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전세역전
두 길드의 협상장 사이에서 난데없이 중국 길드가 현장에 난입하고, 빌딩이 무너지며 난전 형식으로 싸움이 뒤바뀌었던 그때.
또 다른 건물 옥상에서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
뇌제, 성찬일이 싸늘한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성현의 군단에 소속된 간부들뿐만이 아니라, 그 역시도 이곳에 함께 따라온 참이었다.
다만 그는 이곳에서 전면으로 나설 생각은 없었다.
청성 길드의 3성 중 하나였던 그는 혈마법으로 인해 묶여 있는 신세가 되었지만, 청성과 직접 적대하진 않기로 미리 이야기를 해둔 참이었다.
그는 아직 청성에게서 완전히 마음이 떠난 것은 아니었다.
지난 십여 년을 넘게 몸을 담고 함께 키워온 길드였다.
당연히 하루아침에 배신해 등에 칼을 꽂아 넣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애초에 명목상 성현과 이지스의 밑으로 들어오게 된 것도 겨우 자기 목숨 하나 건지자고 투항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이곳에 찾아온 것은 단지 ‘확인’을 위해서였다.
“한인호, 기어코 바깥의 세력까지 끌어들이다니… 이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누구보다 잘 알 텐데.”
성찬일의 눈빛이 일렁였다.
청성의 최고 수뇌부 자리에 있던 성찬일은 다른 방면에 대해서라면 몰라도 외국 길드를 끌어들이는 문제에 한해서만은 결사적으로 한인호의 뜻에 반대하던 자였다.
과거에 먼저 국가를 장악하고 세력을 키운 타 국가의 거대 길드들이 국내로 들어와 깽판을 쳐놓았을 때, 한국에선 게이트가 처음 터졌을 때의 대위기에 버금갈 만큼 휘청거렸다.
청성도 당시 서울 지역을 지킨 길드 중 하나였고, 당시 청성의 일원이었던 성찬일 역시 누구보다 앞장서 그들을 베어내었다.
그동안 한인호가 벌여오는 다른 모든 짓에 대해서 반발을 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도를 넘어섰다.
길드의 근본마저도 부정하는 행동이었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한 만큼… 더 이상 청성에 볼일은 없다.”
창을 움켜쥔 성찬일은 복잡하던 머릿속의 갈래를 쳐냈다.
그가 성현에게 혈마법까지 받아들이며 자신의 목숨을 연장시켰던 이유다.
어차피 죽음이야 받아들이면 그만이지만, 자신이 죽었을 때 한인호가 어떻게 나올지 알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한인호는 성찬일이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오히려 거리낄 것이 없어졌다는 듯 중국의 길드를 끌어들였고.
그 선택을 받아들일 수 없는 성찬일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이성현… 네 뜻대로 움직여 주마.”
파앗!
순식간에 발을 박찬 성찬일은 자리를 떠났다.
그의 역할은 당장 이 전장에서 싸움을 거드는 것이 아니었고, 기꺼이 그들의 심장을 겨눌 수가 되어 줄 것이었다.
* * *
“…주위가 지나치게 소란스럽군.”
천하의 대간부 셴룽이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조금 전부터 사방에서 느껴지는 소란의 규모가 훨씬 커진 듯했다.
“친구라도 부른 건가?”
창을 비스듬히 세운 셴룽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의 앞엔 백룡의 최고 간부 오명석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상당한 양의 피를 쏟아내 백색 코트가 붉게 물든 남자.
진서연의 왼팔 격인 최고위 간부인 데다, 셴룽과도 구면인 사이였다.
당연히 좋은 쪽으로 안면이 튼 사이는 아니다.
‘젠장… 역시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놈이야…….’
인상을 찌푸린 오명석이 복부를 움켜쥐었다.
전투 중 꽤나 깊은 상처를 입은 탓이었지만, S급 헌터의 몸뚱이를 지닌 그였다.
원래대로라면 어지간한 상처들은 물론, 팔 한쪽이 떨어져 나가더라도 싸움이 끝나지 않은 이상 전투를 속행하는 것쯤은 가능했다.
하지만 한번 생긴 상처는 아물 줄을 모르고 출혈이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중국에서 마창(魔槍)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는 셴룽의 S급 특성 때문이었다.
그가 쥔 창에 서려 있는 거무스름한 기운.
저 마의 기운은 상처에서 지속적인 출혈을 강요하는데다가 오히려 경과를 점점 더 악화시켰다.
“대답해라. 다른 세력을 부른 건가?”
셴룽이 뚜벅뚜벅 다가왔다.
주변에 느껴지고 있는 기척들에 대한 답을 얻어낼 작정이었다.
