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빈집털이 (2)
거대 길드 간의 싸움이 끝난 자리.
미처 도망가지 못한 잔당들은 그림자 군단의 괴수들이 도시 곳곳을 누비며 빠르게 정리했고, 특히 천하 길드의 헌터들은 단 한 놈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숨통이 끊어졌다.
청성이 물러나면서 상황은 빠르게 마무리된 것이다.
물론 상황이 마무리 되었으니 현장을 정리할 겸 양 길드장이 마주해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었다.
“어찌 됐건… 덕분에 살았다는 말은 해야겠네.”
옆에 선 진서연이 입을 열었다.
생각지도 못한 천하 길드의 개입으로 곤욕을 치렀던 백룡이었으나, 이지스가 딱 좋은 타이밍에 끼어들어준 덕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죽을 뻔 했던 자신도 포션 덕에 목숨도 건졌고.
인정할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들은 어디서 구한 거지? 해외에도 이 정도의 물건이 있다는 건 들어보지 못했는데.”
“그래? 우리 집엔 넘쳐나던데.”
“그건 또 무슨…”
“자, 받아.”
타악.
성현은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잔뜩 꺼내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포션들을 건네받은 진서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공간 능력도 가지고 있는 거였… 아니, 이 정도 물건을 그냥 주려는 건가?”
이 만한 효과의 포션이라면 값어치 굉장할 것은 물론, 전 세계 어디에서도 수요가 엄청날 것이다.
헌데 거래도 아니고 아무런 대가도 없이 넘겨줄 줄이야.
허나 정작 성현은 별 감흥도 없는 듯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넘쳐난다고 했잖아.”
그의 입장에선 굳이 아낄 것 없는 탓이었다.
리치들이 합류하고 마나의 맥을 손에 넣은 이후, 그의 인벤토리 창엔 이 만한 성능의 포션도 넘쳐나고 있었다.
당분간 청성과 천하 길드의 전력을 분산시킬 중요한 역할을 맡아줄 것이었기에, 이런 최상급 포션 정도는 얼마든지 건네줄 수 있었다.
“셴룽을 베었으니 천하 길드에서 나를 노릴 테니까.”
“너도 알고 있었군. 한 번 틀어지면 아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녀석들이지.”
십 여 년 전 인천에 진출하려고 했을 때 진서연에게 당한 뒤, 포기도 하지 않고서 몇 번이나 복수를 하려든 천하 길드다.
물론 그 이후, 인천 지역을 꽉 잡게 된 백룡 길드라 외부에서의 접근을 완전히 차단해버리긴 했지만.
설마 국내의 9대 길드 중에서 미쳐가지고 해외의 거대 길드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들이 생겨날 줄이야.
“한인호 그 자식은 분명 우리를 공격하도록 내버려두겠지.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 할 거야. 한 번 외국 길드를 끌어들인 이상 그 다음 목표가 자기들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을 거고. 그때까진 최대한 피를 흘리지 않고 싶어 하겠지. 순순히 물러났던 것도 그 때문일 거야.”
“뭐… 괜찮아. 어차피 놈들이 덤벼들지 않아도 내가 찾아가서 잡아줄 생각이었으니까.”
“그런 소리는 마음에 드네. 웬 가면을 뒤집어쓰고 다니길래 이상한 컨셉이나 잡는 관심종자인가 했더니.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진서연이 성현을 이리저리 바라보며 말했다.
여전히 가면 속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긴 했지만, 중국 길드와 앙숙인 그녀답게 꽤나 호의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아무튼 당분간은 손을 잡아야겠네. 어차피 나중 가서 뒤통수나 노릴 사이끼리 동맹이니 뭐니 운운하는 걸 그리 좋아하진 않다만…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난 누구 뒤통수 같은 거 안 쳐.”
“내 경험상 너처럼 말하는 놈들이 제일 위험한 놈들인 건 확실해.”
“하하…….”
정곡을 찔린 성현이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청성이나 적들의 뒤통수를 치고 등 처먹는 행위 자체를 아주 좋아하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먼저 검을 들이민 것도 아닌 상대에게 굳이 뒤통수를 칠 생각은 없었다.
