 말했다.
“너희 일이라는 게 다 그렇잖아. 온갖 곳을 들쑤시고 다니니 이래저래 원한도 많이 사고. 물론 너야 청성이 뒤에 있으니 아무도 건드릴 생각을 못했겠지. 너도 그런 걱정 따위 없이 맘 편히 살아왔을 테고.”
“그… 그게 대체 무슨…….”
오재완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더듬거렸다.
성현은 그러거나 말거나 진서연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깐이면 돼. 자리 좀 비워주겠어?”
“무슨 사연인지 재밌어 보이긴 한다만… 뭐, 비워줄게. 즐거운 시간 보내라고.”
피식 웃은 진서연이 밖으로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러자 어두컴컴한 폐건물 안에는 그들만이 남게 되었다.
“제… 제발 목숨만은…….”“왜 그래. 알거 다 아는 사람들끼리.”
성현의 입가에 피식 미소가 지어졌다.
달그락!
성현은 아무런 말없이 자신의 가면을 벗었다.
그동안 길드에서 아무리 알아내려 해도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이지스 길드장의 정체다.
허나 영왕의 뼈가면이 벗겨지자, 그 아래론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 드러났다.
“어때. 내 얼굴 기억하겠어?”
“다, 당신… 아니, 너는……!”
휘둥그레진 오재완의 눈.
그는 그제야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고, 곧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 * *
“이런 젠장!”
콰아아앙!
청성의 최고 간부, 유은하는 반파되어있던 벽을 걷어차 완전히 무너뜨렸다.
요란하게도 화풀이를 한 유은하였지만 그러고도 화가 풀리진 않았다.
“우릴 앞에 두고도 뒤에선 이따위 짓을 벌일 여유가 있었나보네. 그 건방진 새끼가.”
성현을 떠올린 유은하가 이를 빠득 갈았다.
백룡과의 협상장에서 벌어졌던 싸움이 끝나고.
급히 청성의 본사로 돌아온 그녀를 반긴 것은 불길에 휩쓸려 전소된 건물의 잿더미였다.
정체 모를 습격자들의 기습을 당한 탓이었지만, 이런 짓거리를 누가 벌인 짓일지야 안보고 뻔했다.
“그러게 그 자리에서 그냥 죽여 버리는 건데! 젠장!”
청성의 자산과 재력은 국내 최고 수준이었고, 어차피 건물이야 다시 세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먼저 물러난 것도 모자라 연달아 엿을 먹은 꼴이 되자 그녀의 자존심이 완전히 구겨지고 말았다.
그리고 최고 간부인 김필환이 당한데다가 본사가 통째로 날아가며 길드 차원의 손실도 분명했다.
이번 기습으로 인해 본사에 있던 청성의 모든 내부 자료들이 모조리 날아가 버렸다.
습격자 놈들은 마치 본사 내부의 구조를 알고서 찾아오기라도 한 듯, 중요한 서류와 데이터들을 가장 우선적으로 불사르며 날려버렸다.
덕분에 당분간 행정력에 큰 공백생기는 데다, 모든 길드 업무에 지장이 생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울의 절반을 차지한 거대 길드답게, 청성은 단순히 몰려다니며 무력만을 투사하는 집단이 아닌 만큼 이번 일로 입은 타격이 상당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화가 나는 것은 당장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었다.
“한인호 그 녀석은 이 꼴을 보고도 가만히 있으라고 하다니… 으아아악! 그 자식, 반드시 내 손으로 죽여 버리겠어!”
* * *
덜컹!
굳게 닫혀있는 드럼통이 바다로 빠졌다.
헌터들이 흔적을 지우는 데 사용하는 수단으로는 폐쇄 직전의 던전 만한 게 없었지만, 이런 고전적인 방법도 여전히 애용이 되어왔다.
어찌되었건 일처리를 끝낸 성현은 피 묻은 손을 씻어냈다.
“이제 다 끝난 건가.”
비스듬히 벽에 기댄 성현이 중얼거렸다.
카론이 벌인 이번 습격으로 청성의 본사 건물이 통째로 불태워졌다.
