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불청객
파천의 안재현이 당했다는 소식은 당연하게도 다른 모든 9대 길드에게로 가장 먼저 전해졌다.
최근 터진 사건들 중 가장 큰 파급력을 가진 일이나 다름없었고, 이런 큰 사건을 놓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을 계획하고 꾸민 청성 길드에겐 완전히 비상이 걸릴 만한 소식이었다.
마주 앉은 한인호와 유은하.
청성의 최고 수뇌부인 그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파천이 놈들에게 당했어. 이게 뭘 말하는 건지는 알겠지? 여태까지와는 완전히 이야기가 달라진 거야.”
9대 길드장 중 하나인 안재현이 무너졌다.
그동안 수도권 지역에서 부대껴 오던 투왕의 힘이라면 그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를 쓰러뜨린 영왕의 수준을 가늠하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안재현을 쓰러뜨렸다고 해서 같은 9대 길드장인 한인호도 쓰러뜨릴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건 결코 아니다.
상성의 문제도 있고, 그 안에서도 격차가 있기 마련이었으니까.
하나 이젠 한인호조차 더 이상 영왕을 당연히 이긴다고 생각하며 내려다볼 수는 없게 된 것이다.
불과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고, 연달아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을 보아 언제라도 다시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다.
“예전에 보인 모습을 봤을 땐 절대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성장하고 있어. 마치 놈과 엮인 사건이 생길 때마다 한 단계씩 더 강해져 있는 기분이야.”
정확히는 사건이 생기고 해결될 때마다 더욱 강해지는 것도 있지만, ‘퀘스트’라는 시스템을 적용받는 헌터는 전 세계에 오직 성현뿐이었다.
덕분에 그들로서는 성현의 성장 동력에 대해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자기집 지하실에 놓인 경험치 8배짜리 거대 던전이라던지, 군단 전체를 강화하는 가디언의 정수라던지, 다른 요소들은 더 했지만 말이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이 속도로 강해진 게 아니라 힘을 숨기고 있다고 봐야겠지만, 이 정도 힘을 숨기고 있었으면 왜 여태 숨죽여 지내며 진작 움직이지 않았는지 의문이란 말이야.”
“너무 그렇게 머리 쓸 것 없어. 어차피 녀석이 보인 행보 자체가 이미 정상 범주라고 하기엔 한참 떨어져 있으니까. 뭣보다 우리가 취해야 할 방향은 이미 정해졌어.”
유은하를 향해 한인호가 입을 열었다.
“불확실성을 감수하고서 미적거리는 것보단 최대한 빨리 처리해 버리는 게 낫겠지. 확실하게 끝을 낸다.”
파천이 무너지며 기존의 판도 자체에 완전한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겉에서 보는 것처럼 단순히 길드가 한 자리 뒤바뀐 게 아니었다.
이지스와 파천은 다른 9대 길드들과의 관계부터 시작해, 성향까지 완전히 달랐다.
기둥 하나가 무너져 내리며 여태 교착 상태에 빠졌던 균형이 깨진 이상, 급격한 변화는 필연적이었고 곧 연쇄적으로 그 효과가 나타날 것이었다.
하지만 청성은 그 뒤바뀐 판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이전에 이 사태의 원인인 영왕과 이지스 길드부터 깨부숴야 했다.
“놈은 더 이상 길드와 얽힌 단순한 악연 정도가 아니야, 진지하게 각성자들을 위한 이 체제를 위협하는 바이러스지.”
권력을 잡게 되면 결코 놓치지 않고 싶어 하는 게 사람이다.
오히려 지금 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가장 높이 선 꼭대기를 향해, 더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치기 마련이었다.
하나 가면 뒤에 숨은 영왕이라는 녀석은 각성자로서 지니는 계급적인 특권을 내려놓으려 하고 있었다.
그는 각성자의 특권을 제약하는 방침들을 경기 남부에 걸친 자신들의 구역 전체에 확대하고 있었다.
새로운 9대 길드라고 불리게 되었을 만큼 워낙 위세가 강해진 이지스 길드다.
덕분에 그들의 아래에 소속되지 않은 일반 지역 헌터들도 감히 이지스의 방침에 거스를 생각 따윈 하지 못했다.
