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불청객 (2)
도심에 위치한 한 고층 빌딩.
그곳의 1층 입구엔 굳은 표정의 헌터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평범한 행사라기엔 꽤나 긴장된 분위기였고, 그 구성원들조차 일반적인 길드 소속이 아니었다.
얼마 전 전면전에 돌입해 한창 격한 충돌을 보이던 백룡과 청성 길드의 헌터들이 서로 대치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위치만 해도 양 길드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청성 측의 소유 건물이다.
하지만 살벌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이곳에 싸우러 온 것은 아니었다.
양 길드 수뇌부들 간의 회동이 이루어질 자리였다.
“다들 도착했다는데 우리도 이제 움직이지?”
“아, 그래.”
최고 간부인 ‘성녀’ 유은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한인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회의장을 향해 기다란 복도를 걸었다.
“협상이든 뭐든 어느 쪽이건 간에 빨리 이 싸움을 매듭지어야 한다. 준비야 마쳤으니 질질 끌 것 없이 확실히 이 자리에서 끝낼 거고.”
덜컹!
문을 열고 들어간 그들은 회의장 안으로 들어섰다.
지금 도착한 그들을 제외하면 이미 모두가 기다란 탁자 앞에 앉아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오른편엔 하얀 길드복 차림의 백룡 측 최고 간부들과 그 뒤편에 선 호위들이 주르륵 늘어서 있었다.
왼편엔 마찬가지로 두 자리만을 가운데 남겨 두고서 청성의 헌터들이 있었다.
피차 무기를 맡기고서 안으로 들어설 만큼 서로를 믿을 만한 사이가 아니었기에, 검과 무기들까지 허리춤에 하나씩 꽂혀 있었다.
드르륵!
“오셨습니까.”
청성의 헌터들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길드장인 한인호를 맞이했다.
물론 백룡 측에선 자리에 가만히 앉은 채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나 한인호의 시선은 주변의 다른 모든 이를 제쳐두고서 저들의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향했다.
“이미 와 있었군.”
“다물고 빨리 앉기나 해.”
팔짱을 낀 채 앉은 긴 머리의 여성이 대꾸했다.
백룡의 길드장 진서연.
검제라는 이명을 지닌 S랭크 최강의 헌터 중 한 명이다.
한인호와 최성준, 두 양대 길드장의 바로 다음으로 꼽힐 만큼 유명한 실력자이기도 했다.
물론 겉으로만 보는 대중의 평가 따위는 S랭크쯤 오면 당사자들은 크게 의미를 두지 않을 만큼 무의미했다.
그래도 그만큼 명성을 떨치고 있다는 것만큼은 사실이었고, 마냥 무시할 순 없었다.
그렇게 들어선 한인호가 자리에 앉았고, 진서연은 곧장 입을 열었다.
“그럼 어디 한번 말해 봐. 한창 싸우고 있던 와중에 협상장에 끌고 왔으면 먼저 뭔가를 던져 줘야지.”
“그래, 안부나 묻고 있기엔 얼굴 마주하고 있기도 거북한 사이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용건이야 이미 말해 뒀듯이 지지부진한 전쟁을 이만 끝내자는 거다. 이대로는 결론도 나지 않고서 피해만 커질 거라는 건 너희도 알고 있겠지.”
“조건은?”
“조건이라. 딱히 없는데.”
한인호가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그러자 진서연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말장난이나 하려고 불렀어? 먼저 선수를 쳐 놓고서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려 하니 발을 빼려들면 우리가 얌전히 놓아줘야 하나?”
“불리하다고?”
“네 눈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면 파천이 무너졌다는 소식 정도는 주워들었을 텐데.”
진서연이 피식 입가를 비틀었다.
이지스의 전력은 처음 그녀가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훨씬 강했다.
물론 옆자리에 있는 길드가 동맹 관계도 아니면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은 딱히 반길 만한 소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의 경우엔 달랐다.
“너희는 이미 많이 피를 봤지. 벌써 네 옆에 공석이 두 자리나 생겨 버렸으니 말이야.”
“…….”
