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협상의 기술
성현은 새롭게 뚫린 두 번째 통로를 통해 던전으로 돌아왔다.
되돌아온 성현을 맞이한 것은 가디언이 버리고 떠난 성소의 입구였다.
가디언과 그 수하들이 사라져 텅 비어 버린 성소의 안이었고, 성현은 그 안을 뒤지다가 물건을 발견했다.
먼지가 가득 끼어 있는 오래된 고서.
하지만 낡았을 뿐 훼손된 부분은 조금도 없었다.
“기억의 고서… 역시 이번에도 있었군.”
성소에 잠들어 있던 고서의 두 번째 권이다.
성현은 주저하지 않고서 팔을 뻗어 고서를 쥐었다.
그러자 책으로부터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파아아앗!
[인벤토리가 열렸습니다!]
성현이 인벤토리를 먼저 연 것도 아닌데, 인벤토리 안에서 튀어나와 그가 지니고 있던 기존의 고서와 합쳐졌다.
새하얀 빛 속에서 하나의 책이 된 모습이었고, 군데군데 텅 비어 있던 장에선 새로운 내용들이 적히게 되었다.
“이건…….”
성현의 곁에 서 있던 이즈나에게까지 흘러들어간 새하얀 빛.
직접 보이진 않았으나 그녀를 비롯한 모든 마족에게 두 번째 기억의 파편들이 주입되었다.
그러자 성현은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어때, 뭔가 더 생각이 나?”
“네,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하지만…….”
이즈나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줄곧 고대하던 두 번째 기억을 되찾았음에도 아쉽다는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저번 고서를 통해 얻은 기억과 마찬가지로, 이번에 흘러들어온 것 역시 모든 분야에 걸쳐 파편화된 지식들이었다.
차라리 나뉘어 있던 한 분야의 모든 지식이 들어온 것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조각나 있어서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단순히 기억이 떨어져나간 것이 아닌, 마치 누군가가 강제로 기억을 쪼개 놓기라도 한 듯한 흔적들.
“…그렇단 말이지.”
이즈나의 말을 들은 성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몬스터를 조종하는 이질적인 미지의 힘에 더해, 성소와 가디언의 존재까지… 마족들의 기억이 부자연스럽게 봉인되어 있는 것도 그렇고. 단순 현상이라고 보긴 힘들어. 어쩌면 던전이 생겨난 원인과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처음으로 나타난 등급과 규모, 마족과 가디언의 존재 등.
지금껏 인류로선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개념들로 가득 찬 장소였고, 점점 이 던전의 안으로 들어갈수록 숨겨진 진실에 가까워지는 듯 했다.
‘더 속도를 낼 필요가 있겠어. 또 새로운 통로가 엉뚱한 곳에 뻥 뚫려 버리면 골치 아프니까.’
이런 저런 수단을 동원해 보았음에도, 던전의 새로운 통로를 붕괴시키는 것은 당장의 상황에선 불가능했다.
마법진으로 감춰 두기야 했다지만 분명한 위험요소다.
가디언이란 녀석들이 자신을 적대한다는 것은 이미 확실했고.
이런 치명적인 돌발 변수까지 만들어 내는 게 가능한 걸 봐선, 놈들을 가만히 방치할 수 없었다.
최대한 빠르게 가디언들을 제거해 변수를 제거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뭣보다 놈들이 지닌 정수를 취하며 군단 전체를 강화할 수 있는 만큼 돌아오는 리턴 역시 확실했으니 말이다.
지체할 것 없이, 성현은 이즈나와 함께 성소를 나섰다.
“모두들 준비시켜.”
“예, 주군.”
* * *
필드로 나선 성현의 군단은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 지역까지 단숨에 치고 나갔다.
니아글리프의 정수를 흡수하고서 아주 강력해진 군단의 전력.
각 군단과 군주들까지 대거 합세해 방어적으로 배치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공세를 취했고.
군단이 본격적으로 치고 나가자 인근 필드의 몬스터들은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필드를 장악해 나가고 있는 사이.
