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파천 (3)
쿠구구구구!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거세게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계 내부에 있던 모든 이의 시선이 하늘 위로 향했다.
“이… 이게 뭐야!”
파천의 헌터들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결계 중심부에 커다란 검은 균열이 생겨난 모습.
이미 검게 물든 하늘 위에서 어마어마하게 쏟아지는 괴물들이 보였다.
“키이이이익!”
모습을 드러낸 와이번과 밴시들이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었다.
최소 천 단위의 몬스터가 하늘을 한가득 메우며 나타났고, 기세 좋고 결계 안으로 밀고 들어오던 파천의 헌터들은 당황하고 말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갑자기 미확인 던전이라도 발생한 건가?”
타길드의 헌터들과 싸우러 왔더니 난데없는 몬스터 무리가 쏟아지고 있는 상황.
하지만 하늘 위에서 나타난 몬스터들은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일 뿐, 그저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했다.
“크아아아아!”
지상에서 쏟아지는 그림자 군단의 모습.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결계로 인해 강력한 간섭을 받던 장소였지만, 지금은 되려 도시를 뒤덮은 거대 소환진이 되어 버린 꼴이었다.
그로 인해 결계 안 도심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인 대규모 소환이 이루어졌고, 사방에서 괴수들이 쏟아졌다.
물론 사방으로 몰려드는 이 괴수 군단은 시민이나 도시를 파괴하는 데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오직 겁도 없이 이 안에 발을 들인 파천의 헌터들을 향해서만 달려들었다.
“놈들이 달려든다!”
“젠장, 빨리 무기 들어!”
파천의 헌터들은 무기를 일제히 뽑아 들었다.
전원이 B급 이상의 고위 헌터들로 구성된 파천이었고, 당연히 이런 괴수들을 상대하는 데에도 아주 능숙한 이들이었다.
고위 헌터라면 그에 걸맞은 수많은 경험이 뒷받침해 주는 것이 당연했고, 어지간한 돌발 상황에도 동요하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길드원들이 수천 명 가까이 결집해 있었다.
당연히 어지간한 몬스터 대군이 떼거리로 쏟아져 봐야 순식간에 쓸려 나갈 뿐일 터.
이 정도 수준의 전장에선 단순 숫자만으로 밀어붙이는 건 의미가 없었다.
콰아아앙!
“크아아악!”
고대 골렘의 팔에 맞은 헌터들이 나가떨어졌다.
지금 그들의 앞에 나타난 검은 군단은 ‘단순 숫자’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최소 배 이상은 많은 숫자로 몰려드는 괴수들은 그 모든 개체 하나하나가 매우 강했다.
“이런 젠장 할……. 무슨, 검이 들어가질 않아……!”
남자가 저린 팔을 붙잡고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맞붙은 철갑 거미의 단단한 갑피 탓에 제대로 뚫기도 어렵고, 갑피를 뚫는다 해도 어지간한 상처로는 쉽게 쓰러지려 들지도 않았다.
일반 몬스터라고는 해도 레벨만 200을 가뿐히 넘어선 데다가, 군단 보너스로 체력 스탯과 생명력까지 뻥튀기가 된 덕에 거의 고위 던전의 준보스급 몬스터 수준으로 질긴 생명력을 보이는 것이다.
“대체 몇 마리가 끝이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어!”
전투가 지속됨에도 줄어들 생각을 안 하고 나타나는 괴수 군단에 점점 길드원들의 피해가 커져 갔다.
오히려 수가 더 늘어난 군단이 결계 속 도시의 거리 곳곳을 메우고 있었고.
거기에 성현은 마지막 쐐기를 박아 넣었다.
콰아아앙!
콘크리트 바닥을 요란하게 부수며 나타난 괴수들의 등장.
“자, 자이언트 앤트?”
“다들 발밑을 조심해!”
땅굴을 파고서 솟구쳐 나온 자이언트 앤트의 습격이었다.
거대한 덩치를 지닌 놈들의 갑작스러운 난입에 전장엔 소란이 일었다.
무려 수만 마리의 거대 개미가 사방에서 쏟아져 나왔고, 헌터들은 완전히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퀴이이이익!