성현은 안재현을 쓰러뜨리며 파천이 지니고 있던 경기 남부권의 위상을 고스란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게 된 것이다.
덕분에 일반 시민들을 향한 무차별적인 폭력이 뚝 끊어진 데다, 헌터들이 벌이는 터무니없는 갑질의 빈도수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두 계급 간의 차이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 세상에서, 각성자들의 시선에선 당연히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순 없지.”
한인호의 눈빛이 일렁였다.
한때 쏟아지는 던전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해 뛰어드는 영웅이었던 한인호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그를 완전히 뒤바뀌게 만들었다.
“파천이 당해 버렸으니 계획은 수정이다. 태산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거야. 수도권의 세 길드가 뭉치면 놈들도 별 수 없지.”
“…가능하겠어? 파천의 뒤통수를 치려던 태산을 꼼짝 못 하게 붙잡고 있던 게 화신 길드였는데. 싸우다가 갑자기 손을 잡는다니.”
“상황이 180도 바뀌어 버렸으니까. 지금 돌아가는 꼴을 모를 정도로 놈들이 바보는 아니야.”
경기 북부의 태산 길드와는 이미 협상에 나섰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불청객, 이지스가 반가울 리 없는 건 태산 역시 마찬가지였다.
태산 길드는 줄곧 싸워 오며 눈독을 들이던 경기남부 지역을 어떻게든 차지하고 싶어 할 것이었고, 그 구역들을 미끼로 삼아 끌어들이면 그만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백룡 녀석들만 남은 건가.”
“그래, 우린 놈들과의 싸움부터 빨리 끝을 내는 게 최우선이다. 아직 이지스와의 직접적인 연결은 없다지만, 우리의 움직임에 대해 눈치를 채고서 뭉치기 전에 격파하는 편이 훨씬 편할 테니까.”
“하지만 어쩌려고? 네가 직접 나선다 해도 마냥 쉽게 밀어낼 수 있는 녀석들은 아닌데.”
백룡의 길드장인 진서연은 대화가 통할 만한 녀석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쉽게 당해 줄 자도 아니었다.
청성과의 대대적인 전면전이 벌어졌으나 아직까지도 접경 지역에서 조금도 밀려나지 않은 채 팽팽한 싸움을 주고받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나 한인호에겐 이미 생각해 둔 방법이 있었다.
“수를 써야겠지. 놈들이 반길 만한 방법은 아니지만, 더 이상 수단 방법을 가려 줄 필요야 없을 테니까.”
헌터 업계, 그리고 거대 길드들 사이에서도 어겨선 안 될 불문율이라는 게 존재했다.
하지만 그런 고상한 말들 따위 이미 십여 년 전에 집어던진 지 오래였다.
변혁의 장이 찾아온 이상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 * *
“키이이익!”
던전 안에서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울음소리.
무려 수천여 마리의 수하가 전진하며 던전 안의 몬스터들을 싹 밀어 버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로 인해 던전 안 곳곳에서 괴수들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군주급 수하를 소환한 것도 아님에도, 그저 일방적으로 짓밟히는 학살이나 다름이 없었다.
터엉!
“이 곳이 끝이었나 보군.”
성현은 잘린 괴수의 목을 휙 내던졌다.
마지막 장소까지 모두 청소를 끝내며 던전 공략을 마친 그였다.
상위 등급인 A급의 던전인 데다, 공략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중대형 규모의 던전이었다.
하나 그럼에도 그는 안으로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거의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서 순식간에 밀어 버릴 수 있었다.
“내부 확보 완료. 청소는 다 끝났어.”
- 벌써? 출발한 지 얼마나 됐다고… 정말 순식간에 끝냈네.
핸드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천 길드의 구역들을 흡수한 이후, 막대한 업무에 파묻혀 지내느라 바깥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있는 한승희였다.
이젠 성현을 향한 잔소리마저 포기한 그녀였다.
- 근데 솔직히 네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지 않아? 평소에 그렇게 바쁘다며 나돌아 다니더니, S급 던전도 아니고 A급 던전에 굳이 나서다니.
“빨리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 정말 있네.”
