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공정한 싸움
콰아아앙!
벽이 요란하게 무너지며 남자가 튕겨 나왔다.
“젠장!”
욕지거리를 내뱉은 남자는 재빨리 균형을 잡으며 검을 들었다.
곧바로 무너진 벽 틈으로 나타난 거대한 괴수.
서리트롤의 왕, ‘그롬’이었다.
근육질의 몸을 지닌 녀석은 낡은 건물 하나를 폭삭 가라앉힐 정도로 날뛰며 자신의 팔을 뻗었다.
촤아악!
하나 그롬의 커다란 팔은 단숨에 절단 나며 날아갔다.
뼈까지 드러나며 깔끔하게 잘려 나간 절단면.
그롬의 상대는 파천의 고위 헌터인 남자였고, S급 헌터인 만큼 무기의 질과 개인의 힘 또한 뛰어났다.
“그아아아아!”
그롬의 포효가 쩌렁쩌렁 울렸다.
녀석은 팔 하나가 통째로 날아갔음에도 조금도 동요하거나 주춤거리는 기색 없이 적을 향해 더욱 맹렬히 달려들었다.
그도 그럴 게, 팔 하나 잘린 것쯤이야 녀석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츠츠츠츳!
그롬이 입었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어 갔고, 동시에 날아갔던 녀석의 팔이 다시 재생되며 자라나기 시작했다.
재생력 특성으로 잘려 나간 팔을 아예 통째로 복구해 버리는 모습.
그렇지 않아도 뛰어난 재생력으로 악명 높은 트롤 계열의 보스 몬스터인 그롬이다.
거기다 군단 강화 특성까지 적용받아 40퍼센트의 추가 재생력까지 더해지자, 거의 상처를 입음과 동시에 살점이 자라나는 수준으로 매우 빠른 재생력을 보였다.
콰아아앙!
‘젠장……! 이건 소환수가 아니라 그냥 보스 몬스터잖아.’
주르륵 밀려난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무려 S급의 보스 몬스터가 나타난 것이었고, 심지어 이 녀석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성현이 그림자 속에서 소환한 보스 몬스터들은 여섯 명이었던 파천 측 최고 간부들보다 수가 많았다.
‘네크로맨서가 보스 몬스터를 부리는 자체도 말이 안 되는데, 일개 개인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숫자의 보스들을 거느린다고?’
성현의 그림자 속에서 쏟아졌던 최소 열이 넘었던 보스 몬스터의 숫자.
기존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로선 놀라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나마 여긴 한 마리뿐이라 해도 이런 보스가 두 마리 이상 달라붙은 쪽도 있었다. 서둘러 이 녀석을 처리하고 다른 쪽을 도와주러 가야 하는데…….’
콰아아아앙!
“그어어어!”
문제는 여기 있는 그롬의 전력부터가 S급 던전 중에서도 최소 상위급 이상은 된다는 것이다.
건물까지 박살 내며 맹렬히 달려드는 서리트롤 군주를 도무지 쉽게 떨쳐 낼 수 있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주어진 시간을 많이 지체해 버린 남자의 등 뒤로 섬뜩한 살기와 기척이 느껴졌다.
“이, 이런……!”
남자가 뒤를 돈 순간, 이미 주먹이 그의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콰아아아앙!
* * *
“이제 보스들의 소환도 전혀 문제가 없고. 그다음은 조금만 더 있으면 되겠네.”
성현이 결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결계 안쪽을 누비며 바쁘게 전투를 치렀던 그였지만, 지금은 적들을 내버려 둔 채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군주들을 비롯한 소환수들이 워낙 수준이 올라온 덕에 지금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물론 잠시 뒤에야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겠지만.
타악!
“돌아왔습니다, 주군.”
“그어어어.”
웨어울프 로드, 로칸이 그롬과 함께 돌아왔다.
파천의 최고 간부를 처치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수고했어. 그럼 이제 다른 쪽도 슬슬 돌아오겠네.”
성현은 고개를 끄덕여 주며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내보냈던 군주들이 하나둘 돌아왔다.
우두머리급인 니아드라나 올렉, 마족인 이즈나와 카론까지.
뿔뿔이 흩어 놓은 S급 헌터들을 하나씩 사냥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여섯 명의 최고 간부를 모두 처치해 낸 그의 군주들.