그 과정에서 자산압류와 관련된 청성이 걷어야 할 채무에 대한 자료들도 모조리 태워지게 되었다.
즉, 성현과 청성과의 채무 관계가 완전히 지워졌다는 것이다.
“예정보다 훨씬 빠르긴 했지만… 속이 다 후련하네.”
과거 성현을 한순간에 절망 속에 빠뜨렸던 수 십 억 원의 빚.
물론 지금 성현의 재력으로는 수십 억 따위 애들 장난 수준이었고, 조 단위의 재산을 지닌 기업가보다도 한수 위에 있었다.
굳이 길드를 끌어들일 것도 없이 지하 던전 안의 자원 매장량만 따져도 어지간한 국가가 지닌 것 이상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놈들에게 순순히 돈을 뱉어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
성현에게 있어 큰 돈은 아니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번 일의 의미는 과거의 관계를 청산해버린 것에 있었다.
가면을 쓰고서 활동하는 영왕은 여전히 청성과의 대립각을 세울 것이지만, 청성과 이성현 사이의 연결점을 이로서 완전히 끊어낸 것이다.
‘한인호가 고작 나 같이 해고당한 일반 직원 하나를 기억에 담아둘 리도 없고. 그나마 내가 빚을 지고 있다는 관계에 대해 기억할 수 있을 자라면 오재완 뿐이었어.’
오재완은 실장직을 맡던 성현의 이름을 알고 있었던 데다가, 난입했던 그의 부하 직원들을 직접 쥐어패주며 트러블을 일으키기까지 했었다.
덕분에 직접 오재완에게 찾아가 신경전까지 벌였으니, 놈이 자신의 빚을 잊지 않고서 기억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오재완까지 깔끔하게 처리한 것이다.
이것으로 청성 길드에서 ‘성현’을 찾아올 일은 완전히 없어진 셈이었고, 영왕이 아닌 성현으로서의 안전이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확보된 셈이다.
“어때, 재미 좀 봤어?”
성현의 뒤편에서 들려온 목소리.
잠시 자리를 비웠던 진서연이 안으로 들어왔다.
“일은 다 끝난 것 같길래. 그나저나 소식 들었어. 수완이 제법인데.”
진서연이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성현이 청성의 본사를 통째로 불태워버렸다는 걸 그녀도 방금 전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심지어 습격을 받은 것은 본사뿐만이 아니었다.
다크엘프들 일부가 움직여 비교적 취약한 청성의 각 지역 거점들까지 곳곳을 습격해 난장판을 만들어놓았고, 그로 인한 피해도 결코 적지 않았다.
물론 청성의 본대가 뒤늦게 카론을 비롯한 이지스의 길드원들을 어떻게든 잡으려 추적해왔지만.
지금 성현의 옆에 카론이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강남 지역 안에선 이미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뒤였다.
강남 지역 내 던전과 통로의 존재를 모르는 청성의 헌터들은 당연히 카론을 찾을 수 없었다.
최근 생겨났던 새로운 통로 덕에 오재완을 챙기고서 청성의 구역을 빠져나오는 것도 훨씬 쉬웠으니 말이다.
“정확히 청성의 약점만을 찌른 데다가, 그 정도 인원을 움직였는데 한 명도 잡히지 않고서 빠져나왔어. 거의 내부자 수준의 정보가 있지 않는 이상 나도 흉내내지 못할 정도란 말이지.”
“그야… 좋은 정보처를 하나 마련해뒀거든.”
“후후.”
자신을 바라보는 진서연의 눈빛이 꽤나 노골적이었다.
그가 청성 간부진 안에 쓸 만한 내부자를 심어놓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실상은 누군가와 내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현 자신이 청성의 내부자였기에 알 수 있던 사실이었던 거지만 말이다.
“어찌됐든 이제 움직이지. 이것 때문에 여기 온 건 아니니까.”
터억!
성현은 기대놓았던 검을 챙겨 들었다.
정보처를 마련해두었다는 방금의 말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제부터 활약할 건 흑련에게서 전달받은 정보였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