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전세역전 (3)
“큭… 제길.”
상처 입은 진서연이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론 이미 무력화당하거나 쓰러진 백룡측 최고 간부들이 있었다.
“그래도 제법이군. 내 독을 무력화시켰다곤 해도, 검제라는 이명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특히 마지막 수는 꽤나 날카로웠어.”
한인호는 뺨을 타고 흘러내린 피를 슥 닦아 내며 말했다.
그의 뒤편으로는 청성의 최고 간부들이 모여 서 있었다.
독을 완전히 무효화시키는 그녀의 상성 덕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팽팽하던 둘의 승부였다.
하지만 청성의 최고 간부들이 속속들이 합류하며 상황은 뒤바뀌었다.
양쪽 최고 간부들 모두 두 길드장이 맞붙었다는 소식에 모여든 것은 마찬가지.
허나 백룡 길드의 최고 간부들은 난입한 중국의 간부격 헌터들에게 발목을 붙잡히거나 피해를 입은 탓에 제대로 합류하지 못했다.
그런 반면, 그들로부터 자유로웠던 청성의 헌터들은 싸움을 천하 길드에게 맡겨 두고서 한인호가 호출한 장소를 향해 빠르게 달려올 수 있었다.
덕분에 백룡 길드보다 먼저 개입하고, 수적으로도 우위를 점하며 이런 결과의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다.
뒤늦게 합류한 백룡 길드 측의 S급 전력은 대부분 무력화되었고, 용케 버텨 낸 길드장 진서연도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검을 아래로 늘어뜨린 한인호는 그녀에게 한 발자국 다가왔다.
“결국 시간을 끌어 보겠다는 작전은 실패한 것 같군. 차라리 틈이 생겼을 때 달아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얼굴도 모르는 녀석에게 도박수를 걸어 보기엔 천하 길드를 너무 우습게 봤어.”
“우습게 보는 건 내가 아니라 네놈이겠지.”
“흠?”
“나 하나 치우자고 저 중국 놈들을 끌어들인 건 아닐 테고. 무슨 꿍꿍이속인지는 모르겠다만… 네가 뭘 꾸미건 간에 저놈들은 시작에 불과해. 한번 개입이 시작된 이상 어떻게든 기회를 놓치지 않고서 한국 통째로 먹어치우려 들 거야. 천하 길드든 다른 놈이든 간에 말이야.”
많은 사람들이 국내의 헌터 업계에서는 9대 길드 간의 경쟁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훨씬 거대한 적들이 국경 밖에 존재했다.
그동안 9대 길드가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마냥 뒤를 생각하지 않고서 들이박지 못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고서 잠깐의 승리를 쟁취해 낸다고 해도, 손실을 입은 그 틈을 파고 들어올 외국의 길드들에게 빼앗긴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니 말이다.
아무리 9대 길드 간의 사이가 나쁘다 해도, 해외의 거대 길드들이 끼어들려 한다면 모두의 칼날이 그리로 향할 것이었기에.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거대 길드들이 아직까진 국내를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불문율은 오늘 깨지고 말았다.
“그건 걱정 마라. 내가 놈들까지 모두 깨부숴 줄 테니.”
“이 멍청한 자식이… 너 하나가 뭘 한다고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청성이 국내 최고 수준의 길드라곤 해도 해외의 거대 길드들과 비할 수준은 아니었고, 그 규모 차이는 매우 컸다.
하지만 한인호는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네 말 정도에 흔들릴 거라면 시작도 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야 없지. 오히려 9대 길드 타령이나 하면서 갈기갈기 찢겨져 있기에 힘이 약한 것…….”
콰아아아앙!
한인호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 갑작스럽게 요란한 폭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예 건물 하나가 기우뚱 무너졌고, 잔해 더미와 뿌옇게 피어오른 흙먼지 속에서 가면을 쓴 남자가 나타났다.
“이렇게 직접 마주하기까지 오래도 걸렸네. 한인호.”
“네놈은…….”
이즈나와 로칸 등 이지스의 간부들과 함께 나타난 영왕.
뱀파이어와 웨어울프 등 이지스의 헌터 수백여 명과 함께 요란한 등장을 선보인 성현이었다.
