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지각 변동 (2)
도시의 구역 안에 들어섰던 청성의 모든 길드원들이 무력화되었고, 싸움은 끝이 났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바로 앞에 선 성찬일과 성현이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지?”
“네게 마지막 기회를 주려는 거야.”
“그러니까 그게 무슨…….”
“간단히 말해서. 백명의 한승희처럼 내 아래로 들어오는 건 어떠냐는 거지.”
“뭐, 뭐라고?”
천연덕스러운 성현의 제안에 성찬일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라도 되듯 꺼낸 주제였지만, 성현을 제외하고선 그 누구도 전혀 생각지 못한 제안이었다.
“지금 장난치는 거냐?”
“내가 장난을 왜 쳐?”
“그럼 그게 장난이 아니고 뭐지?”
단순히 방금까지 서로를 죽이려고 싸운 건 문제가 아니었다.
헌터들끼리야 서로 검을 뽑아든 이상 끝을 보는 게 당연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길드가 통째로 무너진 것도 아니고, 적대 길드의 최고 간부더러 항복을 넘어 배신까지 하라니.
특히 헌터 세계에서 청성 길드와 3성의 간부가 가지는 위상을 생각한다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도 솔직히 청성 출신 헌터들이 달갑진 않아. 그래도 쓸 만한 전력이니까 이런 제안을 하는 거지. 너희들 내부 평판이야 알고 있으니까.”
“그걸 네가 어떻게 안다는 거지?”
“그거야 방법이 있고.”
청성 안에서 수년을 일해 온 성현이다.
극도로 폐쇄적인 헌터 집단의 특성상, 외부에서 모르는 나름의 평판이 있기 마련이다.
겉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한인호가 쓰레기라는 것도 내부 직원들 사이에선 공공연한 이야기였으니.
그 바로 아래에 있는 성찬일이나 다른 간부에 대한 이야기들도 자연히 이래저래 귀에 들어왔었다.
이 업계에 깊게 발을 들인 헌터 중 쓰레기 아닌 녀석이 어디 있겠냐마는.
적어도 재활용은 가능한 녀석들은 있었고, 그런 이들 중 일부는 필요에 따라 자신의 힘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이는 단순히 강함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 상황상 성찬일은 영입을 해낸다면 분명히 도움이 될 만한 자였다.
“가급적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싶어서 그런 것도 있지. 난 한인호의 목을 원하는 거지. 앞으로 충돌할 청성의 길드원들을 모조리 죽이고 싶은 건 아니거든. 물론 그렇다고 해서 되도 않는 이상주의로 미적지근하게 나설 생각도 없고.”
다른 이도 아니고 3성의 간부 중 하나가 이지스 길드에게 투항해 돌아선다면 이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도윤일의 죽음보다도 훨씬 충격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청성을 향해서 분명한 메시지가 될 것임은 말할 것도 없고.
성찬일이라는 큰 선례가 있으니 전세가 아주 불리하게 돌아간다 싶으면 투항해 길드를 배반하는 이들도 많아질 것이다.
어차피 헌터들에게 길드란 자신의 활동 영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다른 집단으로부터 보호받을 만한 강력한 소속을 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 소리를 하고 있다니. 마치 청성을 상대로 이길 걸 확신하는 것처럼 보이는군.”
“아직 확신까지는 아니지만. 이길 수 있다고는 생각하고 있지.”
“우리에게 주어졌던 정보나 내 생각보다 너희의 저력이 훨씬 강했던 것은 맞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청성… 아니, 한인호를 당해내는 건 무리야.”
성찬일이 단호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들은 한인호의 무서움에 대해 아직 몰랐다.
대놓고 구역을 침입해 집어삼키고, 이런 전면전을 걸어온 이상 알량한 승리감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청성 내부의 사정이라면 나도 잘 알고 있어.”
“그런 건 상관없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으니 미리 한마디만 해주지. 헛소리 집어치워라.”
물론, 예상했던 대로 쉽지는 않았다.
성찬일이 자기 목숨이 아까워서 홀라당 넘어올 성격은 아니었다.
칼을 들이미는 협박 정도로 굴할 녀석도 아니었고, 그런 번거로운 일을 벌일 생각도 없었다.
입맛을 쩝 다시는 성현의 모습에 그는 어이없다는 듯 물어왔다.
