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빈집털이
성현은 마주한 한인호를 바라봤다.
가면을 쓴 성현은 수차례 청성과 대립해오며 맞서왔지만,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마주대고서 한인호를 상대하는 건 처음이었다.
청성에 몸을 담고 있던 자신을 가차 없이 버리고 내쫓은 장본인이자, 이 모든 상황의 근본적 원인 중 하나인 남자.
단순한 해고가 아닌 누명을 뒤집어쓰고 거액의 빚까지 지게 된 성현이었다.
만약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능력의 각성이 아니었으면 성현의 인생은 지금쯤 빚더미에 짓눌린 채 밑바닥까지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물론 청성에서 내쳐지고 능력을 각성한 덕에 단순히 복수만을 위해 힘을 기르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의 목표를 바라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들에 대한 것들을 내려놓을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9대 길드 중 가장 첫 번째로 부수고 싶던 건 바로 청성이었고, 뒤통수를 맞고서 그냥 넘어갈 만큼 성격이 좋지는 못했다.
“…저 자식 뭐 하는 거야?”
“직접 싸우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대범하게도 성현은 스스로 가장 앞에 서 한인호에게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유일한 S급의 네크로맨서로 알려져 있는 영왕이었고 어지간한 근접 계열 헌터들 이상으로 강할 거야 뻔했다.
하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언데드와 소환수를 앞장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길드장인 한인호를 상대로 직접 싸움에 끼어드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물론 여기엔 자존심의 문제도 있기에 한인호의 뒤편에 있던 길드원들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
앞으로 불쑥 뛰쳐나온 남자가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그대로 얼려 주지.”
콰지지지직!
성현을 향해 강력한 냉기의 폭풍이 불어 닥쳤다.
날카로운 바람과 가공할 만한 새하얀 한기가 전방을 휩쓸었다.
양측의 시야가 잠시 차단될 정도의 위력.
청성의 최고 간부이자 S급의 마법계 헌터가 쏘아낸 냉기 마법이었다.
허나 그 새하얀 후폭풍 속, 성현의 팔이 불쑥 튀어나왔다.
콰직!
성현의 주먹이 얼굴에 내다꽂혔고, 마법을 쏘아냈던 청성의 간부는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며 쓰러지고 말았다.
미처 반응조차 하지 못할 정도의 속도와 위력.
냉기 마법을 그저 맨몸으로 받아버린 채 정면에서 나타난 성현이 S급의 전력 하나를 쓰러뜨려 버린 것이다.
“저… 저 정도 위력의 마법을 맨 몸으로 받아 내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 광경에 헌터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방어 특성을 두르고 있을 직업군도 아니고, 마법 계열의 헌터가 저만한 위력의 마법을 아무런 방어도 없이 받아낸 것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상처 하나 없는 성현의 몸.
군단 특성으로 얻은 50%의 냉기 저항력과 추가 생명력에 더해, 마법 저항 효과를 지니고 있는 [용의 비늘] 특성까지 활성화시킨 덕분이었다.
콰아아앙!
“키이이익!”
“젠장! 온다!”
성현을 뒤따라 움직이기 시작한 그림자 군단.
특히나 가장 앞에 선 그의 군주들이 일제히 달려들었고, 청성의 최고 간부들과 뒤엉켰다.
아무리 S급의 헌터들이라 한들 이만한 전력의 보스 몬스터들이 십수 마리가 달려드는 광경은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고, 무지막지하게 들이닥치는 괴물들의 기세에 주춤하였다.
거기다 빌딩이 무너지고 인원이 뿔뿔이 흩어졌던 탓에 이곳에 모인 청성의 일반 길드원들의 숫자는 얼마 되지 않는 반면.
성현에겐 군주급이 아닌 수하들의 숫자도 굉장했다.
검은 그림자를 풀풀 뿜으며 진격해오는 수많은 괴수들.
하지만 기세 좋게 들이닥치던 군단의 앞에 선 여자가 있었다.
콰아아아앙!
정면을 향해 뻗어진 강렬한 빛의 줄기.
기세 좋게 몰려들던 좀비들의 무리 한가운데엔 빛에 휘말려 산화된 시체들과 뻥 뚫려 있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방금의 마법 한 방에 무려 수 백 여 마리의 수하들이 증발해 버렸다.
“피해 다녀도 모자랄 판에 주제도 모르고 내 앞에 나타나다니… 죽고 싶었나 보구나.”
유은하가 앞으로 나서며 싸늘한 눈빛을 보였다.