협박하듯 예리한 창날이 오명석의 목 바로 앞에 닿았다.
“좆까.”
물론, 오명석은 아주 간단한 대답을 내놓을 뿐이었다.
그러자 인상을 한껏 찌푸린 셴룽은 자신의 창을 크게 들어 올려 휘둘렀다.
“그렇다면 이만 꺼져라. 백룡의 떨거지와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속이 메슥거리던 참이었다.”
콰아아앙!
요란한 폭음과 함께 쏟아진 흙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그 사이에서 날아든 날카로운 칼날.
셴룽의 코앞까지 다가섰고, 그는 급히 창을 끌어오며 검격을 받아쳤다.
주르륵 뒤로 물러난 셴룽은 흙먼지 속에서 나타난 남자를 바라보았다.
“너는…….”
뼈가면을 쓴 성현이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그는 셴룽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서 오명석에게 다가섰고, 품속에서 포션을 꺼내 건네주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마찬가지로 당황한 오명석이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의식이 흐릿해지던 차였기에 급히 그의 포션을 받아 마셨다.
‘이, 이건……?’
오명석의 상처 빠르게 호전되어 낫기 시작했다.
이즈나가 진서연에게 건네주었던 것과 같은 종류의 포션이었기에, 그 효능은 역시 확실했다.
“네놈… 정체가 뭐지? 내가 입힌 상처를 아물게 하다니.”
셴룽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를 마주 본 성현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 둥둥 떠 있는 퀘스트 마커의 존재.
이번 싸움에 돌입한 순간 시스템은 그에게 새로운 퀘스트를 내주었고, 저 자를 사냥할 이유는 한 가지 더 늘어났다.
“아니… 자세히 보니 알 것 같군. 이지스의 길드장인가? 하지만 이 싸움에 다른 세력이 끼어들 거라고는 듣지 못했는데.”
“나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나?”
“그야 물론이지.”
의외라는 듯한 성현의 반응에 셴룽은 씩 웃으며 말했다.
겉으로 보기엔 관심 없어 보이던 모습과는 달리, 천하 길드는 지난 십여 년을 넘도록 항상 국내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자 성현은 그제야 알 것 같다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청성이 일방적으로 끌어들인 줄 알았더니… 평소부터 우리나라 사정에 관심이 많나 봐.”
“이웃 나라끼리 돕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
최소한 중국과 인접한 주변국가들 중에서 그들의 손에 들어오지 않은 나라는 그리 많지 않았다.
아예 헌터 전력상 중국을 능가하는 러시아 정도의 체급이 아닌 이상에야, 워낙에 공격적인 그들의 공세에 먹혀 버린 게 대부분이었다.
헌데 그들의 바로 옆에 있는 한국은 멀쩡히 자신들의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고, 중국에선 당연히 이를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 따윈 없었다.
셴룽이 국내의 판도를 흔들고 있는 이지스나 영왕의 존재에 대해선 인지하고 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긴 왜 나타난 거지. 주위에서 느껴지는 몇몇 큰 기척은 이지스의 간부들일 테고. 진서연이 너희에게 미리 도움이라도 청한 건가?”
“아니, 딱히 사전에 이야기된 건 아니고. 청성과 원한이 있어서 말이야. 너희는 덤이지.”
이미 화신 길드와 함께 뜻을 맞추기 시작한데다, 경기 북부의 태산 길드는 물론 외국의 길드까지 끌어들이려는 청성의 행보에 인지하고 있던 성현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성현이라 한들 그 많은 적들을 감당해 내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수도권 내에 놈들의 화력을 분산해 줄 세력이 하나쯤은 필요했고, 선택지는 백룡 길드뿐이었다.
그간 딱히 가깝게 교류한 적은 없으나, 공동의 적과 마주한 이상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백룡도 다른 9대 길드가 그렇듯이 등을 맡길 수 있을 만큼 믿을 만한 녀석들은 아니야. 기본적으로 꼭대기에 서기 위해 경쟁하는 입장인 만큼, 협력하던 편의 등에도 언제든 칼을 꽂을 수 있지. 하지만…….’
백룡과 이지스.
사전에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고서 현장에서 바로 협력이 성립될 수 있을 만큼, 두 길드 간의 이해관계 하나는 확실했다.
그렇다면 끝을 볼 때까지 서로를 기꺼이 이용하면 그만이다.
“남의 나라 사정에 괜히 끼어들었다가 피 보지 말고. 너희 나라 안에서나 얌전히 살지 그래?”
“감히 내게 그따위 소리를 하다니. 주제도 모르고서 오만한 건 이 나라 헌터들의 특징인가?”