“정말 내가 길드를 배신할 것 같아서 그런 제안을 하는 거냐?”
“말은 그렇게 해도 내심 청성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잖아.”
“뭐……?”
성찬일이 흠칫 반응했다.
마치 정곡을 찔린 듯한 그의 반응에 성현의 입가는 피식 올라갔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는 한인호에게 불만이 있다고 해야 하나?”
* * *
“끝인가. 정말 청성을 이겨낼 줄이야…….”
청성과의 전투가 끝이 난 거리.
만신창이가 되어 반파된 도로 위에 한승희가 서 있었다.
뇌제에게 당해 부상을 입은 그녀였지만, 성현이 준 포션을 마시자 멀쩡히 일어날 수 있었다.
움직이는 데 약간의 불편한 점도 없이 벌써 활동할 수 있던 것이 효과가 아주 대단했다.
“이런 건 대체 어디서 구한 건지. 이 정도면 9대 길드에서 독점하는 최고급 포션… 아니, 그보다도 뛰어난 것 같은데.”
한승희는 신묘하다는 듯 텅 빈 포션 병을 내려다봤다.
길드에 가끔씩 물자를 들고 오기도 하던 성현이었는데, 지금처럼 아무리 돈을 퍼주고도 못 구할 물건들을 잘도 구해오곤 했다.
쿵쿵쿵!
한편, 그녀의 주위를 지나치며 분주히 움직이는 몬스터들의 무리.
성현의 군단에 속한 권속들이었고, 검은 기운을 풀풀 풍겨대며 험악하게 생긴 괴수들이 부서진 도시의 뒷수습에 나서고 있는 모습을 어색하게 바라봤다.
“…저 능력은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된다니까.”
성현이 거느리는 군단은 전보다도 훨씬 불어났다.
일개 개인이 어지간한 대형 길드 이상의 전력을 끌고 다녔다.
그것도 네크로맨서 특유의 각종 제약과 한계점조차 없이 어디서든 자유자재로 소환하고 유지했다.
이번 청성과의 싸움에서도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해 완전히 압도를 해버렸으니.
이미 그 혼자만으로도 거대 길드에 준하는 전력이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구창환이나 나하고 싸웠을 때만 해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대체 어디서 저렇게 강해지고 오는 건지.’
하루가 지날수록 강해지는 성현의 힘.
더군다나 이 많은 몬스터 군단은 어디서 구해오는 건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궁금한 것과는 별개로 이 이상으로 알려 들지는 않았다.
자신의 목숨줄이 녀석에게 걸려 있으니, 불필요한 궁금증에 뒤를 캐다간 다칠 수 있었다.
‘어줍잖게 수작을 부리려다 죽는 건 사절이니까. 목숨이 제일 중요하지. 뭣보다 엄청 굴려대긴 해도, 나름대로 동업자 취급은 해주니까…….’
성현에게 패하고 산하 길드 신세가 되었을 때.
한승희는 성현에게 당할 상당한 굴욕과 고초를 각오했던 심정이었다.
힘이 모든 것인 헌터 업계인 만큼, 굴복한 패배자에게 돌아오는 취급이야 뻔했다.
하지만 그런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가 각오한 멸시나 견제를 받는 일은 없었다.
그녀가 이끄는 백명 길드는 오히려 북쪽으로 영역을 더 넓히게 만들었고.
한승희에겐 비류와 오성을 비롯한 각 대형 산하 길드들의 실질적인 관리까지 맡겼다.
견제는커녕 그녀가 쥐게 된 실질적인 영향력의 범위는 오히려 이전보다 늘어난 셈이었고, 되레 쏟아지는 업무량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거기다 성현의 목숨과 자신의 운명이 연결되어 있어서 그런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였던 처음과는 다르게, 같은 배를 탄 동업자라는 생각이 점점 들게 되었다.
“아니, 잠깐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고개를 휙 저은 한승희가 자신의 뺨을 찰싹 쳤다.
그리곤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내가 너무 이 취급에 익숙해져 버렸어.”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수년간 대형 길드를 이끌던 수장이었던 그녀였다.
하나 어느덧 가차 없이 굴려지는 지금의 상황에 익숙해지려 했다.