청성의 최고 수뇌부이자 성녀라는 이명을 지닌 유은하.
그녀의 등장에 성현도 반응했다.
‘나타났군.’
새하얀 빛이 온몸을 감싸고 있는 유은하의 모습.
한인호를 제외한다면 청성에서 가장 큰 골칫덩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성현이 경계하던 여자였다.
단순히 한인호 다음가는 전력이자 3성 중 한 명이었기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앞서 상대했던 도윤일이나 성찬일과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었다.
모든 헌터들에겐 상성의 문제가 있기 마련이었고, 언데드와 함께 하는 네크로맨서의 가장 큰 적은 무엇일지 뻔했다.
빛과 신성력.
그것도 국내에서 가장 강력한 신성력을 지닌 헌터가 눈앞에 있었다.
“키이이익!”
유은하를 향해 들려들던 철갑 거미의 몸뚱이가 살벌하게 녹아내렸다.
단단한 철갑조차 쏟아지는 빛에 녹아내렸다.
신성력의 앞에선 단단함과 경도는 문제가 아니었다.
무기조차 없이 맨손으로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모조리 몰살해 버리기 시작한 유은하.
언데드로선 그녀와 직접 닿은 것만으로 피부와 뼈가 녹아내렸다.
콰아아아아!
“크아아아!”
날아든 빛줄기가 이번엔 그롬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살벌하게 상처를 입은 서리 트롤의 왕 ‘그롬’.
트롤들의 군주답게 강력한 재생력을 가진 군주였음에도, 언데드에게 있어 신성력으로 인한 상처는 결코 아물지 않았다.
때문에 너덜너덜해진 상태의 그롬을 성현은 급히 역소환시켜야 했다.
파앗!
‘역시 성녀를 상대로는 무리인가.’
군주급의 전력이라 해도 엄청난 신성력을 가진 유은하의 신성 마법 앞에선 버틸 수 없었다.
언데드 몬스터나 어둠 속성의 헌터들에게 성녀의 존재는 그 자체로 공포나 다름이 없었다.
네크로맨서인 성현에겐 그야말로 최악의 상성이자 천적이나 다름없었다.
“이대로 모조리 쓸어 주지.”
유은하의 왼손에 새하얀 마력이 일렁였다.
당장에라도 눈앞의 모든 언데드를 가루로 만들어 버릴 기세였다.
“잠깐.”
허나 한인호가 그런 그녀의 어깨를 뒤에서 잡았다.
“…뭐 하는 거야?”
“너무 신을 내고 있는 것 같길래. 저길 봐라.”
한인호의 말에 고개를 돌린 유은하는 흠칫 놀랐다.
어느새 쓰러졌던 백룡의 최고 간부들이 일어서 있었고, 길드장인 진서연까지 부상을 회복하고선 검을 쥐고 있었다.
이미 저들이 지닌 포션의 효과를 직접 눈앞에서 봤던 한인호는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눈빛을 주고 받자 유은하의 손에서 일렁이는 마력이 흩어졌고, 한인호는 성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사사건건 방해하려 드는 네 정체가 궁금하긴 하다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야겠군.”
“기껏 찾아와 줬더니. 도망가는 거냐?”
“마음대로 생각해라. 조만간 다시 보게 될 거다. 그 가면이 벗겨진 채로 말이지.”
그동안 거슬리기 짝이 없던 성현의 존재였고,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두 동강을 내버리고 싶은 녀석이었다.
하지만 한인호는 싸움 속에선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파아아앗!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며 순식간에 청성측 길드원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단순히 눈속임이 아닌 실제로 이동해 감쪽같이 사라진 모습이었다.
“역시 꽁무니를 뺄 출구를 준비해뒀군. 놈들이 하던 짓다워.”
백룡의 길드장, 진서연이 빈정거리듯 말했다.
이 정도의 대규모 공간 이동 마법이라면 보나마나 청성의 최고 간부인 이희재가 벌인 짓이었다.
미리 근처에 자리를 잡고서 대기하고 있던 그가 청성의 헌터들 모두를 불러들인 것이다.
‘미리 양쪽 모두의 좌표를 지정해놓은 것도 아닌데다가, 규모가 크다보니 분명 그리 멀리 이동하진 못했겠지. 하지만 지금 쫒기는 어렵겠어.’
성현이 텅 빈 자리를 바라보았다.
놈들이 준비해둔 곳에 무턱대고 쫓아갔다간 오히려 역으로 함정에 빠져 당할 수 있었다.
