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지각 변동 (3)
이지스와 청성 길드의 정면충돌.
이 충격적인 소식은 금세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이지스는 청성이 차지하고 있던 강남 지역의 일부를 빼앗으며 몇 개의 구역을 점거했고.
심지어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이지스의 길드장이 바로 청성과 단신으로 싸움을 벌이던 네크로맨서, 영왕(影王)이라는 것 알려졌다.
덕분에 이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전국이 발칵 뒤집어졌다.
여태 배후가 모호했던 영왕이 길드를 이끌고 있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뇌제 성찬일이 패했다는 소식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강남 지역 내에서 거대 길드 간의 대대적인 전면전이 일어날 거라 많은 사람이 예상했고 불안에 떨었다.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당장에라도 서로의 구역에 쳐들어가 유혈 사태가 나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
하나 성현은 건물 위에서 가만히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느덧 차량과 시민들이 멀쩡히 돌아다니며, 수습이 거의 다 끝난 거리의 모습이 보였다.
‘확실히 일처리 하난 믿고 맡길 만해.’
성현이 느긋하게 뒷짐을 지고 있던 동안, 한승희가 지휘해서 금방 끝을 내 버린 현장의 모습이다.
이렇게나 빨리 수습이 끝날 수 있던 가장 큰 이유 역시, 그녀가 피해를 복구할 전문 인력을 미리 잔뜩 끌고 온 덕이었다.
이번 싸움으로 인해 어느 정도의 피해가 생길 것을 정확히 예상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
그리고 때마침 한승희가 건물을 올라와 그에게로 다가왔다.
“수습은 거의 다 마무리됐어. 도시도 멀쩡히 굴러가고 있고.”
“수고했어.”
“수고한 걸 알면 일거리 좀 그만 쌓아 주지 그래?”
“그건 안 돼지. 인재를 썩힐 수는 없으니까.”
“…….”
잠시 심한 말을 참는 듯한 한승희의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용케 말을 꾹 삼켜낸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셈이야? 다음 계획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 어서 다음 싸움을 준비해야지.”
“그런 것치고는 너무 느긋해 보이는데? 우리가 이렇게 도시나 복구하고 있을 사이에, 벌써 청성 놈들이 이 구역 코앞까지 헌터들을 몰고 왔을 수 있다고.”
아직 싸움이 끝난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은 시점이다.
하나 이지스 길드는 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도발을 가한 참이었고, 언제 놈들이 기습적인 공격을 해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수도권의 거대 길드들이 아직 남아 있으니까.”
국내를 장악한 9대 길드 중.
수도권에 위치해 있는 5개의 거대 길드가 있었다.
이번에 맞부딪친 청성이 아니더라도, 다른 네 곳의 거대 길드 역시 전부 이쪽의 상황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을 것이었다.
이미 짜여져 고착화되어 있던 판세 위에 이지스라는 거대한 변수가 끼어든 셈이니 말이다.
그리고 이럴 때일수록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모든 전력을 짜내어 청성을 무너뜨린다고 해봐야, 싸움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른 거대 길드에게 통째로 집어삼켜진다면 의미 없는 짓일 뿐이었다.
물론 다른 길드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것은 청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 청성도 마냥 편히 움직일 수는 없겠지. 이미 너 때문에 S급의 전력도 적지 않게 잃었는데, 우리 쪽에 너무 전력을 쏟아붓다가는 기회만 엿보고 있던 녀석들에게 꼼짝없이 뒤통수를 맞을 테니까.”
한승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수도권 지역의 세력 구도 정도야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당장 마찰이 심하던 백룡 길드, 그리고 서울을 양분한 화신 길드에서 청성의 뒤를 칠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청성이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갈 리는 없어. 놈들로선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짓이니까. 그건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아직 뇌제가 정확히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선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하나 최고 간부들이 당하고, 강남 지역의 일부를 빼앗긴 마당에 주변 세력이 신경 쓰여 적대 행위를 방관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길드 이름에 완전히 먹칠하는 꼴이었고, 사실상 자멸을 초래하는 짓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성현은 녀석들이 보일 다음 행동이 어떤 식으로 이뤄질지 알고 있었다.
“당연히 놈들이 서울 지역을 넘겨줄 생각은 없겠지. 하지만 우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단순히 밀고 들어오진 않을 거야. 놈들은 다른 세력을 대신 움직일 생각이거든.”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성현의 말에 한승희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반응했다.
패권을 노리는 거대 길드 간의 사이는 서로 좋을 수가 없었고, 청성의 입장에서도 주변에 온통 등 뒤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적들이 둘러싼 꼴이었다.
“어중간한 체급의 길드가 움직여 봐야 우리에겐 소용없다는 걸 이번에 알았을 테고. 그렇다고 해서 지금 상황에 청성이 움직일 수 있을 만한 거대 세력은 전혀 없어.”
“글쎄. 내부자의 말에 따르면 사정이 다르던데.”
“뭐? 내부자라면…….”
파앗!
슬슬 소식이 들려올 거라 생각하던 참에, 때마침 성현의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리 움직여둔 수하들이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해 내, 그에게 소식을 전해온 것이었다.
그러자 성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역시,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네.”
* * *
청성 길드의 본사.
이번 이지스 길드와의 충돌에 대한 소식이 즉시 전해졌고, 당연히 길드장인 한인호의 귀에 들어간 것이 가장 먼저였다.
네크로맨서 영왕까지 엮인 사건에 서울 내 구역을 넘겨줘 버린 대사건.
최근 몇 년간의 사건 중 가장 끔찍한 소식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한인호는 소식을 들은 그 자리에서 한쪽 벽면을 통째로 박살 내 버리고 말았다.
후두둑.
엉망이 된 방의 꼴.
