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손님맞이 (3)
콰과과광!
움푹 파인 바닥이 연기를 토해 냈다.
뻥 뚫린 벽 사이로 쓰러진 헌터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그 앞엔 가면을 쓴 성현이 서 있었다.
“벌써 끝인가.”
아주 간단하게 헌터들을 정리해 버린 성현.
검을 제대로 뽑지도 않고서 수십여 명의 상위급 용병을 쓰러뜨린 것이다.
“아니, 끝은 아니지.”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이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간단히 끝날 일이었다면 거창하게 가면을 쓰고 나설 것도 없이 적당히 일을 처리하고서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 전 소란을 기점으로, 주변에서 동시다발적인 기척과 소란이 느껴지고 있었다.
‘여기 있는 녀석들이 전부가 아니야.’
성현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제법 많은 헌터들의 기척이 이 주변 지역에 갑작스레 나타났다.
허접한 D나 E급 헌터들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이 정도 규모의 동시다발적인 공격이 필요할 대형 길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여태 감쪽같이 기척들이 감춰져 있던 것도 그렇고,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나. 일단 움직여야겠군.’
성현은 빠르게 건물 밖으로 나왔다.
길드들에게 확실한 공포를 안겨 주겠다는 전략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노린 것인지 아직은 모르지만.
어찌 됐건 녀석들의 계획대로 일이 흘러가면 앞으로의 일이 귀찮아진다.
파앗!
그때, 거리로 나오려던 성현의 앞에 이즈나가 나타났다.
“용호 녀석은 어떻게 했어?”
“분부하신 대로 충분히 떨어진 장소에 옮겨 뒀습니다. 약간의 당부도 겸해 뒀죠.”
“하아, 그래. 어쩔 수 없겠지.”
성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헌터들 간의 싸움으로 인해 터져 나온 잔해 파편들.
만약 그 순간에 정체를 숨긴답시고 가만히 있었다가는 시민 수십여 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것이다.
대낮에 도시 한복판에서 벌어진 헌터들 간의 싸움이다.
그것도 주변 피해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듯한 행동이었고, 목표를 제거하는 것만이 최우선 순위인 듯 보였다.
이런 과격한 지시를 내린 이들이 누구일지야 뻔한 일.
파천 길드라면 백룡 길드 뺨칠 만큼 여론에 큰 신경을 쓰지 않는 자들이었고, 특히나 상대를 가리지 않고서 과격한 수를 마음껏 사용하는 이들이었다.
“혈마법을 사용한 거지?”
“네.”
성현이 묻자 이즈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면을 쓰지 않았던 성현의 모습을 직접 보았던 최용호인 만큼 가만히 돌려보낼 순 없는 일이다.
사실 원래대로라면 친구든 뭐든 제거하는 편이 가장 깔끔하고 헌터 길드답겠지만, 그럴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놈들과 똑같은 모습이 되지는 않기로 했으니 말이다.
“미리 경고도 해 뒀고, 마법도 눈치채지 못하게 걸어 뒀습니다. 비밀을 누설하려 들면 바로 알 수 있죠.”
최용호는 헌터가 아니라 마력에 대한 감각이 아예 없었고, 자신이 무얼 당했는지 알아채지도 못했다.
이즈나의 솜씨가 갈수록 늘어 가는 덕에 하급 헌터들도 감쪽같이 속일 수 있을 정도였는데, 일반인 한 명의 감각을 속이는 것쯤이야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그래도 이곳 일만 끝나면 찾아가서 따로 이야기를 해 둬야겠어.”
후우우웅!
성현이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던 그때.
귓가를 울리는 섬뜩한 파공음이 다가왔다.
“조심……!”
콰아아아앙!
성현과 이즈나는 동시에 몸을 놀리며 양옆으로 흩어졌다.
정확히 그들이 선 자리를 노리고서 날아든 투창에 바닥이 움푹 꺼졌고, 건물의 입구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이건 또 무슨…….”
옆을 바라본 성현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자신을 노리고 날아든 것은 확실하나, 평범한 공격이 아니다.
성현이 신경 쓰고 있던 범위조차 벗어나 있을 만큼 굉장히 먼 거리에서 날아든 투창.