“너희는 천하 길드가 상대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래, 그렇지 않아도 막 처리하고 오는 길이야.”
“네가 셴룽을 처리했다는 거냐……?”
“그게 정말이라고?”
한인호는 물론, 진서연마저도 놀란 듯한 반응을 보였다.
셴룽과 함께 난입해 온 많은 수의 S급 헌터들은 물론 천하의 대간부는 9대 길드의 길드장이라 해도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예상 이상이지만 잘됐군. 결국엔 녀석도 내가 처리할 상대였으니 미리 힘을 빼준다면 좋지. 그렇지 않아도 넌 내 손으로 처리하고 싶었던 참이다.”
그동안 문제들을 일으키며 청성 길드를 쉴 새 없이 귀찮게 만든 영왕의 행보.
그의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리가 없었기에, 직접 가면을 벗기고 숨통을 끊어 줄 생각이었다.
그런 한인호의 말과 함께 청성의 최고 간부들이 우르르 섰다.
이지스의 간부는 네 명이 전부였고, 청성과는 S급 전력의 숫자 차이가 상당했다.
제 3자의 시선인 진서연이 봐도 승산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 순간.
쿠구구궁!
“키이이이익!”
보스 몬스터들이 성현의 뒤편에서 하나둘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강력한 기운을 뿜어 대는 군주들의 등장에 청성의 헌터들마저도 깜짝 놀란 눈치였다.
“…천하의 헌터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이제야 알겠군. 하지만 이만한 수를 모조리 이끌고서 오다니. 등 뒤는 어쩔 생각이지? 길드 구역을 내팽개치고서 온 덕에 지금쯤이면 쑥대밭이 되어 있을 텐데.”
“글쎄, 너희의 등 뒤라고 상황이 그리 좋아 보이진 않은데.”
“그게 무슨 소리지?”
“곧 알게 될 거야. 물론 나와 이 자리에서 결판을 낸 뒤에 말이야.”
스릉!
성현은 검을 뽑아 들었다.
“너하곤 나눌 이야기도 좀 있고.”
* * *
강북 지역의 지배자인 화신 길드.
서쪽에서 일어난 청성과 이지스 길드의 마찰로 인해, 이지스의 뒤가 텅 비어 있다는 소식을 바로 전해 들었다.
그들은 당연하게도 지체할 필요 없이 이지스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움직였다.
태산보다 빠르게 최대한 많은 지역을 차지해야 추후 협상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때문에 화신의 헌터들 수천여 명은 경기 남부 지역을 향해 아래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도중에 너희를 마주칠 줄은 몰랐군.”
앞에 선 최성준이 주위를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남쪽을 향해 내려가던 화신의 헌터들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태산 길드의 헌터들.
그것도 동원된 헌터들의 규모와 숫자가 전혀 화신에게 밀리지 않았다.
“말도 없이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는 거지?”
태산의 길드장 김진욱이 앞으로 나서며 최성준을 맞이했다.
두 거대 길드를 이끄는 대표가 마주한 상황.
“이지스에 대한 소식이라면 너희도 들었을 텐데? 이만한 기회를 가만히 지켜볼 필요가 없지. 너희가 나타난 건 그동안 협상에 지지부진하더니 이제라도 서둘러 마무리하자는 건가? 우리야 딱히 꺼릴 건 없다만.”
“아니, 그 반대다.”
“반대?”
순간 최성준의 표정이 슬쩍 찌푸려졌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가려 하는데.”
“이해가 안 가기는. 널 손봐 주려고 찾아왔다는 거지.”
“하…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거냐?”
“청성과 화신이 비밀리에 손을 잡고, 외국 길드까지 끌어들이는 마당에. 태산 길드가 너희에게 협력을 한다면 그게 더 머리가 잘못 된 거겠지.”
“잠깐, 너는……?”
터억!
갑자기 태산의 길드원들 사이에서 불쑥 나타난 성찬일의 등장에 최성준의 표정이 급변했다.
“넌 영왕에게 죽은 줄만 알았는데… 갑자기 여긴 어쩐 일이지?”
