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파천 (2)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이 안에 너희 둘밖에 없다는 것 정도야 파악한 지 오래다. 네가 이 상황을 뒤집는 건 불가능해.”
오정우가 허세 부리지 말라는 듯 말했다.
그들이 나섰을 때에는 이미 주변의 모든 걸 파악하고서 견적까지 짜 맞춘 후였다.
결계의 존재 때문에 외부에서 개입해 오는 것마저 불가능했다.
영왕이 갑작스럽게 우회해 결계를 칠 것까지 대비해 S급의 용병까지 정시영의 옆에 붙여 놓았다.
말 그대로 모든 변수를 차단한 상황이었다.
비록 감춰져 있던 영왕의 전력이 생각보다 강하고, 이런 전투 방식을 보일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 못 했다고 해도.
네크로맨서로서의 마법이 봉쇄된 와중에 억지로 버텨 내는 것 말고는 영왕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건 곧 있으면 알게 되겠…….”
성현이 시큰둥하게 말을 받아치려는 순간.
등 뒤편에서 섬뜩한 기척이 느껴졌다.
콰아아앙!
그의 심장을 노리고서 날아든 강력한 투창.
한참 떨어져 있던 지점에서 쏘아지던 것과는 달리, 바로 지근거리에서 날아든 창이었고 그만큼 반응할 시간이 적었다.
물론 미리 위협을 느낀 성현은 아슬아슬하게 옆으로 몸을 빼내었다.
로칸에게서 가져온 특성인 무투술의 효과로 반사 신경과 속도는 물론, 감각까지 증폭되어 있었기에 반응할 수 있었다.
후두두둑.
창이 꽂힌 자리가 움푹 파이며 도로가 엉망이 되었다.
“이번 것까지 간단히 피해 낼 줄이야.”
성현의 뒤편에서 나타난 S급의 헌터, 유석환.
사나운 인상에 근육질의 거구를 지닌 남성이자, 길드 소속을 가지지 않는 용병들 중 유일한 S급의 창술가였다.
“투창을 할 때부터 대강 예상이야 했지만, 드디어 직접 모습을 드러내셨군.”
두 명의 S급 헌터에게 앞뒤로 포위당하듯 둘러싸인 성현이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제법 여유로웠다.
그가 여기에 나타난 것부터가 놈들이 세웠던 기존의 계획과는 달라졌다는 것이었고, 실제로 그의 등장에 아군인 오정우의 표정이 더욱 찌푸려졌다.
“여긴 왜 나타난 거지? 내가 결계 쪽을 지키라고 했을 텐데.”
“상관인 것처럼 명령하려 들지 마라.”
“고용주로서 이야기하는 거다. 입에 돈을 처넣었으면 제대로 일을 해야지.”
“하. 방금 걸 보고도 모르겠나? 놈은 방금 그 거리에서도 내 창을 피했다. 어차피 투창 정도론 아무 의미가 없어. 그리고 자신만만하던 것과는 다르게 싸움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나라도 직접 나서서 거들어야지.”
“그거야 네 판단일 뿐이고. 어차피 시간이 끌리면 녀석만 불리해질 뿐이다. 결계 옆이나 얌전히 지킬 것이지. 이래서 용병 놈들이란…….”
오정우가 한껏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유석환의 돌발 행동은 괜한 변수만 만들어 낼 뿐.
파천의 길드장, 안재현이 최고 간부들을 비롯한 길드의 모든 전력을 이끌고서 직접 이곳에 찾아오고 있었다.
결계로 지역의 통제권까지 쥐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어차피 시간은 그들의 편이었다.
정말 싸움이 끝나지 않아 이대로 대치만 해도 영왕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석환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아니.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문제라고?”
“결계 쪽에 문제가 생겼어.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당장에라도 녀석을 처리해야 한다.”
“그게 무슨…….”
유석환의 말에 오정우는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도시를 둘러싼 거대한 결계는 여전히 굳건히 작동을 하고 있었고, 안팎을 차단한 채 조금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대체 무슨 문제가 발생했다는 건지 의아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콰아아아앙!
“무, 무슨……?”
도시를 뒤흔드는 커다란 폭음이 결계 안을 가득 메웠다.
거기다 반대편 거리에서 솟구친 거대한 화염.
갑작스레 어마어마한 화염 폭발이 일어난 것이었다.
결코 일반적인 사고가 벌어진 것이 아니었고, 헌터가 힘을 쓴 것이라는 것쯤은 한눈에 구별할 수 있었다.
‘영왕의 옆에 붙어 있던 여자가 마검사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마법이라면 완전히 봉인이 되었을 텐데?’