이지스 길드를 이끄는 영왕의 손에 3성 중 두 명이 당해 버린 것은 그녀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다른 S급의 최고 간부 몇몇이 영왕의 손에 더 쓰러지긴 했지만, 그에 대해선 따로 언급조차 하지 않고서 넘어갈 정도로 큰 의미를 지닌 일이었다.
더 세력 규모가 큰 청성이 당초 계획과는 달리 백룡을 쉽게 밀어내지 못한 것도, 영왕과의 싸움에서 생긴 전력 손실로 인한 영향도 상당히 컸다.
당장 같은 상황에 3성의 멤버 둘만 살아 있다 하면 지금과 똑같이 상황이 흘러가진 않았을 것이다.
여전히 S랭크급 최고 간부들의 숫자나 다른 모든 길드 규모 자체는 청성이 앞서긴 했지만, 이지스가 끼어든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뒤바뀐다.
“먼저 시작을 해놓고서 싸움을 멈추자면 뭔가 내놓는 건 있어야지. 당장 서울 안쪽까지 내놓으라고 하진 않겠다만, 싸움이 벌어진 접경 지역들은 모두 넘겨. 계속해서 마찰이 생기던 원인도 그것 때문이니까.
“터무니없는 소리를 해대는군.”
“그렇다면 계속 싸우면 그만이고.”
두 길드장의 말이 잠시 멎자 회의장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무거운 침묵이 공기를 짓눌렀고, 양쪽 간부들은 손이 근질거리는 듯 눈동자를 굴렸다.
하나 그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왼편도 오른편의 헌터도 아닌 바깥에서였다.
콰아아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발길질과 함께 철로 된 문짝이 뜯기며,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헌터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검은 복장에 무기까지 빼든 저 헌터들은 모두가 청성 측의 헌터였다.
하지만 진서연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되레 그녀는 뻔히 예상했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식상한 놈들.”
우당탕!
순식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녀가 검을 집었다.
양측 자리에 앉아 있던 간부들과 호위들 역시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었고,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갑작스럽게 전투들 벌어졌음에도 마치 짜맞추기라도 한 듯 자연스웠다.
이번 기습을 준비한 것은 청성이었지만, 이 자리가 성사되었을 때부터 이미 백룡 측도 예상하고 있던 결과였다.
방 바깥에서도 전투가 벌어지며 싸움 소리가 들려왔다.
카아아앙!
거세게 검을 맞부딪친 한인호와 진서연.
방 한가운데에서 두 길드장이 맞붙었고, 놀라운 움직임으로 수십여 합을 서로 주고받았다.
양쪽 모두 검을 주력으로 사용하는 계열이었고, 서로의 전투 방식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외부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번 전면전에서만 해도 벌써 네 번이 넘게 맞붙은 상대다.
“번번히 끝을 보지 못했지만… 이번은 다를 거다.”
키릭!
순식간에 검을 비튼 한인호가 그녀를 베어냈다.
물론 워낙 반사신경이 빠른 상대인 탓에 뺨에 얕은 상처가 난 것이 전부였다.
그녀는 되레 꿈쩍도 하지 않고서 한인호의 복부를 발로 차냈다.
콰아앙!
발길질에 당한 한인호가 뒤편의 벽을 무너뜨렸다.
하나 그는 금방 벌떡 일어났고, 방금 검에 베인 진서연의 뺨에는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상처 부위 주위로 거무스름한 연기가 일렁이는 모습.
한인호의 맹독이 보이는 효과였다.
독사라는 이명을 지닌 한인호였고, 어지간한 고위 헌터들도 그의 칼날에 스치기라도 했다간 꼼짝없이 즉사할 만큼 강력했다.
츠츠츠츳!
허나 그녀의 뺨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오던 검은 독기는 서서히 죽어갔다.
그 지독한 독기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서 없애버린 것이다.
“뭐가 다르다는 거지?”
진서연은 A랭크 특성인 ‘만독불침’을 지니고 있었다.
그 어떤 종류의 맹독도 통하지 않는 신체.