“끄아아악!”
그야말로 압도적인 숫자였다.
불과 며칠 전, 던전의 새로운 필드를 개척하며 얻은 전력을 성현은 아낌없이 쏟아부어 주었고.
파천이 함정으로 놓은 결계 내부는 검은 그림자를 품은 개미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 * *
콰아아앙!
요란한 폭음과 함께 자이언트 앤트의 시체가 기우뚱 쓰러졌다.
달려들던 자이언트 앤트를 단 한 방에 즉사시켜 버린 남자의 실력.
하지만 그의 표정은 전혀 좋지가 못했다.
지금 순간에도 엉망이 되어 가는 주변 상황이 훤히 눈에 들어오고 있는 탓이다.
“젠장 할. 역시 보통 몬스터가 아니야.”
개미의 시체를 내려다본 남자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성현의 군단 버프까지 적용받은 고레벨의 몬스터들.
당연히 외부에서 끌어들인 협력 길드나 용병들이 감당해 내기엔 어림도 없었고, 거대 개미에게 걷잡을 수 없이 쓸려 나가 버렸다.
거기다 이는 파천의 헌터들이라고 해도 간부급이 아닌 이상에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아마 영왕의 소환수겠지.”
그러자 남자의 옆에 서 있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성현을 습격했던 파천의 최고 간부 중 하나였다.
“죽을 뻔했던 오정우를 살리긴 했지만, 갑자기 몬스터가 쏟아지는 바람에 영왕 녀석도 놓쳐 버리고, 결국 이런 난장판이 다 됐네.”
그녀는 여전히 사방에 우글거리는 개미들의 기척을 읽을 수 있었다.
이지스 길드와의 일전을 위해 끌고 왔던 그 많던 산하 길드와 외부 용병들은 이미 박살이 나 결계 밖으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물론 결계 안에 남아 전투를 치르고 있는 파천의 피해도 상당했다.
“대규모 소환수에 대해선 이야기를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이야……. 전혀 예상 못 했어.”
“우리가 예상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사전에 받았던 정보에선 절대 이 정도가 아니었으니까. 특히 이런 개미 대군은 나타난 적도 없는 놈들이고.”
남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영왕이 대규모의 소환수 군단을 다루던 모습이라면 여태 여러 번 목격된 적이 있었다.
지금 하늘 위를 돌아다니고 있는 벤시나 와이번들의 존재 역시 파천에선 이미 인지를 하고 있었다.
언제나 모두의 주목을 받는 S급 헌터들이 그렇듯.
성현도 전투에 나설 때마다 시선이 집중되어 외부에 전력이 조금씩 노출이 되는 건 피할 수 없었다.
한데 갑작스럽게 등장한 이 엄청난 숫자의 개미 떼는 완전히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상대는 언데드를 다루는 S급의 네크로맨서다.
한 번 얻은 시체를 영구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그가 최고 등급에 가까운 특성을 지닌 것이라고 가정하면 되었다.
하지만 지난번 청성과의 전투 이후.
얼마 되지도 않은 시간 사이에 이 많은 개미 몬스터는 대체 어디서 충원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긴, 상황이 정상적으로 흘러갔다면 애초에 이런 몬스터들의 소환부터가 차단되어 있었겠지.”
그녀의 고개가 슬쩍 올라갔다.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인지, 평소의 색과는 달리 불길한 검은빛으로 물들어 있는 결계의 벽이었다.
결계를 맡은 정시영의 쪽에서 이런 문제가 생긴 적은 최근 수년 사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철저하게 준비가 되었던 작전에 이런 변수가 생겨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쨌든 이대로는 안 돼. 피해가 너무 커지고 있어. 고작 이런 변방 길드 하나 상대하느라 힘을 다 뺐다간, 남부 지역을 모두 삼킨다 해도 소화가 되기도 전에 태산에게 당할 거야.”
“그래, 이런 잡몹들을 신경 쓸 시간에 서둘러 놈부터 찾아 제거해야겠지.”