“…….”
하지만 그것은 잠깐의 화풀이였을 뿐.
한인호는 분노에 휩쓸려 길길이 날뛰진 않았다.
“처음부터 거슬리기 짝이 없더라니.”
한인호가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몇 시간 전에 사안을 처음 전달받았을 때와는 달리, 놀랍도록 침착해진 한인호의 눈빛이었다.
이성의 끈을 놓을 만큼 흥분하려 들면 오히려 몸이 알아서 차분해지는 그의 오랜 습관 때문이었다.
재앙이라 불리던 시기, 최초의 던전이 생겼을 당시부터 활동을 시작한 한인호다.
적과의 싸움에서 흥분해 이성을 잃으면 죽게 된다는 것을 수많은 죽음을 직접 봐오며 체득했고, 그건 아직도 유효한 이야기였다.
비록 한인호가 지금이야 온갖 구린 짓들을 벌이고 있다 해도, 당시엔 몬스터 웨이브로부터 국가를 구한 영웅 취급받던 이들 중 하나였다.
현재 9대 길드를 이끌고 있는 길드장들 역시 대부분은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권력을 쥔 그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변해 버렸지만 말이다.
“길드장, 다들 도착했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여자가 그를 향해 말했다.
“…요란하게도 부숴 놨네.”
주위를 둘러본 여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청성의 최고 간부이자, 성녀라는 이명을 지닌 S급 헌터 유은하.
마지막 남은 3성의 멤버였다.
한인호를 제외한 청성 내 최강의 실력자이자, 길드 창설 이전부터 함께한 그의 오랜 동료이기도 했다.
“네가 시킨 대로 간부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소집해 놨어. 그런데 정말 성찬일까지 영왕이란 놈의 손에 당한 거야?”
“연락이 완전히 두절되었으니. 그렇다고 봐야겠지.”
“도윤일이야 그렇다 쳐도, 그 녀석까지 당하다니…….”
성찬일은 분명히 영왕이 나타났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한데 상대에 대해 제대로 알고 갔으면서도 그가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도윤일이 당했을 때와는 달리, 그가 당한 것은 방심이 아닌 실력이라는 것이다.
“차라리 내가 갔어야 했는데.”
“확실히 네가 나섰다면 일은 쉬워졌겠지. 하지만 이미 늦었어. 지금은 녀석에게 집착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백룡이 움직이고 있으니까.”
한인호가 말했다.
이번 사태가 벌어지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아 인천의 백룡 길드에선 이미 길드원들 강남 지역을 향해 산발적으로 넘어오게 하는 중이었다.
아직 노골적으로 공격해 오는 단계는 아니라한들 그 의도야 뻔했다.
청성이 이지스와 본격적으로 맞붙게 되는 순간, 본격적으로 강남의 서쪽 접경 지역들을 빠르게 집어삼킬 속셈이었다.
서울 지역에 진출하는 것은 백룡 길드와 진서연의 오랜 소망이기도 했으니 예상 가능한 수순이었다.
“뭐야, 이지스부터 처리하려는 거 아니었어? 그럼 그 녀석들은 어쩌게?”
“파천을 끌어들인다.”
“파천이라고……?”
경기 남부의 거대 세력인 파천 길드.
최근 날뛰기 시작한 이지스 길드가 경기 서남부 지역을 먹어치우며 판도를 뒤흔들고 있다곤 해도, 규모 면에서 파천과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명실상부한 경기 남부의 주인이었고, 충분히 놈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뭐… 그 네크로맨서 녀석도 안재현이 나선다면 아무 문제 없겠지. 하지만 파천이라면 움직이기 쉽지 않을 텐데?”
경기 지역의 태산과 파천 길드.
지난 십여 년을 넘도록 서로가 끊임없이 물어뜯는 가장 지독한 라이벌 관계였다.
거의 대등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지, 조금이라도 균형이 안 맞았다면 누구 한쪽이 진즉에 끝장을 내어 붕괴되었을 정도였다.
한데 그런 대치 상황에 외부의 적인 이지스를 그들에게 전적으로 맡긴다는 건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그 부분이라면 걱정 없어. 최성준과 이미 이야기가 됐으니까.”
“아, 화신 녀석들이 나서는 건가. 하기야…….”
유은하의 입가가 피식 올라갔다.
그제야 어떻게 상황을 풀어 나가려는 건지 알 것 같았다.
서울 강북 지역의 지배자, 화신 길드.
양대 길드로 꼽히는 두 길드답게 서로 치열한 경쟁 관계에 있었고, 다른 그 어떤 길드보다도 청성의 입장에선 가장 까다로운 적이었다.
청성이 전력을 다하지 못하도록 항상 뒤편에서 발목을 잡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 여겨졌고.
성현 역시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 도착했군.”
창밖을 내다보던 한인호가 입을 열었다.
콰과과광!
청성 사유지의 정문이 박살 나며 요란한 소음이 터져 나왔다.
소란과 함께 안으로 들어선 붉은 길드복 차림의 헌터들.
입구를 지키던 청성 측 헌터의 머리가 잘근 짓밟혔다.
“이… 이게 무슨……!”
“닥치고 길이나 안내해라.”
파천의 길드장, 투왕 안재현.
그의 뒤에선 흉흉한 기세의 파천의 최고 간부들이 함께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위에서 바라보던 유은하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참나. 여전하네, 저 또라이들.”
“너무 과한 투자가 아닌가 싶긴 하지만…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미친개를 잡는 건 저 녀석들이 제격이지.”
한인호는 휙 몸을 돌렸다.
그들이 다져 놓은 이 세상의 규칙을 뒤흔들려던 불청객들은 한두 번 있던 것이 아니었고.
이번 역시 결과는 같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