청성은 이런 쪽으로는 언제나 신중했고, 큰 싸움에선 혹시 모를 변수에 대비했다.
하지만 그들도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아직 남아있었다.
‘지금쯤이면 도착했겠지.’
시간을 슬쩍 확인한 성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 * *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지지도 않을 싸움에 끝까지 하지도 않고 먼저 물러나다니.”
유은하가 한인호에게 따지듯 입을 열었다.
그녀는 무슨 상황에서든 등을 보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방금 놈들의 전력이라면 너도 잘 봤을 텐데. 그리고 만독불침 특성을 지닌 진서연까지 영왕을 거들게 되면 나도 버거워.”
“하, 네가 버겁기는 무슨… 고작 저깟 놈들에게.”
유은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저들을 한참 아래로 보는 듯한 말투였지만, 근거 없는 자신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굳이 지금 내 힘을 다 드러낼 필요는 없어. 저 녀석들 정도에 전력을 드러내기엔, 진짜 적은 안이 아니라 바깥에 있으니까. 뭣보다 녀석이 직접 나타나준 데다 셴룽까지 처리해준 덕에 상황은 더 좋아졌지.”
한인호가 말했다.
원래의 계획대로 진서연을 제거하고 백룡을 무너뜨리는 데엔 분명 실패한 건 맞았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되려 굉장히 유리해진 상황이었다.
정반대에 모든 전력을 끌고 오느라, 텅 빈 이지스 길드의 후방 지역은 지금쯤이면 화신과 태산 길드에게 모조리 집어삼켜지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 천하 길드의 대간부, 셴룽도 놈의 손에 죽었다.
“대간부가 죽었는데 놈들의 성격상 가만히 있을 리는 없겠지.”
이미 길은 청성이 한 번 터주었으니, 중국에선 복수를 위해 추가로 더 많은 인원의 헌터들을 보내올 것이다.
잠깐 협력 관계를 맺긴 했어도 어차피 마지막에 가선 자신들과 검을 겨눌 사이에 불과하다.
지금은 저들과 실컷 싸우게 내버려두고 서로 전력을 깎게 만들어 놓으면 되었다.
오히려 지금으로선 이지스나 백룡 길드가 많이 버텨줄수록 좋았다.
끝에 가선 자신이 처리할 천하 길드의 전력을 깎아 먹어주는 걸 테니까.
한인호가 굳이 모든 전력을 드러내지 않고 순순히 물러난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철컥!
한인호는 만족스러운 듯 검을 집어넣었다.
허나 그런 한인호를 향해 직원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예상 밖의 소식이 들려온 탓이다.
“대, 대표님! 큰일입니다!”
“무슨 일이지?”
“태산 길드와 화신이 충돌했습니다! 벌써 길드간 전면전 양상으로 강북과 경기 북부 지역 곳곳에서 확전이…….”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난데없이 그 둘이 왜 싸움을 하고 있어?”
유은하가 소리치며 직원의 멱살을 쥐어 잡았다.
물론 한인호 역시도 난데없는 소식에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다.
지금쯤이면 서로 경쟁적으로 이지스를 공격하고 있어야 할 길드들이 서로 싸우고 있다니.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그 전에 협상에 지지부진 하긴 했어도 결코 서로 싸울 관계나 상황이 아니었다.
“컥, 그… 그건 저도 잘…….”
“잠깐. 설마 그 녀석이……?”
한인호의 눈동자가 흠칫 흔들렸다.
지금 이 상황에 갑작스럽게 화신 길드가 공격할 이유라면 하나뿐이다.
만약 청성과 화신의 관계, 그리고 천하 길드와의 연결 고리에 대한 정보가 새어나간 것이라면 태산의 김진욱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태산을 가장 앞에 내세워 이지스를 밀어낸다는 이전의 계획조차 어그러지는 꼴이다.
하지만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설마 영왕 그 놈이 직접 여기까지 내려올 수 있던 이유가, 처음부터 이럴 걸 예상하고 있던 거라면…?’
이지스는 태산과 화신 길드에게 발목을 붙잡히고, 백룡은 자신들이 처리하기 위해 직접 나섰다.
이런 와중에 누군가가 서울로 올라와 자기들을 공격할 거란 생각은 당연히 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방금 이지스의 발목을 붙잡고 있어야 할 두 길드가 충돌을 했다는 소식이 방금 들어왔고.
그렇다면 뒤가 텅 비어있는 것은 이지스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었다.
“이런 젠장……! 당장 길드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