둘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9대 길드인 태산이라는 숙적이 남아있는 이상, 피해를 최소화시키기 위해 빨리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놈이 대체 어떻게 결계의 허점을 뚫어낸 건지는 몰라도, 이런 상황에서라면 답은 한 가지뿐이다.
이 언데드 군단을 거느리는 본체를 잡아내는 것이다.
“신호가 왔다!”
달아났던 영왕의 위치에 대한 정보.
줄곧 기다리고 있던 그 신호에 둘은 동시에 발을 박찼다.
* * *
저벅저벅.
성현이 반파된 건물의 입구에서 나왔다.
이미 민간인들은 모두 외곽 지역으로 대피를 해 텅 비어 있던 고층 건물이었지만, 방금 흩뿌려진 피가 성현의 코트에 조금 묻어 있었다.
이즈나와 문밖으로 함께 걸어 나온 성현은 우뚝 멈춰 섰다.
“음…….”
줄줄 흐르는 점액질과 부서진 몸 조각.
성현이 용건을 보러 간 사이, 건물 입구를 지키고 있던 개미들이 모두 죽은 채 널브러져 있었다.
입구 앞에서 파천의 헌터들이 성현을 반겼다.
물론 일반 길드원이 아닌 S급 전력인 여섯 명의 최고 간부들이었다.
“여기 있었군.”
“아까는 방심한 틈에 엿을 먹이고 도망갔다만, 두 번은 안 통할 거다.”
철컥!
가장 앞에 선 남자가 살벌한 기운을 풍기며 무기를 뽑아 들었다.
다른 최고 간부들 역시 제각기 무기를 뽑아 들며 성현과 이즈나를 둘러쌌다.
예상도 못 한 소환수 군단이 쏟아지며 상황이 악화된 만큼,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이 자리에서 잡아낼 작정이었다.
아무리 성현이라도 일반 간부직도 아니고 S급 헌터 여섯을 동시에 상대하기란 무리였다.
S급 헌터 정도가 되면 단순히 강력한 힘을 지녔음은 물론, 각자 지닌 특성과 숫자의 이점을 훨씬 더 잘 활용할 수 있었다.
하나 성현은 여섯 명의 S급 헌터를 앞에 두고도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직접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찾아와 주다니 고마운걸.”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보군. 이깟 장난감들을 불러왔다고 해서 우릴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나?”
남자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S급 헌터들에겐 몬스터로 우글거리는 최상위 던전을 파티도 없이 홀로 클리어하는 게 평소의 일상이었다.
거대 개미 수백, 수천 마리가 몰려들건 말건 모조리 베어 가르면 되었다.
그래 봐야 일반 몬스터인 것은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지금 헌터들의 발아래에 깔려 있는 자이언트 앤트들의 시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니.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 너희지.”
성현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끈적한 혈흔이 남겨져 있는 그의 칼날이 검은 기운을 머금었다.
“아직도 결계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으니 말이야.”
“뭐라고?”
성현이 방금 나온 이 건물은 결계를 유지하던 정시영이 마법진을 그리고서 자리 잡았던 장소였다.
이는 나중에 합류한 파천의 간부들조차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하지만 역추적을 해 둔 네이아에게서 마법진의 정확한 좌표를 전달받은 성현은 그녀의 위치를 찾아다니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었다.
“설마 여기서 정시영을……. 하지만 결계는 아직 부서지지 않았는데.”
“내가 결계를 왜 부숴?”
우우우우웅!
“그대로 이용하면 되는 걸.”
결계의 주도권을 잡은 네이아는 결계를 변형시켜 마법은 물론 수하들의 소환까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존에 설계된 마법진의 구조적 반발과 시전자인 정시영의 저항과 반격은 여전했기에, 훨씬 강력한 존재인 군주들을 이 안으로 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성현이 정시영의 위치를 찾아 손을 썼고.
네이아는 결계에 대한 완전한 장악을 끝냈다.
단순히 주도권을 잡은 걸 넘어서 모든 지분을 가져오며, 완전히 자신의 통제하에 둔 것이다.
츠츠츠츳!
성현의 발치 아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한 마디로 말해… 이 결계는 더 이상 나를 잡기 위한 덫이 아니라, 너희가 묻힐 무덤이라는 뜻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