수준에 따라 오래 버티던 이들도 있었지만, 마족 군주까지 전투에 합세하자 버텨 낼 방법이 없었다.
개미들의 활약에 다른 파천 측 길드원들도 이미 궤멸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쿠우우웅!
“크르륵!”
마지막으로 도착한 비룡 안타라스가 내려서며 성현의 곁에 섰다.
그의 모든 군주가 한자리에 모인 것이었고, 무려 열다섯이 넘는 군주가 그의 곁에 섰다.
유일하게 네이아는 결계를 유지하고 있느라 전투에 직접 참여할 순 없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주군, 남은 녀석들까지 사냥에 나설까요.”
“아니. 일반 길드원들은 개미들만으로도 충분해. 지금은 그쪽에 신경 쓸 게 아니야. 결계 안으로 두 번째 본대가 도착했거든.”
성현이 입을 열었다.
결계의 출입을 통제하게 된 네이아로부터 들려온 소식이다.
파천측 두 번째 본대가 도착했고, 방금 전에 상대했던 이들보다도 더 규모가 컸다.
“이번엔 분명 안재현도 함께 왔겠지.”
성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저들의 입장에선 원래 그의 죽음은 원래 당연했던 것이었다.
이 커다란 결계 속 함정에 걸려 버린 데다가 오른팔인 오정우에 더해 첫 번째 본대까지 합류하게 된 상황.
심지어 내부에 있던 이지스 측 인원이라곤 영왕과 간부인 이즈나 하나뿐이었기에, 마법 능력까지 봉쇄된 와중 S급 헌터 여럿을 당해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실 여섯 명의 최고 간부를 추가로 이쪽으로 보낸 것도 과투자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가급적이면 어떠한 변수도 없이 확실히 끝을 내기 위해서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곧바로 이지스 길드의 모든 구역을 집어삼키기 위해 경기 서남부 지역으로 우회해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조금도 예상치 못한 당혹스러운 소식에 곧바로 방향을 바꿔야 했다.
그래 봤자 이미 한발 늦어 버린 뒤였지만.
철컥!
‘상대는 9대 길드 수장이다. 여태까지 상대해 왔던 녀석들과는 차원이 다르겠지.’
성현은 검을 집어 들었다.
더 큰 규모의 파천 측 헌터들이 몰려온 것은 둘째 쳐도, 가장 큰 차이는 길드장인 안재현의 존재였다.
지금까지의 상황이야 잘 풀어 나갔지만, 제대로 준비를 하지 않으면 자신의 목숨도 장담하기 힘들었다.
물론 싸움을 걸었을 때부터 각오는 이미 한 일이지만.
“슬슬 손님맞이를 준비해야겠어.”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후우우웅!
성현을 향해 순식간에 날아드는 불덩이.
그의 곁에 있던 안타라스가 날개를 펼치며 화염을 막아섰다.
콰아아아아!
맹렬한 불길이 터져 나오며 빛을 발하는 마법.
하지만 화염 속성의 비룡인 안타라스에겐 큰 피해를 주진 못했다.
“…벌써 여기까지 닿은 건가.”
성현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바로 옆 공사장 위에서 나타난 수 명의 기척.
두 번째 인원들이 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무슨 능력을 사용한 것인지 바로 자신을 찾아온 모양이었다.
거기다 그의 앞에 나타난 이들은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치유를 받아 부상을 회복해 온 오정우를 비롯해 여덟 명의 파천 측 최고 간부들이 서 있었다.
쓰러진 최고 간부들의 숫자까지 고려하면 그야말로 이번 싸움에 모든 전력을 긁어모아 온 셈이다.
무엇보다 그들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남자는 느껴지는 기운부터가 아예 한 차원이 달랐다.
쿠우우웅!
건물 아래로 뛰어내린 남자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그의 앞에 섰다.
섬뜩한 살기를 온몸에서 풀풀 풍기고 있는 모습.
파천의 길드장, 투왕 안재현이었다.
[퀘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깊은 살의를 지닌 존재가 당신의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를 서둘러 제거하십시오!]
[완료 보상 - 대량의 경험치 및 스탯 보너스]
[주의) 매우 강력한 전력을 지닌 적입니다. 주의하십시오.]