성현은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널브러져 있는 몬스터들의 시체를 지나치자, 던전 끝자락에 한 무더기 쌓여 있는 광석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새하얀 빛을 내는 희귀 금속 ‘이트론’의 재료였다.
- 이트론이라… 그건 어디다 쓰려고? 꽤 돈이 되는 건 맞지만, 돈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닐 테고.
“그건 비밀이야.”
- …비밀?
성현은 대강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대중으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래도 던전의 크기상 상당한 양의 광석이 매장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고, 이 광석의 물량은 당분간 걱정할 필요 없어 보였다.
“여기서 채굴되는 광석들은 처분하지 말고 보관해 둬. 쓸 일이 있으니까. 어쨌든 던전 공략은 끝났으니까 남은 뒤처리는 부탁할게.”
- 뒤, 뒤처리? 그런 건 좀 네가 알아서 길드원들한테 지시를 내리면 되잖아! 안 그래도 누구 때문에 바빠 죽겠는데, 내가 네 비서도 아니……!”
“믿고 맡긴다!”
툭!
핸드폰 너머로 울리는 목소리에 성현은 전화를 잽싸게 끊었다.
던전에서 발견되는 자원의 종류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했다.
때문에 아무리 다양한 환경이 들어서 있는 성현의 집 지하 던전이라 해도, 미처 발견되지 않는 종류의 희귀 자원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이런 경우 지금처럼 외부의 던전에서 가져오는 것이 필요했다.
가짓수 측면에선 자급자족에도 한계가 있으니, 지속적이며 원활한 군단의 전력 강화를 위해선 필수적인 것이다.
물론 다른 어지간한 헌터들이었다면 말처럼 쉽지가 않았겠지만, 파천 길드를 무너뜨리고서 경기 남부 전체에 걸쳐 아주 드넓은 구역을 차지하게 된 성현이다.
단순히 해당 지역의 영향력을 가지게 되는 것만이 아니라, 구역 내에서 생성되는 수많은 던전에 대한 권리까지 함께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덕분에 전략 자원으로 통제되어 돈 주고도 구하기 힘든 각종 희귀 자원마저도 다량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파천을 쓰러뜨린 이상 청성이든 화신이든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던전 밖으로 나온 성현은 시선을 돌렸다.
파천의 잔당 문제라면 성현이 곧장 손을 써 버린 덕에 큰 피해 없이 모두 마무리 지었다.
예상을 못 하고 있었다간 꽤나 큰 혼란이 벌어졌을 수도 있었지만, 놈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려 들기 전에 바로 제거해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파천의 잔당 정도는 청성의 입장에선 그저 비용도 없이 가볍게 던져 버릴 수 있는 수였다.
이 다음에 보일 놈들의 움직임부터가 진짜였다.
‘성찬일에게서 들은 말이 사실이라면… 보통 일은 아니야. 조금 더 제대로 된 게 필요하겠어.’
던전 밖으로 나선 성현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 * *
“…설마 당신이 찾아올 줄이야. 그것도 요즘 같은 시기에 직접 서울에 드나들 줄은 몰랐는걸. 꽤나 대범하네.”
집무실 건너편 자리에 앉은 여우 가면을 쓴 여성, 서연화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무려 서울의 암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흑련 길드의 길드장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앞에 선 상대는 그녀 이상의 거물이었다.
무려 9대 길드인 파천을 무너뜨리고, 경기 남부 지역 전체를 손에 넣은 S급의 네크로맨서 영왕(影王).
아무리 흑련이 암시장의 거대한 세력이라 해도, 저들에 비해선 노는 물 자체가 다른 입장이다.
물론 사실 성현과 서연화는 그동안 수 차례나 거래를 이어 온 사이다.
흑련과 거래에 나설 때의 성현과, 영왕으로 활동할 때의 성현은 다른 형태의 가면을 쓰고 있었고, 철저히 그 정체에 대해 숨겨 왔다.
덕분에 서연화도 그동안 그의 정체에 대해선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이야기를 하네.”
“자, 잠깐, 그 목소리는……?”
하지만 영왕의 가면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놀란 서연화의 눈동자가 순간 떨렸다.
“구미가 당길 만한 제안을 가져왔는데, 들어 볼래? 전보단 조금 더 확실한 관계가 필요해서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