거기다 위력과 속도 역시 대단했다.
주변을 요란하게 때려 부순 듯 보여도, 진짜는 점으로 집중된 위력이었다.
조금이라도 반응이 늦었으면 성현이든 이즈나든 그대로 꿰뚫릴 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성현이 날아든 창의 방향과 거리를 계산하려던 그 순간.
츠츠츠츳!
반투명한 벽들이 사방에서 솟아났고, 위를 향해 뻗어졌다.
그렇게 거대한 돔 형태를 이룬 결계들.
“이건… 던전?”
“아니. 던전이 아니야.”
성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 역시 두 번이나 겪은 적이 있던 결계형 던전이었으나, 이번은 그때와는 명백히 달랐다.
겉보기엔 비슷해 보여도 던전이 만들어 낸 결계가 아니었다.
‘도시를 통째로 고립시킨 결계다. 이 정도의 결계를 유지하는 게 가능하려면 최소 S급의 헌터가 필요해. 이런 수를 쓰는 건 9대 길드 중에서 파천밖에 없지.’
적을 원하는 전장으로 끌어들인 뒤 통째로 결계에 가두는 것.
파천이 종종 즐겨 사용하는 방식이다.
싸움 도중 벌어지곤 하는 자신들의 만행이 바깥으로 알려지지 않고 확실히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날뛸 수 있는 판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물론 적의 지원을 차단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지만, 파천의 헌터들에겐 그저 부차적인 이유일 뿐.
많은 경기권의 길드가 파천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이유 중 하나였다.
놈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얼마든지 잔혹해질 수 있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재미를 얻는 것은 덤이었다.
후우우웅!
또다시 투창이 날아들었다.
눈으로 쫓기 어려울 만큼 보다 더 빨라진 속도에 성현은 급히 몸을 움직이며 빼냈다.
하지만 몸을 던진 그 순간, 등 뒤에서 나타난 칼날이 그를 노렸다.
촤아아악!
“큭…….”
하필 날아드는 창을 피하느라 자세가 흐트러진 와중에, 갑작스러운 기습까지 당하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복부를 얕게 베인 탓에 피가 흘러나왔다.
그나마 도중에 이즈나가 끼어들어 준 덕분에 치명상은 피한 것이다.
“네놈들은 뭐지!”
이즈나가 날이 선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검을 든 채 나타난 두 명의 남자가 바로 섰다.
“본격적으로 붙기 전에 간부나 미리 한두 명쯤 처리하려 했더니, 생각지도 않은 대어가 걸려들었군.”
파천의 길드복을 입고 있는 이들.
그것도 일반 길드원이 아닌 파천의 최고 간부이자 두 S급 헌터, 오정우와 이진이었다.
9대 길드의 최고 간부쯤 되면 당연히 얼굴 정도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바.
그들을 본 성현은 입을 열었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더라니. 최고 간부가 둘씩이나 나서서 중견 길드들이나 겁주려고 왔을 리는 없을 테고. 처음부터 너희가 마련해 둔 함정이었나?”
“그래, 맞다. 설마 겁도 없이 길드장이 직접 나타날 줄은 몰랐다만, 너흴 위해 이 자리를 마련한 건 사실이지. 하지만 하나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 있는 건 고작 둘이 아니라 넷이거든.”
앞으로 한 발 나선 오정우가 씨익 웃었다.
자신만만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성현이 말했다.
“…S급 헌터가 넷이라고?”
“최근 너희가 청성과 맞붙으면서 야금야금 전력을 갉아먹었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다. 운이 따랐든 실력이든 간에, 당연히 우리가 아무런 대비도 없이 똑같이 당해 줄 수는 없지.”
보다 열세인 상대에게 휘둘려 줄 필요 따윈 없다.
곳곳에서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는 것이 아니라, 빠르게 전면전만을 위해 달려가고 있던 상황.
거기다 파천은 최소한의 변수가 발생할 일조차 없도록 상황을 짜 맞추고 있었다.
“여기서 살아나갈 생각 따윈 버려 두는 게 좋을 거다.”
츠츠츠츳!
그사이 완성이 된 결계가 완전한 돔의 형태를 이루었다.
그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강력한 결계.