바깥소식을 전해 듣고서 던전을 나온 성현은 커다랗게 쓰여 있는 글자들을 마주했다.
“결국 터졌군. 백룡과 청성의 전쟁이라.”
드디어 소식이 들려왔다.
백룡과 청성 길드가 정면충돌하며 전면전 양상에 들어갔고, 이 소식에 많은 이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강남 지역 일부를 차지한 이지스를 공격하지 않고 백룡 길드를 우선적으로 공격하다니.
하나 성현으로선 예상한 범위 내의 일이었다.
여기 서 있는 뇌제 성찬일의 존재 덕이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네.”
“속일 이유가 없으니까.”
그의 말을 성찬일은 딱딱하게 받아쳤다.
청성의 최고 간부, 그것도 3성의 일원 중 하나인 그였다.
당연히 한인호에 버금갈 정도로 많은 권한을 쥐고 있었고, 그에게서 조금 더 깊은 내부 사정에 대해서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청성과 화신.
한인호와 최성준.
서울을 반으로 나눈 양대 길드이자 앙숙이자 강력한 라이벌 관계의 대표적인 길드와 길드장이다.
하나 알고 보니 그들은 그리 간단한 사이가 아니었다.
“국가 시스템을 무력화시키고 헌터 길드들이 주도하는 사회로 만든 것이 바로 그 둘의 작품이니까. 경쟁 관계에 있는 건 맞지만, 규칙을 깨려는 존재가 나타난다면 언제든 앞장서서 힘을 합칠 거다. 바로 너 같은 녀석이 나타났을 때처럼 말이야.”
성찬일의 시선이 그에게로 꽂혔다.
“…난 딱히 그 규칙을 깨겠다고 말하고 다닌 적은 없는데 말이지.”
“이지스 길드가 구역 내에서 취한 조치들만 봐도 마치 이전의 시대로 회귀라도 하려는 듯한 움직임이었지. 실제로 너희가 대형 길드를 흡수하며 본격적으로 덩치를 불린 이후, 청성의 최고위직 사이에선 제법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이지스 길드를 실질적인 체제의 위협으로 본 것이지.”
청성과 화신 길드는 사회의 규칙을 바꾸려는 자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최우선적으로 제거해왔다.
가장 강력한 두 세력이 암묵적으로 뒤에서 힘을 합쳐 손을 쓰니, 당연히 그 어떤 변화도 이루어질 수 없었다.
대혼란기가 막을 내리자마자 청성과 화신이 앞장서 정부를 사실상의 반신불수 상태로 만든 이후.
지난 십여 년을 넘게 줄곧 이어져 온 일이었다.
내부에 있던 성현은 물론, 청성의 일반 간부들조차 전혀 알지 못할 정도로 철저히 비밀리에 이루어져 온 작업들.
그 덕에 저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흔들림이나 아무 잡음조차 없이 유지해 올 수 있던 것이었다.
“체제를 바꾸고 하는 이들은 그동안에도 많았지만, 너희 정도로 거대한 세력을 이룬 적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한인호도 신경을 쓰고 있더군. 만약 네가 먼저 공격해 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조만간 우리 쪽에서 먼저 손을 썼을 거다.”
“하,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차라리 잘된 건가.”
“어찌 됐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진 이상 화신 길드까지 너흴 제거하려 움직일 건 확실해. 양대 길드가 힘을 합쳐 덤벼든다면 네게 승산 따윈 없겠지만. 그나마 수도권의 다른 거대 세력들이 그들의 전력을 받아 주고 있는 것이 네겐 다행인 점이지.”
성찬일의 날카로운 눈빛이 빛을 냈다.
그는 커다란 서류 뭉치를 성현의 앞에 툭 던졌다.
“이건…….”
“벌써 파천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기 지역 전역에 밑작업을 해두며 너흴 칠 준비를 하고 있더군.”
경기 남부 지역의 패권을 쥐고 있는 파천 길드.
그들은 속내를 감출 생각도 없는지, 백룡과 청성의 전면전이 터지자마자 대범하게 움직였다.
