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불청객 (3)
콰아아앙!
매섭게 달려든 진서연의 검이 날아드는 테이블을 부쉈다.
파편들이 주위로 흩날리는 사이, 그녀는 순식간에 두 남자의 목을 베어냈다.
검제라는 이명을 지닌 국내 최강자 중 한 명답게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고 간결한 솜씨였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난 것은 아니었다.
피가 흩뿌려지며 시체가 바닥을 굴렀지만 그들의 시체를 짓밟고서 또다시 진서연에게 달려드는 이들이 있었다.
“우아아아!”
회의실로 난입해 온 수십여 명의 중국 헌터.
A급 헌터들이 수십 명이 넘게 회의장에 난입했고, 비슷하던 양측의 전력 차이는 순식간에 기울었다.
물론 수뇌부들이 회동을 가진 장소답게 무려 S급에 달하는 양 길드의 최고 간부들 여럿이 모인 자리였다.
하나 그들의 뒤에 호위로 붙어 있던 간부나 준간부급 정예들의 급이 A랭크였다.
B급 수준의 평길드원도 아니고 A랭크 헌터 수십여 명이 가세한 것은 아무리 S급의 최고 간부들이라도 조금은 거슬리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비좁았던 공간인 데다, 청성의 S랭크 헌터들을 앞에 둔 상태에서 발목을 잡을 적들이 다수 가세하니 걸리적거리기 짝이 없었다.
“이쪽이다!”
“이것들… 숫자로 밀어붙이는 건 여전하네.”
앞서 난입했던 중국 헌터 중 절반을 베어냈음에도, 또다시 회의실 안으로 몰려드는 헌터들의 등장에 진서연의 인상이 한껏 찌푸려졌다.
중국에서 이렇게 대규모로 헌터들이 넘어온 것이라면 그 소속은 하나뿐이다.
천하 길드.
중국 전역을 지배하고 있는 그들은 특유의 강력한 통제를 통해 굳건한 지배 체제를 만들어냈다.
국내에선 그나마 거대 길드들이 서로를 견제하고 다투기라도 한다면, 저쪽에선 아예 천하의 직속 길드원이나 산하 길드 외엔 헌터들에게 다른 선택지조차 없는 수준이었다.
당연하게도 한 국가 내의 모든 헌터 전력을 지니고 있는 만큼 워낙 덩치가 거대하고 인원수도 굉장했다.
여기 있는 A랭크 헌터들 정도야 얼마든지 소모품으로 내보낼 수 있을 정도였다.
이전에 그들과 직접 마찰을 겪으며 대립한 적이 있는 그녀와 백룡 길드였기에 여기 나타났을 헌터들이 여전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저런 놈들 따위 내가 직접 쓸어버리고 싶지만…….’
살기를 느낀 진서연의 시선이 휙 하고 돌아갔다.
지금 그녀가 상대하고 있을 쪽은 저런 녀석들이 아니었다.
“어딜 보고 있는 거냐.”
콰아아아앙!
벽을 통째로 날려 버리며 뒤를 노린 한인호.
진서연은 뒤로 훌쩍 물러섰지만 곧장 따라붙은 한인호가 검을 휘둘렀고, 수차례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이 더러운 새끼가…….”
“욕을 해봐야 달라지는 건 없을 텐데.”
한인호의 입꼬리가 피식 올라갔다.
물론 기세 좋게 밀어붙이는 것과 달리 싸움은 결판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순수 검술만으로는 S급 헌터들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뛰어난 실력을 지닌 데다가, 만독불침 특성을 통해 독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진서연을 쉽게 쓰러뜨릴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전처럼 끝을 내지 못하는 건 사절이었고, 그에겐 믿는 구석이 있었다.
카아앙!
힘껏 휘둘러진 한인호의 공격이 가로막혔다.
오히려 동작이 커진 사이, 빈틈을 포착하고서 진서연은 곧바로 한인호의 목을 노리며 역공을 가했다.
하지만 그녀의 검이 뻗어지던 그 순간.
‘잡았……?’
콰아아앙!
바로 옆 벽면이 무너져 내리며 나타난, 예리한 창끝이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날카로운 창이 옆구리를 깊숙이 꿰뚫었다.
“커윽……!”
급히 뒤로 물러난 진서연이 피를 쏟았다.
급히 몸을 빼낸 덕에 몸이 완전히 관통당하는 꼴은 면했지만, 내장을 헤집어 놓았을 만큼 깊은 상처를 입었다.