어찌되었건 성현이나 진서연이나 서로 돌아가는 판도나 이해관계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었고.
서로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협력 관계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겉으론 그대로여도 사실상의 동맹 관계가 구축된 것이다.
“이제 너흰 어쩔 셈이지? 김진욱 그 녀석도 보기만큼 멍청하진 않은지, 태산과 화신이 박 터지고 싸우고 있고. 마음 같아선 당장에 한인호의 목을 따러가고 싶지만 섣불리 청성을 치기보다는 중국 놈들의 움직임을 먼저 보려고 하는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천하의 헌터들이 곧 국내로 잔뜩 밀고 들어올 테니까.”
청성과 싸우는 도중에 숨어든 중국 녀석들에게 뒤를 얻어맞는 건 사양이었다.
일단 어느 정도의 움직임을 보이는 지 파악을 해야 했고, 국내에서 설치지 못하도록 놈들의 기를 한 번 죽여 놓을 필요도 있었다.
거기다 지금 성현에겐 흑련 길드에게서 받아든 정보들이 있었다.
‘예상대로 고급 정보들을 잔뜩 쥐고 있었어. 흑련을 우선 끌어들이길 잘 했지.’
서울 전역의 암시장을 꽉 잡고 있는 흑련 길드답게 서울로 흘러들어오는 것이라면 검은 돈과 밀수품, 그리고 미등록 헌터들까지 가리지 않고서 온갖 정보들이 들어왔다.
자연히 천하의 헌터들이 국내로 들어오는 경로에 대해서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곧 저쪽에서 선물이 하나 도착하겠군.’
* * *
콰득!
서울 강남 지역 중심부에 위치한 청성 길드의 본사.
섬뜩한 소리와 함께 길드원의 시체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커억……!”
기척도 없이 날아드는 칼날.
여느 때와 같이 근무를 서고 있던 길드원들은 순식간에 암살을 당하며 하나둘 쓰러지고 있었다.
습격을 당하고 있다는 것조차 한참 동안 알지 못한 그들이었고, 뒤늦게서야 널브러져 있는 시체를 발견하고서 본사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제… 젠장! 이 놈들은 뭐야!”
“크아아악!”
서걱!
길을 막아선 청성의 헌터들을 단숨에 베어버리는 습격자들.
얼굴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복면을 쓰고는 있었지만, 청성의 정식 길드원들조차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뛰어난 실력자들이었다.
애초에 대범하게 청성을 공격해올 정도의 자들이라면 국내 전체로 따져도 몇 곳이 되지 않았다.
“놈들이 눈치를 챘군. 증원이 오기 전에 서둘러 처리한다.”
복면의 입가를 슥 내린 카론이 수하들에게 말했다.
청성을 공격한 침입자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군단의 마족, 다크 엘프 일족이었다.
화신 길드가 이지스의 뒤를 노리고 대대적인 움직임을 보이자마자, 싸움을 거들던 카론은 즉시 성현의 명에 따라 전장을 이탈하며 움직였다.
성현의 군단은 역소환이 되면 던전으로 돌아가고, 던전은 강남 지역에 위치한 성현의 집과 연결이 되어 있으니 아주 빠른 움직임이 가능했다.
즉, 바로 청성의 중심부를 노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한인호를 비롯해 대부분의 S급 전력은 백룡 길드와의 협상장에 향한 참인데다가, 설마 본사가 공격받을 거란 생각은 하지도 못했기에 최소한의 전력이 남아있을 뿐.
대부분은 현장에 나가있는 지라 일반 헌터들의 수 자체도 많지 않았다.
덕분에 청성의 본사를 습격한 카론은 휘하의 다크엘프들과 함께 순식간에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콰아아앙!
그때, 사방으로 터져 나온 크고 작은 벽의 잔해들과 함께 나타난 헌터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커다란 창을 들고 있는 거구의 남자.
본사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청성의 최고 간부이자 S급 전력 중 한 명인 김필환이었다.
“이지스의 떨거지 새끼들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콰아아앙!
김필환은 다짜고짜 자신의 커다란 창을 휘둘렀다.