“닥쳐. 이 녀석에게 네놈들의 꿍꿍이는 모두 전해 들었다. 설마 계속해서 시치미를 뗄 생각은 아니겠지.”
태산의 김진욱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청성의 수뇌부이자 3성의 멤버인 성찬일.
그의 위치는 각 길드장들에게도 가볍지 않았고, 그의 발언은 큰 무게감을 얻는다.
청성과 완전히 척을 지기로 한 성찬일이 바로 태산 길드에게 달려간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청성과 화신이 지난 세월 동안 경쟁자로서 다퉈 온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9대 길드의 세력 관계가 고착화되고, 서로 간의 견제 때문에 발목이 잡히게 되자 상황은 바뀌었다.
두 길드장 사이에서 철저히 비밀리에 서로 간의 협력이 약속되었고, 아예 길드를 연합해 국내를 모두 접수하려는 계획을 짜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국내의 양대 길드라 해도 나머지 세력들을 전부 굴복시키려면 많은 희생이 필요한 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외국 길드를 끌어들이려는 것도 바로 이 계획의 일환이었다.
그 끝에 가서는 끌어들였던 외국 길드를 다시 내쫓고, 연합한 청성과 화신 길드를 제외한 모든 협력 세력을 뭉갠 뒤 국내를 하나의 세력권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그들의 목표였다.
이는 양측의 최고 수뇌부들 사이에서나 주고받은 이야기들이었다.
일반 직원들은 물론 대부분의 간부들조차 알지 못했던 기밀이다.
내부자인 성찬일이 태산 길드에게 이 모든 계획을 폭로해 버리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중국의 헌터들이라면 아직 확인된 사안도 아닐뿐더러, 나머지 내용들은 삼류 음모론 수준이군.”
최성준은 터무니없다는 듯 웃었다.
“지금 길드를 뛰쳐나간 배신자의 말을 믿는 건가? 김진욱, 너도 길드장이라면 잘 알 텐데. 다른 길드로 투항한 녀석에게 듣는 내부 소식 따위 신빙성 같은 건 없다는 걸. 넌 이지스 놈들에게 놀아나고 있는 거다.”
“네가 그딴 소리를 할 줄 알고 이것도 가져왔지.”
촤르륵!
김진욱은 건네받은 서류더미와 사진들을 최성준의 앞으로 내던졌다.
방금 그가 말한 사실을 뒷받침할 확실한 물증이었다.
화신 길드와 주고받은 수많은 안건과 물건들 그리고 중국의 헌터들을 조용히 밀입국시켜 온 경로와 방법까지.
“…….”
최성준조차도 말문이 막힐 만큼, 빼도 박도 못할 증거들이 한가득 모여 있었다.
물론 처음엔 길드를 배신할 생각 따윈 없던 성찬일이 이 모든 걸 마련해 둔 것은 아니었다.
태산에겐 익명의 제보자라고만 얼버무려 두었지만, 성현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 흑련 길드가 관련이 있었다.
암시장 길드는 거대 세력에 비해선 약할 수밖에 없는 세력이었고, 중립성을 외친다고 해도 강력한 세력을 상대로 살아남기 위해선 언제나 비상시에 쓰일 카드가 필요했다.
헌데 성현은 그런 흑련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으니 자연스레 그들의 카드 역시 손에 넣게 된 것이다.
“수도권에서의 싸움이 끝나고 나면 당장 나부터 치울 작정이었겠지. 눈엣가시인 파천을 치워 준 건 고맙다만, 나까지 그 멍청한 놈들처럼 이용만 당하다 내쳐질 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김진욱은 등 뒤로 매고 있던 커다란 대검을 뽑아 들었다.
이는 이지스나 백룡과의 관계가 문제가 아닌 태산 길드의 생존을 위한 문제다.
가장 강한 세력 둘이 뭉쳐 있다면 그들부터 쳐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놈들의 꿍꿍이가 드러난 이상 더 이상 대화할 가치조차 없었다.
콰악!
“이딴 식으로 계획을 방해하다니… 멍청한 선택을 한 걸 후회하게 해 주지.”
최성준은 이를 빠득 갈며 검을 쥐었다.
강북과 경기 북부 지역을 차지한 두 거대 길드.
화신과 태산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