무려 9대 길드장 간의 싸움이다.
어지간한 고위 헌터들조차 섣불리 끼어들려다간 휘말려 갈려 나갈 뿐, 감히 끼어들 생각조차 하지 못할 수준의 싸움이었다.
하나 지금 난입한 자는 정확한 기습을 통해 진서연에게 치명적인 상처까지 안겨 주었다.
“네놈은…….”
“오랜만이로군. 지난 십 년간 네년의 낯짝을 잊은 날이 없다.”
한쪽 눈에 큰 흉터가 진 중년의 남성이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천하 길드의 대간부, 셴룽.
대간부라면 한 길드의 수장은 아니라, 국내 길드의 최고 간부 정도의 위치였다.
하나 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단일 길드에서 숫자도 몇 명뿐인 최고 간부직답게, 그 수준은 굉장히 높았다.
그중에서도 이 자리에 나타난 셴룽은 한국은 물론, 진서연과 과거의 악연으로 얽혀 있는 사이였다.
당시 인천을 통해 한국에 진출하려던 천하 길드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 준 것이 바로 그녀와 백룡 길드였으니 말이다.
“벌써 십 년이 넘게 지난 일인가? 하긴 그땐 던전 사태가 막 진정되려 들던 시기였으니.”
“태연한 척 허세를 부려 봤자다. 궁지에 몰린 꼴이 보기 좋군.”
유창한 한국말까지 구사하며 그녀를 꿰뚫어 보는 셴룽이었다.
진서연은 지금도 깊은 상처를 입어 피를 쏟고 있었고, 셴룽이 지닌 특성으로 인해 상처의 출혈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의 안색은 점점 창백해지고 있었다.
저자를 상대론 애초에 기습을 당하면 안 됐는데 명백한 실수였다.
“그러는 너야말로 아직도 다른 나라에 집적거리고 있는 꼴이라니. 반대쪽 눈도 마저 따이고 싶어서 찾아왔나 보지?”
“이, 이년이……!”
터억!
격분한 셴룽이 창을 들어 올리려던 순간.
한인호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나서지 못하게 막았다.
“뻔한 도발에 당해 주지 마라.”
“…….”
마치 부하를 대하는 듯한 한인호의 태도에 셴룽의 표정이 뒤틀렸다.
나이도 비교적 어린 데다 고작 소국의 헌터 따위가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순 없었다.
하지만 당장은 반발하지 않았다.
그동안 한국의 9대 길드는 해외의 거대 길드가 국내에 진출하려는 모든 시도를 철저히 틀어막으며 배제해 왔다.
주변 모든 국가를 탐을 내고 있는 천하 길드라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간부인 자신을 포함해 이만한 인원이 아무런 문제 없이 한국 안으로 들어올 수 있던 것도 미리 청성에서 손을 써준 덕분이었다.
‘저 개 같은 자식.’
그 모습을 지켜보는 진서연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이런 상처를 얻은 이상 빠르게 승부를 내야 했는데, 다혈질인 셴룽을 흥분시키려는 시도마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일 났군. 이대로는 힘든데.’
겉으론 의연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과는 달리, 진서연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예전같이 일대일로 맞붙는 것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한인호까지 상대해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궁지에 몰린 그녀를 향해 한인호와 셴룽이 천천히 다가왔다.
하지만 이 세 명의 최고위 헌터가 날을 세우고 있는 사이.
콰드드득!
빌딩 아래론 미세한 진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 * *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빌딩 아래의 지하 주차장.
정문 입구 쪽은 지금도 격한 싸움이 벌어지며 시간이 지연되는 중이었고, 그쪽을 피해 지하를 통해 내부로 진입하려던 중국 헌터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정작 지하에 들어설 수 있던 중국 헌터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지하로 통하는 입구 쪽에 쓰러진 헌터들만 잔뜩 있을 뿐, 지하 주차장 안엔 이미 네이아의 거대한 마법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좋아, 그럼 시작해.”
“예, 주군.”
성현은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신호를 주었다.
그러자 리치들의 군주, 네이아는 발밑에 그려진 거대한 마법진을 발동시키며 검은 빛을 뿜어냈다.
“어디 화려하게 시작해 보자고.”
* * *
쿠구구구궁!
땅을 뒤흔드는 대규모의 마법이 발동되었다.
네이아가 발생시킨 강력한 충격파가 터져 나오며 1~3층을 통째로 일그러뜨리며 밑부분을 날려 버렸다.