고개를 돌린 오정우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안티메이지인 정시영의 결계가 멀쩡한 이상 내부에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S급의 마법계 헌터라 한들 예외는 없었다.
콰아아앙!
하나 또다시 들려온 폭음과 함께 잔해 더미들이 나뒹굴었다.
조금 전의 폭발보다도 더욱 막강해진 화력이었다.
그리고 바로 옆 거리에서부터 하늘로 솟구쳤던 화염 기둥이 잦아들자 잠시 정적이 일었다.
타악!
무너진 벽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이즈나.
뺨에 피를 묻히고서 나타난 그녀는 앞뒤로 있는 오정우와 유석환을 번갈아 바라봤다.
“여기 모여 있었군.”
“네놈은…….”
털썩!
남자의 시체가 내던져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즈나와 싸움을 벌이고 있던 헌터였다.
파천의 S급 헌터이자 최고 간부가 당한 것이었고, 그러자 오정우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주군,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 딱 좋았어. 뒤쪽은 네게 맡긴다.”
스릉!
다가온 이즈나가 옆에 서자 성현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곤 칼날에 자신의 마력을 불어넣었다.
검은 기운이 일렁이는 심상치 않은 모습에 반응한 오정우였고, 성현은 단숨에 그를 향해 발을 박찼다.
그 모습을 본 유석환은 곧장 창을 들어 올리며 등을 보인 성현을 꿰뚫으려 했지만, 이즈나가 검을 휘두르며 끼어들었다.
“어딜. 네 상대는 나야.”
콰아아아앙!
요란한 폭발에 휘말리며 이즈나와 유석환은 한참을 떨어져 나갔다.
덕분에 성현은 방해꾼의 훼방 없이 오정우와 마주하였다.
“마법을 저렇게 연달아 사용할 수 있다니……. 결계에 이상이 생긴 건가.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그거야 알 것 없고.”
카아앙!
성현은 검을 휘두르며 더욱 오정우를 몰아붙였다.
외부에서 네이아가 손을 써 주고 있는 덕분에 결계가 약해지고 있었다.
물론 결계를 통제하고 있는 정시영도 결코 만만하게 주도권을 내줄 자는 아니었다.
때문에 바깥에 있는 수하들을 결계 안쪽으로 불러내는 소환 마법까지는 아직 무리였다.
하지만 주도권을 빼앗으려는 네이아의 공세에 대규모 결계는 지금도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육안으로도 보일 만큼 검은 균열이 결계에 서서히 가고 있었다.
덕분에 백귀야행 특성으로 가져올 수 있는 특성까지 일부 봉쇄되었던 방금보다는 훨씬 자유롭게 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아무리 네이아라 해도 결계 바깥에서는 개입하는 데엔 한계가 있을 테니까. 완전히 결계를 장악할 가능성은 적어. 그렇다면 이 틈을 이용해 빨리 여길 처리하고 정시영을 베어 결계를 무력화시켜야 한다. 자칫 잘못했다간 둘이서 파천 길드 전체를 상대해야 할 수도 있으니 서둘러야겠지.’
[군주, 카론의 그림자를 흡수하였습니다!]
[‘민첩성’ 특성이 활성화됩니다!]
다크엘프 카론의 특성을 가져온 성현.
검을 뽑아 든 이상, 격투 능력을 증폭시키는 무투가 특성은 장점이 꽤나 죽어 버리기 때문에 곧바로 전환을 한 것이다.
그러자 몸을 놀리는 성현의 움직임은 완전히 속도가 달라졌다.
카가가각!
‘제, 젠장. 어떻게 네크로맨서가 이런 움직임을……!’
숨 막힐 듯 날아드는 성현의 칼날과 공세에 오정우는 이를 까득 깨물었다.
마치 빠르게 정리라도 해 버리겠다는 듯 템포를 올린 그의 움직임에 곤욕을 치르는 중이었다.
니아글리프 그리고 3성인 성찬일과의 싸움까지도 끝낸 뒤 워낙에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던 성현이었고, 덕분에 파천의 오른팔인 오정우마저도 압도하고 있었다.
‘소환수도 꺼내지 않은 네크로맨서가 이런 힘을 가지고 있다니. 이건 말이 안 되는…….’
상식을 깨는 성현의 전력에 오정우는 당혹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에게서 아주 작은 빈틈이 보인 순간, 성현은 곧장 특성을 발동했다.
[군주, 이즈나의 그림자를 흡수하였습니다!]
[‘마력의 심장’ 특성이 활성화됩니다!]