범용성이 좋지 못해 S랭크 특성에 달하긴 어림도 없었지만, 최소한 독에 관련되어서는 그 어떤 특성보다도 뛰어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진서연의 자체적인 전력도 9대 길드장이라는 위치에 있는 데다가, ‘독사’ 한인호의 주력 수단인 독을 완전히 무력화시켜 버리니, 완전한 상성 관계에 있는 것이었다.
그동안 줄곧 진서연이 청성의 눈엣가시였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쿠우웅!
하지만 그때, 백룡 길드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불청객들이 안으로 난입해 왔다.
“뭐… 뭐야 이 놈들은!”
회의실 내부에 또다시 들이닥친 수십여 명의 헌터.
하지만 저들은 복장만 봐도 알 수 있듯 청성의 헌터도, 백룡의 헌터도 아니었다.
“너… 너 이 자식……!”
“이전과는 다를 거라고 말했을 텐데.”
“미친놈들. 하다하다 중국 헌터들을 끌어들여?”
진서연이 이를 빠득 갈았다.
함부로 외국 헌터들 끌어들이다가 피를 보는 경우는 워낙 많아, 9대 길드급의 거대 길드라 해도 결코 깨져선 안 될 불문율이었다.
한데 그걸 9대 길드의 대표 격인 청성이 이 자리에서 대차게 깨버린 것이다.
“그동안 길드간 불문율을 잘만 깨오던 게 백룡 아니었던가? 거기다 우리가 나라를 집어삼켜지는 걸 걱정해야 할 만큼 약하진 않으니까.”
“헛소리 지껄이지 마라. 특히나 중국 놈들은 외부에서도 어떻게든 접근해서 수작질 부리려던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안으로 끌어들였다가 뒤통수를 맞으면 네 머리통이라고 무사할 것 같나보지?”
이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먹고 먹히는 건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외국계 대형 길드들은 언제나 다른 나라들을 호시탐탐 노려왔다.
세력이 약한 소국들은 타국의 헌터들에게 종속되어 버렸고, 일반 시민들이 눈치는 채기 어렵지만 정부까지 꼭두각시로 만들어 국가의 사정을 좌지우지하곤 했다.
한국 역시 외국의 거대 길드들에겐 탐이 날 만한 나라였다.
하나 9대 길드를 필두로 국가 규모에 비해 강력한 헌터 전력을 지녀, 그동안 외부의 간섭은 철저히 막아왔다.
아무리 국내 길드 간의 갈등이 심해져도, 9대 길드가 주도해 이 점이 어겨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늘에 와서는 깨져 버린 이야기지만 말이다.
“이 정도 변수 정도는 내 손으로도 통제할 수 있다. 뭣보다… 기회가 왔다면 잡아야지.”
눈을 번뜩인 한인호는 진서연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 * *
“제… 젠장! 저것들은 뭐야!”
“숫자가 너무 많아!”
중국 헌터들이 나타난 곳은 건물 내부 뿐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바깥 거리에 숨어들어 있던 중국 헌터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내며, 빌딩을 향해 몰려들었다.
국가의 헌터 전력 역시 인구수에 큰 영향을 받기 마련이었고, 심지어 중국은 국내와는 달리 세력이 전혀 나뉘어 있지 않았다.
중국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단 하나의 거대 단일 길드.
당연히 그 전력은 엄청났고, 움직일 수 있는 고위 헌터들의 수도 굉장했다.
그동안 한국에도 진출하기 위해 호시탐탐 노려왔던 중국인 만큼, 청성의 제안에 적극적으로 헌터를 보내왔다.
“제… 젠장, 더 몰려들고 있어!”
거리를 가득 채운 중국 헌터들이 몰려드는 모습에 남자의 눈엔 절망이 서렸다.
이곳에 호위 명목으로 와있던 수백여 명의 백룡 측 헌터들로선 워낙 상대의 수가 많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비슷한 숫자의 청성 측 헌터들과 싸우고 있었는데 최소 몇 배는 많은 중국 헌터들까지 합세하자 꼼짝없이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모습을 건물 옥상 위에서 내려다보던 한 남자가 있었다.
“주군, 이제 나설까요?”
“그래, 슬슬 나서야 할 때인 것 같네.”
철컥!
가면을 쓴 성현이 검을 뽑아들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