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불청객 (4)
두 거대 길드의 길드장, 진서연과 한인호가 서로를 앞에 두고서 대치했다.
물론 그 사이엔 갑작스레 난입해 온 이즈나가 서 있었다.
“너희가 끼어들 줄이야. 사사건건 방해를 하려 드는 건 알았지만, 여기 올 여유도 있던 건가? 너희의 뒤를 노리고 있는 쪽이 많을 텐데.”
한인호가 이즈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분명 이지스 길드의 난입은 전혀 생각지 못한 변수였다.
여태 저들과 백룡 길드 사이엔 수상한 움직임이 발견된 적이 없었고, 아무런 접점도 없었으니 말이다.
하나 단지 이지스의 등장만으로 모든 게 뒤틀린 것은 아니었다.
“너 혼자서 끼어들었을 리는 없고… 설마 뒤를 텅 비어 두고 온 건가?”
셴룽을 비롯한 중국의 헌터들까지 거든 이상, 어중간한 전력의 헌터들만으로 찾아왔다 해 봐야 이 상황을 뒤집을 순 없다.
S급 헌터들을 대동한 것은 천하 길드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그렇다고 자신을 잡기 위해 많은 수의 헌터를 데려온 것이라면, 병력이 분산되어 버린다는 뜻이었다.
화신과 태산의 협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최소한 벌어지던 싸움은 이미 멈춘 상태였다.
여태 일어난 두 길드 간의 싸움이라고 해 봐야 서로를 견제하기 위한 수준일 뿐.
양측의 산하 길드 정도나 산발적인 소규모 국지전을 이어오며 간을 본 것이 전부라 큰 피해를 입지 않았기에 협상에 문제될 건 없었다.
그런 와중에 이곳에 이지스의 S급 전력 대부분이 나타났다는 걸 알게 되면 경기 남동부 지역은 곧바로 그들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어차피 협상이 어떻게 되든, 화신과 태산 모두 이지스 길드를 부수려 한다는 목적은 똑같았다.
등을 보이며 취약점을 드러내는 순간,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경쟁적으로 이지스의 뒤를 치고 많은 지역을 차지하려 들 것이다.
“네가 남 걱정을 할 때는 아닐 텐데.”
하지만 냉소를 보인 이즈나가 까칠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굳이 이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않다는 듯한 그녀의 태도.
한인호가 과거 성현에게 무슨 짓을 벌였는지 그녀도 잘 알았기에, 좋은 감정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네 차례는 마지막이야.”
파앗!
이즈나는 그를 한차례 쏘아보고는 등을 돌려 사라졌다.
순순히 그녀를 보내 줄 생각이 없던 한인호는 단숨에 접근해 이즈나의 등을 찌르려 했다.
하지만 검을 든 진서연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카가가강!
두 검이 날카롭게 부딪히며 마찰음을 냈다.
“하던 건 마저 해야지.”
“상태를 보니 멀쩡해 보이는군. 무슨 포션인지 후유증까지 완전히 없애 버린 건 놀랍다만, 정말 저 녀석들을 믿기라도 하는 거냐? 발악해 봐야 얼마 버티지 못할 텐데.”
“딱히 외부 길드 놈들을 믿는 건 아니지만… 그동안 청성을 번번이 물 먹인 게 바로 저 녀석들이잖아. 그럼 이번에도 생각이 있으니 나타난 거겠지. 안 그래?”
진서연이 씩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러자 한인호의 인상은 팍 찌푸려지고 말았다.
* * *
“이런 미친놈들! 하다하다 중국 놈들을 국내로 불러와?”
“다들 정신 차려! 퇴로를 마련하려면 이 길목만큼은 어떻게든 확보해야 한다!”
밀리고 있는 백룡의 헌터들.
그들도 기습을 예상했기에 전투태세도 갖추지 못한 채 저들을 맞이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청성의 헌터뿐만이 아니라, 중국의 길드인 천하 길드까지 합세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카아앙!
“밀어붙여!”
사방의 거리에서부터 그들을 향해 몰려드는 적들이 워낙에 많았다.
청성 하나만 해도 쉽지 않았는데 중국의 헌터들까지 합세하자 당장 이곳에 있는 이들의 힘만으로는 단념하고서 물러나려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갑자기 빌딩이 무너지고 혼란스러운 난전 형태로 뒤바뀐 게 다행이었다.
덕분에 청성과 천하 길드 측이 함께 꾸몄던 처음의 계획은 다소 어그러졌고, 위치와 인원수 배분에도 혼선이 생겨났다.