콰과과광!
전혀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마법이 코앞에서 터져 나왔다.
강력한 화염 폭발에 직격으로 휘말려 버린 오정우였고, 한참을 튕겨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컥…….”
피를 한 움큼 토해 낸 오정우가 땅을 짚었다.
강령술과 무투술, 검술까지 보인 성현이었다.
한데 설마 이런 위력의 공격 마법까지 터져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고, 대처할 새도 없이 당해 버린 것이다.
엉망이 된 오정우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네놈, 대체 정체가 뭐지? 네크로맨서라는 건 다 눈속임이었나……?”
“아니. 네크로맨서인 건 확실해. 이 능력들도 다 거기서 나온 거니까.”
“그렇다면 대체…….”
“미안하지만, 너하고 느긋하게 대화할 시간은 없어서.”
말을 끊은 성현은 성큼성큼 오정우에게로 다가섰다.
언제 파천의 본대가 결계 안으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이다.
얌전히 말이나 들어 주기엔 서둘러 그를 끝내고서 정시영이 있는 쪽으로 향해야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쿠우우웅!
날아든 대검이 성현의 발치 바로 앞에 박혔다.
우뚝 멈춰 선 그의 옆 거리에서 헌터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오정우, 꼴이 말이 아니군.”
“설마 너까지 당할 뻔하다니. 하핫, 큰일 날 뻔했어.”
본대를 이끌고서 나타난 파천의 최고 간부들이었다.
새롭게 난입한 S급 헌터만 무려 여섯 명.
심지어 그들이 전부가 아니었다.
당장 그들을 따라 결계의 범위 안으로 들어선 파천의 길드원들만 수천이었고, 나머지 인원 역시 이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끝났군.”
쓰러져 있던 오정우의 표정이 비틀렸다.
아무리 성현이라 한들 S급 헌터인 파천의 최고 간부 여섯을 동시에 감당하기란 불가능했다.
본대의 합류 한 방으로 상황은 완전히 반전된 것이다.
하지만 성현은 가만히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고요하게 술렁이고 있는 결계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설마 이 정도로까지 해 줄 줄은 몰랐는데…….”
성현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것도 딱 좋은 타이밍이야.”
* * *
우우우웅!
고층 건물의 옥상 위에 선 정시영이 결계를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발치 아래엔 빼곡히 그려 놓은 커다란 마법진이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런 대형 결계를 유지하는 데에는 필수적인 마법적 보조 장치였다.
아무리 강하다 한들 인간의 마력엔 한계가 있는 법이었으니 말이다.
하나 그녀가 설계하고 그려 뒀던 이 마법진은 서서히 검은빛으로 물들어 가는 중이었다.
“큭… 이럴 수가…….”
정시영의 팔이 덜덜 떨렸다.
외부의 마력으로 빠르게 잠식되고 있는 결계를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탓이다.
“통제권을 빼앗으려 하고 있어. 그것도 결계 바깥에서. 국내에서 이런 솜씨를 지닌 실력자가 있었다니…….”
정시영의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흘러나왔다.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녀로선 전혀 생각지도 못한 훼방꾼이었고, 녀석이 지닌 실력조차 자신보다 월등했다.
“뭐, 인간치고는 제법 오래 버텼네요.”
네이아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결계에 손을 얹고 있었다.
수천 년을 넘게 살아온 리치들의 군주답게, 마법에 대한 이해도는 감히 인간이 따라올 수준이 아니었다.
마력량 역시 보스 몬스터인 네이아가 압도적인 수치를 지니고 있었고.
결국 통제권의 절반 이상을 빼앗기며 이곳 결계의 주도권을 네이아가 쥐게 되었다.
쿠구구구!
검게 물들어 가는 거대한 결계의 모습.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승희는 쾌재를 불렀다.
“돼, 됐다! 이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거야?”
“아뇨. 그건 조금 더 기다려야 해요. 백 퍼센트 장악이 끝난 건 아니라서.”
보채는 듯한 한승희의 말에 네이아는 고개를 저었다.
결계를 완전히 파쇄하는 것은 여기서 통제권을 더 빼앗아야 가능한 일이다.
반대편엔 이미 파천의 본대가 도착했다고 하는데, 당연히 좋지 못한 소식이었다.
이대로는 저 안에 있을 성현이 위험했다.
하지만 결계와 마법진의 구조에 약간의 변형을 주는 것 정도는 지금도 가능한 일이었다.
“뭐? 변형을 준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예요.”
네이아는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법 파쇄는 재미없으니… 하늘을 뒤덮은 대규모 소환진으로 바꿔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