“그건 누가 봐도 너희 주특기… 아니, 그런 거야 아무래도 상관없지. 너 말고도 상대해 줄 녀석이 많거든.”
츠츠츠츳!
성현의 뒤로 검은 그림자가 뻗어졌다.
거대한 군단을 품고 있는 그의 힘.
그 끝을 알 수 없는 심연과도 같은 어둠과, 안에서 무수히 느껴지는 오싹한 기척들에 셴룽의 입가가 씩 올라갔다.
‘이게 정말 내가 알고 있던 네크로맨서란 말인가? 역시 보통 녀석은 아니었군.’
철컹!
성현의 그림자 속에서 해골 전사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러자 셴룽의 표정이 슬쩍 찌푸려졌다.
“해골 전사?”
그림자를 품고 있는 해골 전사들.
분명 D랭크 던전에나 나올 법한 일반 해골 전사와는 완전히 격이 다른 몬스터였다.
하나 그것도 상대적인 것에 불과할 뿐.
성현이 펼친 그림자 속에서 느껴지던 기운의 크기와 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게 전부가 아닐 텐데? 어줍잖게 시간이나 끌려들지 말고 네 전력을 제대로 보여라.”
셴룽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버티고 있어 봐야 내 수하들이 찾아올 거다. 시간이 갈수록 네겐 불리하기만 하단 소리지.”
물론 셴룽이 말하는 ‘수하’들은 모두가 S급인 간부를 뜻하는 것이었다.
규모상으로는 따라갈 길드가 없는 천하 길드답게, 대간부의 아래에만 두 자릿수의 S랭크 헌터들이 붙게 되었다.
대간부인 셴룽 역시 이곳에 데려온 이들만 최소 스물이 넘어갔고, 지금 전장 내부엔 S급 전력엔 명백한 격차가 있었다.
그들이 파악한 정보대로라면 이지스 길드에 S급 전력은 기껏해야 네다섯이 끝이었다.
협상장에 모인 청성과 백룡의 S급 전력이야 거의 비슷했고.
이지스의 S급 헌터들 모두를 끌고 와봐야 그들에겐 안 된다는 것이다.
차라리 성현의 입장에선 셴룽을 앞에 두고서 승부수를 띄워도 모자랄 판에, 그렇게 시간을 끄는 게 멍청한 짓이었다.
“글쎄, 과연 그럴까?”
성현의 입가엔 여유로운 미소가 지어졌다.
가장 까다로운 한인호를 진서연이 붙잡고 시간을 끌어주는 사이, 수적 열세를 뒤집기 위해 성현은 중국의 헌터들을 빠르게 처리해 주어야 하는 것은 맞았다.
하지만 셴룽의 생각과는 달리, 성현은 굳이 초조해하지 않아도 마냥 서두르진 않았다.
상황의 흐름은 이미 그가 쥐고 있었다.
* * *
콰아아앙!
사방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전투 소리.
거기에 맞춰 날뛰어대는 수많은 몬스터들이 청성과 천하 길드의 헌터들을 공격해왔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후우우웅!
거대한 날개를 펼친 채 도시의 하늘 위로 지나쳐가는 거대한 비룡.
방금까지 날아다니던 와이번들과는 겉모습부터가 완전히 다른 ‘보스 몬스터’의 등장이었다.
그리고 방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천하 길드의 간부가 있었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보스들이 이렇게 쏟아져 나올 수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S급인 간부의 수보다도 많은 보스 몬스터들이 도시 곳곳을 헤집어 놓으며 천하의 간부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수적 열세에 처해 있던 한국의 헌터들을 사냥하던 중이었는데, 되레 역으로 사냥을 당하는 입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남자도 난데없이 건물을 반파시키며 나타난 오우거 군주에게 습격을 받은 참이었고, 겨우 놈을 따돌려 빠져나오긴 했지만 부상을 입어 다리를 절뚝이고 있었다.
이곳에 나타난 모든 보스 몬스터들은 최소 S급 대형 던전 하나쯤은 꿰차고 있을 군주들이었다.
그것도 S급 중에서도 상위권 수준이 말이다.
“젠장, 이대론 아무것도 안 돼. 대간부님과 합류하든가 일단 여길 빠져나가야…….”
철컹!
어느새 남자의 앞을 막아선 데스나이트들.
하늘 위의 비룡에게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사이에, 기척도 없이 나타난 검은 기사들에게 빙 둘러싸여 있었다.
스릉!
그리고, 데스나이트들의 사이에서 붉은 안광을 뿜고 있는 암흑 기사가 장검을 뽑아들었다.
S랭크의 군주급 보스 몬스터, 칼라일이었다.
“이… 이런…….”
남자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검을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