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공정한 싸움 (3)
콰과과광!
마법이 터져 나오며 연쇄 폭발이 일어났다.
화염을 뚫어 가며 몸을 날린 안재현은 앞을 가로막는 고대 골렘을 일격에 부숴 버렸다.
수많은 적에게 둘러싸인 상태에서도 오래도 버티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는 이미 너무 많은 체력을 소진했고, 무엇보다 조금 전과는 달리 성현의 곁엔 군주들의 존재가 있었다.
촤르르륵!
날아드는 네이아의 사슬을 피해 움직인 안재현은 정면에서 날아드는 불길을 마주했다.
비룡 안타라스의 입에서 쏟아지는 불길이었고 급히 몸을 비틀며 피해야 했다.
물론 사슬을 피할 그의 움직임을 미리 예상하고서 내뱉은 불길이기에, 모두 피하진 못했고 팔이 거뭇하게 그을리고 말았다.
괴물과도 같은 육체를 지닌 S급의 권투사인 그의 팔조차도 견디지 못하고서 타들어 간 부상이다.
하지만 안재현은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지금 그가 움직이고 있는 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오직 자신의 눈앞에 있는 성현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이대로 죽여 주마!”
안재현은 단숨에 거리를 좁혀 성현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의 주먹이 정확히 성현의 머리를 날려 버리기 직전의 그 순간.
푸욱!
섬뜩한 소리와 함께 안재현의 양 옆구리에 검이 꽂혔다.
양 옆에서 나타난 뱀파이어 로드 이즈나, 그리고 다크엘프 군주인 카론이 칼날을 아주 깊숙이 꽂아 넣었다.
그러자 교차하는 칼날에 꽂힌 그의 몸은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컥…….”
눈을 치켜뜬 안재현의 입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중첩된 저주의 효과에 소진된 체력, 부상까지 입은 안재현은 더 이상 꼼짝하지 못했다.
“그러게 남의 싸움에 함부로 끼어들지 말았어야지.”
성현은 검을 들어 그의 심장을 향해 검을 꽂아 넣었다.
주저 없이 심장을 꿰뚫는 성현의 칼날에 안재현은 결국 무릎을 꿇고서 쓰러졌다.
털썩!
“어차피 파천은 시작에 불과하지만.”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파천 길드의 ‘안재현’을 처치하여 퀘스트 보상을 수령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힘 스탯이 60만큼 증가합니다!]
[민첩 스탯이 60만큼 증가합니다!]
[체력 스탯이 60만큼 증가합니다!]
[칭호, ‘거물’을 획득하였습니다!]
[보다 약한 적을 대상으로 25%의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퀘스트를 완료하며 대량의 스탯과 새로운 칭호를 얻은 성현이다.
무려 9대 길드장 중 하나를 제압한 것인 만큼 보상 역시 뛰어났다.
“하… 정말 해냈다니, 믿기지가 않네.”
한편, 성현의 곁으로 다가온 한승희가 말했다.
설마 정말 파천 길드를 쓰러뜨리게 될 줄이야.
시선을 돌린 그녀에게는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엄청난 군단의 모습이 보였다.
“괜히 우리더러 거들 필요 없다고 한 게 아니었네. 나참…….”
한승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네이아가 결계의 통제권을 얻고서 이미 통행을 차단하는 건 무력화된지 오래였다.
하지만 바깥에 있던 그녀와 길드원들은 싸움을 거드는 대신 외곽 지역에 몰려 있던 사람들을 모두 대피시켰다.
이는 네이아에게서 전달 받은 성현의 뜻이었다.
곳곳에서 큰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비교적 피해가 적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운이 좋았지, 너도 수고했어.”
“그런 입바른 소리는 됐고,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경기 남부 지역을 통째로 뒤집어 버렸는데. 그 녀석들은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을 걸?”
청성을 떠올린 한승희가 말했다.
애초에 파천 길드와 싸워야 했던 이 상황 자체도 눈엣가시를 제거하기 위해 청성이 유도한 것이었다.
결국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가 버렸지만 말이다.
“그래, 설마 우리가 이길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겠지.”