일반적인 던전의 결계가 아닌 덕에 시전자의 의지를 따르는 결계였고, 안팎을 오가는 것은 오로지 시전자의 뜻에 달려 있었다.
즉, 이지스의 헌터들이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것과는 달리 파천의 길드원들은 얼마든지 이곳 안으로 더 들어설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결계의 진가는 따로 있었다.
파아아앗!
‘큭……. 역시 안 되나.’
혹시 몰라 마법을 사용해 보려 했던 성현은 순간 휘청이고 말았다.
파천의 S급 헌터, 정시영.
그녀는 마법 파쇄 특성을 지닌 강력한 안티메이지였고, 결계 내의 모든 마법을 무력화시키는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파천에서 이런 결계를 만들 만한 자라면 녀석뿐이야. 이걸 깨려면 놈의 위치를 찾아야 하는데…….’
성현은 잠시 시선을 돌렸다.
물론 상대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봐 주지 않았다.
쩌어엉!
바짝 다가선 오정우가 성현을 압박해 왔다.
아슬아슬하게 뺨을 스쳐 지나간 칼날.
“결계의 주인을 찾나? 하지만 잔머리 굴려 봐야 소용없어. 쓸 만한 용병까지 옆에 붙여 뒀으니까.”
콰아아앙!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투창이 또다시 날아들었다.
정확히 성현의 움직임을 읽고서 날아드는 창이었고, 조금만 늦었으면 다리가 절단 날 뻔했을 만큼 위협적이었다.
마치 코앞에서 S급 헌터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듯한 압박감에 놓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투창에 모든 신경을 쏟을 수도 없었다.
카아아앙!
당장 눈앞에서 들이닥치고 있는 칼날의 존재.
오정우는 안재현의 오른팔으로서 파천의 다른 최고 간부들에게 비해서도 우월한 전력에 있었다.
9대 길드의 오른팔 역을 맡을 만큼, 청성의 3성과 같은 수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재수 없던 청성의 두 놈을 쓰러뜨린 건 인정해 주마! 하지만 과연 네크로맨서가 소환수의 도움도 없이 싸울 수 있을까!”
오정우는 승기를 잡았다는 듯 말들을 쏟아 냈다.
소환수를 사용할 수 없는 네크로맨서 따위는 두 팔이 잘린 검사나 다름없었다.
이는 성현의 호위로 붙었던 이즈나의 쪽도 마찬가지다.
안티메이지인 정시영의 결계는 이즈나의 마법조차 막았다.
그로 인해 마검사인 이즈나의 전력 절반이 날아간 것이나 다름이 없었고, 파천의 다른 S급 헌터인 이진을 쉽게 떨쳐 내지 못하는 중이었다.
마법까지 봉쇄된 와중에 그와 비등한 실력을 보이는 것도 매우 놀라웠지만, 곤경에 처한 성현을 도와줄 형편은 되지 못했다.
그야말로 완벽한 함정에 빠뜨린 것이었고, 이 싸움은 이미 끝이 난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이제 확실한 마무리를 위해 오정우는 검을 휘둘렀다.
“이제 그만 끝을 내 주마!”
정확히 성현의 머리를 향해 날아드는 투창.
그리고 그 틈을 노려 동시에 오정우의 검이 심장을 향해 뻗어졌다.
[군주, 로칸의 그림자를 흡수하였습니다!]
[‘무투술’ 특성이 활성화됩니다!]
콰아아앙!
성현이 내지른 주먹에 오정우의 뒤편에 있던 벽들이 뻥 뚫렸다.
날아들던 투창을 정면으로 부숴 버린 데다가, 직접 닿지도 않은 벽들까지도 우르르 무너져 내린 모습.
“이… 이게 어떻게!”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벌인 일이다.
아무리 S급 헌터라 한들 네크로맨서로선 결코 불가능할 그의 괴력에 오정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칭찬을 받기만 하는 것도 뭐하니까 나도 하나 인정해 주지. 준비를 제법 열심히 했네. 마법도 봉쇄되고서 S급 헌터가 네 명이라…….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시험해 볼 만하겠지.”
성현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니아글리프를 처치한 이후, 상승한 전력의 수준을 헌터들을 상대로 시험해 볼 좋은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