경기 남부 지역에 위치한 여러 준대형 길드들을 자신의 쪽으로 끌어들임은 물론, 외부의 용병 집단까지 모으는 중이었다.
“제대로 한판 붙을 작정인가 보네.”
접경 지역에 있던 내부 전력까지 남김없이 이쪽으로 돌리고 있는 파천 길드의 움직임이었다.
태산 길드를 강북의 화신 길드가 나서 틀어막는 사이, 이지스 길드를 통째로 집어삼킬 속셈이었다.
무려 세 개의 거대 길드가 엮여 큰 거래를 주고받은 정황이 뻔히 드러나 있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되면 조금 골치가 아픈데. 주변 세력들에게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걸 가만히 내버려 둘 수도 없고.’
그렇지 않아도 이지스는 파천에 비해선 세력 규모가 훨씬 작은 편이었다.
아직 전면전이 터진 건 아니라 해도, 저들이 벌이는 수작질을 가만히 지켜볼 순 없었다.
‘사냥을 좀 더 해두려 했더니. 성장할 시간도 없이 바로 움직여야겠어.’
성현의 표정이 슬쩍 찌푸려졌다.
무려 9대 길드인 파천과의 전면전이다.
싸움에 대비해 그때까지 대비책을 찾고 힘을 최대한 끌어올려 두려 했지만, 주변 상황을 수습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성찬일이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이라면 내게 맡겨 둬라. 청성과 직접 싸우지는 않겠다 했지만… 다른 길드라면 내 알 바 아니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타악!
성찬일은 자신의 창을 집어 들었다.
“아직 널 전적으로 믿는 건 아니지만, 협력하기로 한 이상 밥값은 하겠다는 거다.”
* * *
“뭐……? 이지스의 헌터들이 찾아왔다고?”
비인 길드의 길드장, 김후정이 말했다.
“예, 갑자기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는 이지스의 헌터들이라고…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간부까지 직접 찾아온 듯하고요.”
“간부? 정확히 누군지는 알 수 있나?”
“그게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어떤 자인지는…….”
“뭐, 상관없지. 시기상 이상할 건 없으니까. 파천이 움직이고 있다는 걸 놈들도 들은 모양이야. 가장 가까운 우리부터 포섭하겠다는 거군.”
김후정은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파천 길드는 경기 남부 전체에 터 잡고 있는 길드들을 빠르게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이는 서남부 지역 인근에 위치해 이지스와 훨씬 가까운 비인 길드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열세인 상황에 앞뒤로 적을 상대하는 것은 사절이었기에.
열댓 명가량의 이지스 측 길드원이 협상을 위해 비인 길드에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이지스의 간부라……. 소수인 대신 간부진의 전력이 굉장하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여기까지 직접 찾아오다니 발등에 불이 떨어지긴 했나 보군. 하기야, 파천 길드를 상대하게 생겼는데 어지간히 똥줄이 타겠지만.’
비인이라는 대형 길드를 이끌고 있는 김후정.
비록 S랭크에 달한 기간이 비교적 길지 않은 그였지만, 세력을 빠르게 키우며 대형 길드로서 자리 잡았다.
두 길드에 비할 바는 아니라 해도, 이 근방에선 가장 강한 영향력과 길드 규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걸 어쩌나… 내가 설 곳이라면 이미 정해졌는데.”
이지스의 길드원이 찾아오기도 전, 이미 파천의 제안을 받은 비인 길드였다.
저들의 말 따윈 들을 것도 없이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 뻔한 문제였다.
최근 놀라운 저력을 보였다 한들 신흥 길드가 아무리 날고뛰어 봐야, 9대 길드인 파천과 비할 바는 되지 못한다.
특히 저들이 파천의 길드장인 투왕을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야말로 격이 다른 강자.
다른 길드들 모두 고민조차 하지 않고서 파천의 편으로 붙고 있는 중이었고, 싸움의 결과에 대해선 의심의 여지조차 없었다.
“그럼 돌려보낼까요?”
“아니, 안으로 들여보내. 제안이나 들어 볼 겸, 좋은 생각이 하나 났으니까.”
김후정의 입가가 히죽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