그래도 S급의 헌터로서 나름 자존심이 있는데 전투 노예 1호 꼴을 순순히 받아들일 순 없었다.
“설마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서? 그 무시무시한 녀석…….”
“뭐라고?”
“헉! 어, 언제 왔어?”
화들짝 놀란 한승희가 뒤를 돌아봤다.
언제 다가왔는지 성현이 그녀의 뒤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누가 무시무시하다는 거야?”
“아, 아니! 아무것도. 그나저나 벌써 여길 온 걸 보면, 정말 뇌제를 처리한 거야?”
“그래, 이쪽 싸움도 다 끝났어.”
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모든 싸움이 끝이 난 것이었다.
“그럼 벌써 3성 중 둘을 제거한 건가. 더군다나 이번에 영왕과 이지스 간의 연관성까지 다 드러내 버렸으니… 청성에서 가만히 있지 않겠는걸.”
“다 계산 안에 있던 거니까. 어쨌든 지금은 수습부터 마무리 짓자고. 도시를 어느 정도는 복구를 해놔야 하니까.”
성현이 주변을 슬쩍 둘러보며 말했다.
도시 안에서 난동을 부리던 가디언의 행패는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헌터와 군단이 싸우느라 완전히 엉망이 된 거리들의 모습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강남 지역의 도심지인 만큼, 청성이 알아서 뒤처리를 할 문제겠지만… 이제 우리 구역이니까.”
성현이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한승희도 그의 말에 묘한 표정이 되었다.
“정말 서울 지역에 진출하다니. 다른 9대 길드들도 엄두를 못 내던 일인데.”
서울 지역으로 진출을 해냈다는 것.
헌터 길드에게 있어선 굉장히 의미가 큰일이었다.
화신과 청성이 양대 길드로서 군림하고 있는 것처럼 국내 패권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이기도 했다.
“뭐, 잠깐 맡아 둔 꼴이 되지 않으려면 이제 시작인 거지만.”
성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일단 가장 급했던 사안인 ‘던전의 입구’에 대해선, 새롭게 합류한 리치의 군주 네이아의 마법진을 이용해 완전히 감춰두었고.
그 주변으로는 누구도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 둘 것이었다.
하나 이제 청성이 본격적으로 움직일 터였고.
다른 거대 길드들도 모두 그들을 주목하게 되었음으로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머리로 알고 있는 건 좋지만, 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 거다. 청성이 다음 수를 내놓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남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러자 옆을 돌아본 한승희는 흠칫 물러났다.
“뭐, 뭐야! 확실히 처리했다며! 저 녀석이 왜 살아 있는 건데?”
그들의 곁으로 다가온 뇌제 성찬일.
조금 전에만 해도 그에게 된통 당했던 한승희였기에, 본능적으로 성현의 뒤로 숨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성찬일의 팔 부근에 새겨져 있는 붉은 문신을 보았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저, 저건… 기어코 저 녀석한테까지 마수를 뻗었구나.”
강한 구속력으로 묶인 혈마법의 계약.
그녀도 익히 알고 있는 노예 2호기의 문양이었다.
“약속을 지키는지는 끝까지 지켜보지. 만약 도중에 어긋나게 된다면, 이런 마법으로 목숨이 묶여 있다는 건 아무 의미 없을 테니까.”
“뭐, 다른 건 몰라도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성현이 장담하듯 그에게 말했다.
그러자 고개를 휙 돌린 성찬일은 자리를 떠났고.
여전히 성현의 등 뒤편에서 눈을 끔뻑이며 지켜보고 있던 한승희는 그제야 물어왔다.
“설마설마 했는데… 뇌제 저 녀석을 대체 어떻게 꼬드긴 거야? 나처럼 사기라도 당한 거야?”
“네가 사기를 당하긴 무슨. 그럴 게 있어.”
성현이 짤막하게 대꾸했다.
청성에서조차 설마 성찬일이 배신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을 테니, 그녀가 놀라는 게 무리는 아니었다.
“그럼 다음 계획으로 넘어갈 준비를 하자고.”
성현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지어졌다.
무려 청성의 최고 간부 중 하나가 그의 편에 서게 된 것이었고, 당연히 놈들이 지니고 있던 온갖 기밀들도 품고 있었다.
이제 수도권 지역에 다가오게 될 커다란 지각변동을 맞이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