‘…시스템이 이렇게 따로 알려 줄 정도라는 건가.’
경고음과 함께 나타난 시스템 메시지.
수많은 상태창을 봐 온 성현도 처음 보는 문구였다.
확실히 마주하고 있는 느낌부터가 달랐다.
이미 청성의 길드장인 한인호와 마주친 경험이 있어 크게 다르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큰 착각이었다.
그때와는 달리 명백히 자신을 죽이려 드는 살의를 보였고, 등골이 절로 오싹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움츠러들지는 않았다.
싸우기도 전에 지레 겁 같은 걸 먹을 성격이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네놈이로군. 이 정도일 거라고는 전혀 전달받지 못했는데.”
성현의 주위에 선 수많은 군주의 모습에 고개를 슬쩍 든 안재현이 입을 열었다.
영왕이 청성의 최고 간부들을 쓰러뜨렸다는 것도 알고 있던 그였지만, 단순히 그들이 가늠하던 것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애초에 그렇지 않았다면 파천에게 이런 피해를 입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방심한 사이 간부진의 전력 손실이 심각한 수준으로 벌어졌고, 길드장인 안재현의 입장에선 당연히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미 수지타산에 맞지 않는 꼴이 되어 버렸지만… 손실은 조금이라도 더 줄여야겠지.”
콰드득!
안재현의 주먹이 움켜쥐어졌다.
“곱게 죽여 주진 않겠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길드원들이 사방에서 나타났다.
최고 간부들뿐만 아니라 파천의 일반 간부와 길드원들이 거리로 우르르 쏟아져 성현을 사방에서 둘러쌌다.
물론 그 가운데에 둘러싸인 것은 성현뿐만이 아니었다.
검은 그림자를 풀풀 풍기는 보스 몬스터들이 성현의 주위로 서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후… 젠장.”
파천의 일반 길드원들은 바짝 긴장한 듯 무기를 잡았다.
성현의 주위에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보스들 특유의 위압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숫자도 많고 최소 S급의 보스급 군주들이다 보니, 최고 간부라 해도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한데 그들을 포위하겠다고 앞에 선 일반 길드원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이건…….”
성현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이 정도 수준의 보스 몬스터들 앞에 일반 길드원을 잔뜩 세워 둔 안재현의 의도라면 뻔했다.
자신과 성현과의 싸움이 방해받지 않도록 군주들을 붙잡아 둘 시간 벌이로 길드원들을 희생시킬 생각이었다.
“길드원들의 희생 정도는 감수하겠다는 거냐?”
“어차피 B급 언저리의 평길드원 정도야 얼마든지 다시 채울 수 있다. 중요한 건 여기서 네놈을 죽이는 것뿐이지.”
사회 위치상 일반인보다 한참 위인 고위 헌터들임에도, 결국 최상위 헌터나 거대 길드에게 있어선 소모품일 뿐.
성현은 절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머리론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보니 우습게 느껴졌다.
“하지만 과연 승부를 보는 동안 네 길드원들이 버텨 줄 수 있을까? 네 생각처럼은 안 될 텐데. 이미 준비는 다 끝났어.”
“…그게 무슨 소리지?”
“난 정정당당한 것보단 불공평한 싸움을 좋아하거든.”
자신은 검사가 아닌 네크로맨서였다.
검과 검으로 대등한 입장에서 맞붙는 것보단.
아군의 숫자가 더 많거나, 상대가 제 전력을 내지 못할 피치 못할 상황이 가장 좋았다.
우우우웅!
[디버프, ‘저주’의 효과가 발동되었습니다!]
[디버프, ‘쇠약’의 효과가 발동되었습니다!]
[디버프, ‘부패’의 효과가 발동되었습니다!]
“이… 이건?”
안재현의 눈빛이 당혹감에 휩싸였다.
하늘 위로 드리워진 결계에서 빛을 발하며, 이 안에 있는 모든 적에게 효과가 발동되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제, 젠장… 몸이…….”
리치들의 군주이자 저주술사인 네이아의 특성.
자신이 장악한 결계 내부에 있는 모든 적에게 저주를 내린 것이었다.
정시영이 마법진과 결계를 구축하는 데 공을 들여 둔 만큼, 네이아는 더욱 편하게 강력한 광역 저주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제야 좀 대등한 싸움 같네.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