덕분에 견고한 고층 건물이라 해도 버틸 수 있을 리 없었고.
요란한 굉음을 동반하며 기우뚱 쓰러진 빌딩은 엄청난 잔해 더미와 함께 완전히 박살이 나고 말았다.
“젠장, 이게 대체…….”
흙먼지를 뒤집어쓴 진서연이 비틀거리며 잔해 더미 사이를 걸었다.
아무리 정신이 없다 한들 무너지는 빌딩에서 탈출해 빠져나오는 것쯤이야 고위 헌터들에겐 쉬운 일이었다.
굳이 S니 A랭크까지 갈 필요도 없이 B랭크 헌터 정도만 되어도 그 정도 일은 가뿐했다.
덕분에 빌딩 내부에 있던 고위 헌터들은 쓰러지는 건물 속에서도 대부분 무사히 밖으로 빠져나왔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덕분에 시간을 번 건가.”
한인호와 셴룽에게 양쪽으로 둘러싸여 목숨이 위태롭던 순간에 빌딩이 무너져 흩어질 수 있었다.
그들이 저런 붕괴에 휘말렸을 리는 없어도, 한인호가 준비해 둔 장소와 상황이 완전히 어그러진 셈이다.
어차피 일반 직원이나 시민들은 회담의 일정이 잡혔을 때부터 출입이 통제되거나 대피한 지 오래였다.
덕분에 빌딩이 무너지면서 당한 희생자는 B랭크에도 미치지 못하는 어중간한 수준의 인원까지 동원한 중국 헌터들뿐이었다.
최소 수백여 명 이상이 붕괴한 빌딩의 잔해 더미에 쓸려 나갔다.
“일단 빨리 여길 벗어나야…….”
“진서연, 네가 벌인 짓인가? 요란하게도 놀아대는군. 하지만 마지막 발악이었을 뿐이다.”
그녀가 다시 발걸음을 내디디려던 순간, 바로 뒤편에서 한인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멀쩡한 모습으로 그녀를 즉시 찾아낸 한인호였다.
‘젠장…….’
그와 마주한 진서연은 인상을 찌푸렸다.
상처는 더욱 악화되어 있었고, 지금 그녀의 상태로는 한인호를 막아 낼 수 없었다.
물론 마찬가지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한인호는 단숨에 진서연을 베기 위해 달려들었다.
쩌어어엉!
하지만 달려든 한인호의 검이 우뚝 가로막혔다.
검은 길드복을 휘날리며 나타난 헌터.
“너, 너는…….”
“이지스?”
진서연과 한인호 양쪽 모두의 표정이 바뀌었다.
뱀파이어 로드, 이즈나는 단숨에 한인호의 검을 떨쳐내고선 진서연과 함께 뒤로 훌쩍 물러났다.
“이지스의 헌터가 여긴 어째서 찾아온 거지?”
“일단 이것부터 받아 마셔.”
이즈나는 설명할 시간이 없다는 듯, 품속에서 꺼낸 투명한 병을 진서연에게 던져 주었다.
“포션?”
순간 당황한 그녀였지만 포션을 바로 받아 마셨다.
이런 상처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일단은 조금이라도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위함이었다.
하나 그런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옆구리에 있던 그녀의 깊은 상처는 빠르게 아물어 갔다.
“이… 이게 어떻게?”
깜짝 놀란 진서연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아무리 최상품인 포션이라 한들 셴룽의 특성으로 인한 지속 출혈까지 멎게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단숨에 과다 출혈로 인한 피로와 컨디션까지 회복이 되며 호전되었다.
이 정도로 즉각적인 효과는 백룡의 길드장인 그녀조차도 직접 본 적이 없을 정도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성현이 생산하는 그 모든 치유 포션 중에서도 효과가 가장 좋은 것을 넘겨준 것이었으니까.
최상급의 각종 희귀 재료들과 인간들은 알지 못하는 비밀 조합법, 거기에 마나의 맥이라는 특수한 장소의 힘까지 빌려서 제작된 포션이다.
고작 던전과 만나 연금술의 역사가 10년 조금 넘는 인간들이 흉내낼 수 있는 포션의 품질이 아니었다.
“다른 쪽은 우리가 맡겠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이즈나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제야 이지스의 헌터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또 어떤 상황인지 인지한 진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신세를 졌군. 저 녀석은 내가 최대한 붙들고 있어 주지. 나머지는 믿고 맡길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