“그럼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 아니야? 청성 놈들은 이미 백룡과 전면전을 치르고 있는 중이잖아. 파천만 믿다가 완전히 발목이 묶인 것이나 다름없는 꼴이라고. 이대로 뒤통수를 친다면 서울 강남 지역까지 꿀꺽…….”
“아니, 마냥 그런 것만은 아니야.”
그녀의 말에 성현은 고개를 저었다.
청성에게 곤란한 상황이고 좋은 기회일 거라는 건 맞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엄청나게 유리한 상황은 아니었다.
바로 강북을 차지한 화신 길드의 존재 때문이었다.
서로를 견제하는 경쟁 세력인 줄 알았던 서울 지역의 청성과 화신 길드였지만.
성찬일에게 내막의 사정을 들은 이후, 거대 길드의 이권 문제에 대해선 서로가 한통속으로 붙어먹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놈들이 보일 다음 움직임이야 뻔했다.
“일단 여길 소화하는 것부터 도와줘. 경기 남부 지역을 통째로 삼켜야 하는데, 배탈이 나지 않으려면 처리해야 할 것들이 많거든.”
“자, 잠깐만… 그러고 보니…….”
움찔한 한승희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무려 9대 길드인 파천을 쓰러뜨렸다는 놀라움과 안도감에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만, 거대한 세력을 통째로 쓰러뜨려 버렸으니 흡수할 영역도 엄청났다.
쏟아질 일거리야 당연히 한가득 쌓일 것이었고.
그게 막대한 일거리가 누구의 손에 주어질지야 뻔했다.
“설마 이것도 나한테 다 떠맡길 생각은 아니지? 길드 규모가 이렇게 불어났는데 진짜 양심이 있으면 너도 좀 거들… 야! 어디가!”
* * *
“그게 정말이라고?”
“그렇다니까……!”
도심 번화가의 카페 테이블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파천 길드와 이지스 길드 사이에 벌어진 사건 소식이 삽시간에 퍼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믿기지가 않네, 설마 그 투왕을 쓰러뜨릴 줄이야.”
영왕이 파천의 안재현을 쓰러뜨렸다는 대형 소식.
국내를 휘어잡던 엄청난 거물 한 명이 쓰러지며 교체된 것이었고, 이로 인해 엄청난 파장을 불러오리라는 걸 모두가 다 알고 있었다.
이미 파천이라는 거대 세력 하나가 무너져 내리며 수도권 지역의 판도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파천의 몰락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 세력 구도가 고착이 된 이후, 이 판도는 위태로운 듯하면서도 깨지지 않으며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게 살벌하게 경쟁을 하고 마찰을 빚어 가면서도, 거의 10년에 가까이 유지가 되고 있었으니.
9대 길드의 한 축이 무너진다는 것 자체가 사람들에겐 굉장히 생소한 일이었다.
한데 단순히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설마 같은 9대 길드급도 아니고, 뜬금없이 튀어나온 제 3세력이 파천을 쓰러뜨릴 줄이야. 이게 말이 되는 일이야?”
“같은 9대 길드급이 아니라니… 파천을 쓰러뜨렸다는 것부터 이미 이지스는 9대 길드라 불려도 손색이 없다는 소리지.”
“그럼 이지스가 새로운 9대 길드가 되는 건가?”
“그렇겠지. 문제는 여기서 싸움이 끝날 것 같지는 않다는 거지만.”
청성과 영왕의 악연에 대해서라면 이젠 모르는 이가 아예 없을 만큼 유명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직접 서울 지역 내에서 길드 간 싸움이 벌어지기까지 했던 만큼.
당연히 청성 길드에서 경기 남부 지역 전체를 집어삼킨 이지스 길드를 가만히 내버려 둘 거라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콰아아앙!
“꺄아아악!”
“뭐, 뭐야!”
그때, 갑작스러운 폭발과 함께 유리창이 깨졌고.
부서진 문과 유리 파편들로 인해 가게 안에는 큰 혼란이 일었다.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선 매서운 인상의 남자.
파천의 길드복을 입은 남자였다.
이지스에게 흡수당한 줄로만 안 파천 길드 소속 헌터의 등장에 사람들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봤다.
콰악!
“자, 잠시만! 저한테 왜, 켁……!”
멱살을 잡힌 시민의 몸이 붕 떠올랐다.