가장 앞에 서 있어 반경 안에 든 다크엘프 두세 명이 순식간에 당해 튕겨져 나갔다.
분명 무기를 들어 막았음에도 말도 안 되는 괴력 탓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다크엘프들.
반경이 좁은 실내에서 휘둘러대는 커다란 창에 S급 헌터의 괴력까지 더해지자, 미처 피할 곳도 마땅치 않은 굉장히 위협적인 공격이 되었다.
“저 녀석이 최고 간부라는 녀석인가.”
“어차피 죽은 목숨 어줍잖게 도망갈 생각 따윈 말아라. 내 손으로 모조리 죽여줄 테니까.”
김필환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그는 겁도 없이 청성의 중심 구역에 발을 들인 이지스의 침입자들을 모조리 죽여 놓을 생각이었다.
본사의 헌터들보다도 습격에 대해 먼저 눈치 챈 한인호가 이 곳을 향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고, 다른 주변의 청성 지부와 산하 길드들에게도 일제히 연락이 주어졌다.
청성의 구역 끝자락도 아니고, 범의 아가리 속으로 스스로 발을 들인 이상 놈들이 도망칠 수 있을 가능성 따위는 없었다.
후우우웅!
전진하며 무자비한 김필환의 창이 다시 한 번 휘둘러졌다.
하지만 그의 창이 그 뒤편에 있던 카론의 목을 향해서도 날아들던 순간, 정면에 있던 카론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김필환조차도 순간 눈으로 쫓지 못했을 만큼 빠른 움직임.
그리고 바로 옆에서 섬뜩한 살기가 느껴졌다.
쩌어어어엉!
“크윽……!”
김필환은 급히 몸을 틈과 동시에 창을 휘둘러 공격을 막았다.
허나 상대가 보였던 매우 빠른 속도에 더해, 실려 있던 힘은 방금 부딪힌 게 작은 단검이라곤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지스의 간부인가?”
김필환의 인상이 팍 찌푸려졌다.
순식간에 쓸어버리려던 방금의 기세는 잠시 죽이고서, 최소 S급 이상 전력의 등장에 다소 신중해진 그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확히 상대가 어떤 녀석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는 하나같이 겉으로 드러난 활동 기간이 길지 않은 이지스측 간부들의 특징 때문이었다.
청성과 적대하며 여기저기 요란하게 휘젓고 다닌 영왕이나, 오래 활동하다가 투항한 한승희 정도는 알려진 게 많다 해도.
나머지는 정말 얼굴 한 번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정체불명의 헌터들이다.
그나마 S급 헌터를 부수며 데뷔했던 이즈나나 로칸에 대해선 이래저래 알려졌다고 하나, 아예 몇몇은 전투 방식조차 알려지지 않아 이명조차 붙지 않았을 정도였다.
지금 복면을 걸터 쓰고 있는 저 남자도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이였고.
그저 암살 계열의 헌터라는 것밖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
터엉!
그 때, 먼저 발을 박차고 움직인 것은 김필환이 아닌 카론이었다.
김필환은 이미 헌터로서 활동한 지 9년 차가 넘는 자였고, 그만큼 외부에 알려진 것도 많았다.
즉, 김필환은 카론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상태지만 카론은 김필환의 전투 방식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콰드득!
“컥……!”
반사적으로 창을 휘두른 김필환의 틈을 정확히 파고든 카론의 날카로운 움직임.
카론의 단검은 순식간에 김필환의 목을 향해 꽂혔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김필환의 눈동자.
자신의 강점을 살린 카론은 비교적 속도에 약한 김필환의 전투 방식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괜히 성현이 카론을 이 곳에 보낸 것이 아니었다.
쿠웅!
죽어버린 김필환의 시체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단검을 한 번 털어낸 카론은 차가운 시선을 바로 옆으로 보냈다.
콰아아아앙!
발길질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박살난 문짝이 나뒹굴었다.
“으, 으아악……!”
그러자 방 안에 있던 남자는 뒤로 벌러덩 넘어진 채 벌벌 떨었다.
청성의 자산압류팀 팀장 오재완.
그는 자신의 앞에선 카론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여기 있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