혼란한 이때를 틈타 퇴로를 마련해서 피해가 크지 않도록 서둘러 빠져나가야 했다.
당장 헌터들의 숫자 차이만 해도 최소 두세 배 이상.
그나마 무투파들이 주력인 백룡 길드는 전반적으로 정면 싸움보다는 이런 난전 방식의 싸움에 강했다.
덕분에 더 많은 숫자를 각개격파 해 가며 어떻게든 버티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일반 길드원 사이의 이야기였을 뿐이다.
콰아아앙!
“크아아악!”
벽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며 휘말린 수 명의 헌터가 나뒹굴었다.
백룡의 헌터들 앞에 나타난 한 명의 남성.
붉은 천을 왼팔에 감싼 남자의 모습에 모두가 멈칫하고 말았다.
이는 천하 길드의 간부임을 가리키는 표식이었다.
“S급 헌터……!”
“조심해!”
쿠우웅!
휘둘러진 검에 순식간에 헌터들이 쓸려나갔다.
천하 길드의 간부직은 전원이 S급의 헌터로, 백룡의 최고 간부가 나서야 하는 수준의 적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곁엔 그와 맞설 전력이 없었다.
어떻게든 뿌리쳐 보려 하지만, 워낙 압도적인 전력의 차이 앞에선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컥……!”
백룡의 헌터들은 하나둘 거리에 쓰러졌고.
정리된 거리를 뚜벅뚜벅 다가온 남자는 경멸이 섞인 눈초리로 한국의 헌터를 내려다보았다.
“건방진 것들. 감히 우리에게 대항을 하다니. 변방의 소국 주제에 오래도 버텨 왔다만, 이제부터라도 차근차근 주제 파악을 시켜 주겠다.”
남자는 쓰러진 헌터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들은 애초에 고개를 빳빳이 들어 대는 한국의 헌터들을 모두 굴복시킬 생각으로 넘어온 것이었고.
더욱이 과거 자신들과 극심한 마찰을 빚은 백룡의 헌터들을 얌전히 살려 보낼 생각 따윈 없었다.
하지만 그의 검이 쓰러진 헌터의 목을 베어 가르기 직전.
“키이이익!”
솟구친 땅굴 속에서 거대 개미들이 튀어나왔다.
놈들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남자는 급히 뒤로 뛰어오르며 물러섰지만, 가장 앞서 나타난 커다란 덩치의 개미는 그를 향해 날카로운 턱을 뻗었다.
촤아아악!
검날이 번뜩이며 순식간에 거대 개미의 몸을 반토막 내었다.
천하의 간부답게 당황한 와중에도 대처가 되었고, 굉장한 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키이이익!”
‘몬스터인가? 하지만 던전이 생겼다는 건 듣지 못했는데.’
어느새 거리를 메운 개미들의 등장에 남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한 방에 베어 내기야 했다만 한눈에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몬스터들의 등장이다.
전부 최소 S급 던전에 나올 법한 수준의 몬스터다.
이 정도 던전이 주변에 생겨났다면 발견 즉시 작전 중인 그들의 귀로도 들어왔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 끼어든 변수는 단순히 S급 던전이나 몬스터가 끼어든 수준이 아니었다.
‘이건……!’
카아아앙!
순식간에 등 뒤를 노리고서 다가온 검에 남자는 황급히 등을 돌려 대처했다.
하지만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았음에도, 검과 검이 부딪힌 순간 믿기 어려울 만큼 묵직한 힘이 전해져 왔다.
검은 코트 차림에 은발을 늘어뜨린 여성의 등장.
이즈나는 단숨에 몸을 틀며 상대의 복부를 뻥 차 냈다.
“큭… 네 놈은 뭐지? 보아하니 백룡의 헌터도 아닌 것 같은데.”
주르륵 미끄러진 남자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봤다.
물론 중국말로 뭐라 뭐라 이야기해 대는 그의 말에 이즈나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 수다 떨 시간 따위는 없었다.
화르르륵!
마력을 끌어올린 그녀는 커다란 불덩이를 동시에 만들어 내며 상대를 향해 쏘았다.
불덩이가 꽂힌 곳엔 연쇄적으로 요란한 폭발이 일어나며 열기가 쏟아져 나왔다.
물론 그럼에도 남자는 재빠른 움직임을 보이며 그 모든 마법 공격을 피해 냈다.
‘마검사인가? 요란하긴 하지만 뻔하기 짝이 없어.’