빠져나가려 몸부림을 쳐 봤지만, 헌터의 강인한 완력에 일반인이 저항을 해 봤자였다.
“쓰레기 같은 놈들… 호락호락 당해 주진 않겠다. 온 도시에 메시지를 남겨 주지.”
이를 빠득 간 남자가 검을 들어 올렸다.
검이 휘둘러지고 겁에 질린 시민이 눈을 질끈 감긴 그 순간.
콰아아앙!
“컥……!”
남자의 몸뚱이가 붕 떠오르며 옆으로 나뒹굴었다.
갑작스레 등장한 성현의 발길질이었다.
그사이, 붙잡혔던 이를 포함해 놀란 시민들은 재빨리 바깥으로 달아났다.
“하다하다 이런 짓거리까지 벌이려 하다니.”
뚜벅뚜벅 다가선 성현이 눈앞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저 남자는 파천 길드의 잔당이었다.
워낙 큰 덩치의 거대 길드였다 보니 본대를 두 차례나 박살 내었음에도 산하 길드들을 제외하고도 구역 곳곳에 남아 있는 직속 길드원들이 제법 되었다.
물론 길드장인 안재현과 최고 간부들이 모두 죽어 버린 이상, 남은 인원이 모여 봤자 상황을 뒤집기란 불가능했다.
이 이상의 저항은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남은 간부와 길드원들은 절반 이상은 항복해 이지스 길드의 산하 길드로 흡수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순순히 적의 밑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청성이 시킨 일 맞지?”
“…그래, 굳이 숨길 것도 없지.”
비틀비틀 일어선 남자가 대꾸했다.
9대 길드쯤 되면 헌터들은 스스로의 길드에 강한 소속감을 지니게 된다.
덕분에 남은 절반가량의 인원은 갑자기 굴러 들어와 파천을 공중분해한 이지스 길드에 큰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거기다 이지스 길드의 내부 방침상 그들의 구역 내에서 각성자들이 누리는 갑질과 특권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제약을 걸어 둔 탓에, 파천 때와는 완전히 바뀐 길드 방침에 반발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에게 청성 길드가 몰래 접근해 온 것이다.
이미 경기 남부 지역을 먹어 치웠다고 봐야 할 이지스 길드였지만, 워낙 큰 영역을 모두 차지한 탓에 제대로 시스템이 돌아가고 소화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파천 측 잔당들을 이용해 최대한 혼란을 빚게 하여 이지스 길드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발목을 묶어 두려는 것이다.
테러든 게릴라든 그 수단은 무엇이든 상관이 없었다.
“이미 이 모든 일이 끝난다면 청성에 들어가기로 약속받았다.”
“약속? 하, 정말 청성이 너흴 받아 줄 것 같아? 같은 길드 직원도 한 번 쓰고 버리는 마당에 다른 길드의 패잔병 따위 한 번 쓰고 버리는 말에 불과해. 한인호 녀석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닥쳐! 네 놈의 말 따위를 들을 것 같나!”
남자가 버럭 소리쳤다.
나름 경험담에서 우러나온 충고였는데, 그닥 와닿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럼 뭐 그거야 그렇다 치고, 너랑 같이 넘어가기로 한 다른 동료들에게서 연락이 뚝 끊기지 않았어?”
“뭐? 그, 그걸 어떻게…….”
남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적의 말 따위에 흔들려서는 안 되었지만, 다른 동료들과의 연락이 끊긴 것은 정말 사실이었다.
“미안하지만 네 동료들은 이미 다 잡혔어.”
“웃기지 마라, 그건 말도 안 돼.”
파천의 직속 길드원만 따져도 최소 백이 넘는 인원이다.
그 짧은 시간에 모두가 다 당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물론 이는 그가 결계 안에서 벌어졌던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아, 성현이 거느리던 군단을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더 이상 도시 안에서 굳이 내 능력을 숨길 필요가 없거든… 어찌됐건, 뒤에서 장난질 치는 건 네가 마지막이야.”
츠츠츠츳!
그림자가 일렁이듯 주위로 느껴지는 수많은 기척.
전혀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던 수많은 존재가 자신의 뒤를 밟고 있었음을, 그는 이제야 눈치를 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