남자의 입가에 피식 미소가 지어졌다.
이 정도 화력이면 소모한 마력도 상당할 텐데, 쏟아 낸 마력에 비해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으니 절로 비웃음이 섞여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 지어진 조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폭발로 인해 가려진 시야 속, 번뜩이는 칼날이 갑자기 그의 코앞에서 나타난 것이다.
푸욱!
“컥……!”
불길 사이에서 남자는 급히 빠져나왔다.
하지만 깊숙이 뚫린 상처에서 이미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복부에 깊은 자상을 입은 남자가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방금의 마법은 상대의 동선을 한쪽으로 제약하기 위해서 던진 수였을 뿐.
피할 수 없도록 사전 작업조차 없이 이런 요란한 공격을 한 번에 쏟아 낸 이유가 있었다.
남자가 정말 뛰어난 실력과 경험을 지녔다면 의심조차 하지 않고, 이즈나가 유도한 방향대로 움직여 주진 않았을 것이다.
‘젠장… 내가 어째서…! 고작 이따위 놈들에게!’
같은 길드의 간부직, 그리고 S급이라 해도 경우에 따라 수준은 천지 차이로 날 수 있었다.
상대는 S급의 경지 끝자락에 겨우 걸치며, 천하 길드의 간부직에 막 들어선 지 3개월도 되지 않은 남자였다.
물론 역시 S급 헌터인 만큼 일반적인 헌터들과는 한 차원 다른 수준이긴 하다만, 그 S급의 세계 안에선 풋내기 수준의 루키에 불과했다.
반면 그동안 성현과 함께 수많은 실전을 겪어오며, 레벨을 착실히 쌓아 나가고, 군단 강화 보너스까지 적용되는 이즈나다.
S급의 루키 따위가 그런 그녀의 상대가 될 리가 없는 것이다.
저벅저벅.
이즈나는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를 향해 다가섰다.
점점 다가오는 그녀의 발걸음에 남자는 반사적으로 주춤주춤 물러났고, 저도 모르게 발이 걸려 콰당 넘어지고 말았다.
S급의 헌터가 제발에 걸려 넘어지는 꼴이라니.
이즈나의 강렬한 살기에 위축되었던 남자는 큰 굴욕감을 느끼고 말았다.
“젠장! 우쭐거리지 마라……! 고작 나 하나 쓰러뜨렸다고 끝일 거라 생각하나? 어차피 네놈들은 우리의 발치 아래 짓밟힐 벌레들에 불과해! 이런 주제 파악 못 하는 건방진 쓰레기들!”
쓰러진 남자가 이즈나를 향해 마구 소리쳤다.
실제로 천하 길드의 대간부인 셴룽을 따라, 국내로 함께 들어온 S급의 전력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이곳 전장의 주위만 해도, 중국측 S급 헌터가 최소 열댓 명 이상이 나타났다.
백룡 측 최고 간부들의 발목이 잡혀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거기다 청성의 최고 간부들까지 생각한다면, S급 전력의 숫자는 명백히 저들의 우위라는 것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뭐… 뭐야?”
자기 말을 알아들은 듯한 이즈나의 반응에 흠칫 놀란 남자.
그저 대꾸만 하지 않고 있었을 뿐, 던전 출신인 그녀에게 언어 장벽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콰득!
“끄아아악!”
이즈나는 빽빽 소리 지르던 남자의 발을 통째로 뭉개 버렸다.
추잡하게 몸을 꿈틀거리는 그의 모습에 이즈나는 조소를 지을 뿐이었다.
“재미난 구경을 시켜 주고도 싶지만… 그때까지 살려 둘 가치는 없어 보이네.”
* * *
무너진 빌딩 주위로 수많은 헌터가 뒤엉킨 모습.
그 모습을 건물 위에서 내려다보며 지켜보던 이지스의 헌터들이 있었다.
로칸, 네이아, 카론을 비롯한 모든 마족들이 서있었고, 경기 지역에 남아 일처리를 하고 있는 한승희만을 제외하고선 모든 간부가 집결해 있었다.
“준비는 끝났어. 시작한다.”
츠츠츠츠츳!
성현의 그림자가 길게 뻗어졌고, 건물의 옥상 위로 수많은 군주와 몬스터들이 쏟아졌다.
거대한 비룡과 고대 골렘, 데스나이트 등.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수많은 S급 전력의 군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겁도 없이 남의 땅에 들어온 불청객들을 사냥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