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지각 변동
쿵쿵쿵!
검은 그림자를 머금은 괴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정면에서 전진해 오는 데스나이트와 악령병사 군단.
그 반대에선 끝이 보이지 않는 스켈레톤 전사 군단에, 머리 위로는 화염을 내뿜는 와이번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 이게 네크로맨서 한 명의 소환수들이라고?”
군단을 마주한 헌터들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엄청난 규모의 소환수를 다룬다는 영왕(影王)의 능력에 대해서라면 소문으로 수없이 들어왔다.
거기다 결계형 던전이 나타났던 영왕의 데뷔전에서, 그가 어느 정도 규모의 몬스터를 거느리는지도 잘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타난 그림자 군단은 그들이 막연히 생각하던 걸 한참이나 상회하고 있었다.
그동안 부지런히 던전을 개척해 각 구역의 지배자들을 권속으로 만들고, 외부에서 마주한 몬스터들까지 흡수해 낸 성현이다.
덕분에 군단의 수는 이전보다도 훨씬 불어나 있었다.
거대한 군단은 도시를 까마득하게 메우며 헌터들을 사냥하고 있었고.
사방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검은 군단의 무리는 마치 종말 직전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다.
최초의 던전이 생겨났을 때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이 압도적인 광경 앞에서 산하 길드의 헌터들은 크게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봐, 너희 뭐 하는 거냐!”
“젠장! 그럼 이걸 우리더러 어떻게 막으라고!”
“일단 도망가!”
하나둘 달아나기 시작한 헌터들의 모습.
파도처럼 물밀 듯 들어오는 대군의 모습에 전의를 상실한 헌터들은 결국 전장을 이탈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교적 규모가 작거나 느슨한 관계의 산하 길드에 소속된 헌터들 대부분이 속속들이 흩어져 나갔다.
청성 직속의 헌터도 아니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군단의 앞에서 고기방패 노릇을 하고 싶진 않은 것이다.
“젠장,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자리에 남은 청성의 헌터들이 이를 빠득 갈았다.
그나마 청성과의 관계가 긴밀한 산하 길드 측 헌터들을 포함해, 청성의 직속 길드원들은 이탈 없이 전장에 남았다.
“다들 쓸데없이 동요하지 말고 싸움에 집중해! 어차피 도망간 건 잔챙이들뿐이야.”
주된 전력은 도망간 헌터들이 아니라 여기 남은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전력에 큰 손실이라고 볼 순 없긴 했다.
하지만 뒷일을 생각하지도 않고서 산하 길드의 헌터들이 줄줄이 도망가기 시작했다는 건.
이미 전황이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콰아아앙!
“큭… 이대로는 오래 못 버텨!”
“이 자식들 시체 주제에 뭔데 이렇게 강한 거야?”
전원이 고위 헌터들로 구성된 청성의 헌터들이다.
거대한 규모임에도 그 어느 길드에 가져다 대더라도 헌터들의 수준이 뒤처지지 않았다.
하나 고작 네크로맨서의 소환수와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지금.
너무나도 일방적인 싸움의 흐름에 당황하고 있었다.
“크아아아아!”
거침없이 진격하는 그림자 군단에게 헌터들은 속절없이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최소 S랭크대의 매우 높은 레벨이 포진되어있는 성현의 수하들이었는데.
성현이 가디언 니아글리프의 정수를 흡수하면서 군단 전체에 강력한 효과가 추가되었고, 거기서 얻은 스탯의 추가 상승분이 상당했다.
모든 스탯에 걸쳐 무려 180의 추가 스탯을 얻게 된 그들.
거기다 재생력과 생명력이 큰 폭으로 오르기까지 했으니, 바로 눈에 띠일 정도로 큰 전력 상승이 일어났다.
물론 청성의 헌터들을 사냥하고 있는 것은 평범한 몬스터들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장 곳곳을 누비고 있는 군주들이 있었다.
콰아아앙!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져 내린 남자의 시체.
요란한 소리를 시체가 추락하자 도로의 자동차 한 대가 찌그러졌다.
이런 격렬한 싸움 속에서 사망자가 생겨난다고 해도 이상할 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주위에 있던 청성의 헌터들은 깜짝 놀라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피를 쏟으며 쓰러진 남자의 정체가 다름 아닌 청성의 최고 간부이자 S급 헌터인 유선재였던 것이다.
“간부님!”
“이… 이게 어떻게……!”
쿠웅!
뒤이어 건물의 옥상 위에서 나타난 로칸이 헌터들의 앞에 착지했다.
청성의 헌터들은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유선재의 숨통을 끊은 장본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크르륵…….”
늑대인간으로서 야성으로 가득 찬 본모습을 드러낸 로칸.
그의 뒤편엔 다른 웨어울프 일족들이 하나둘 나타났고, 본능적인 두려움에 떠는 먹잇감들을 바라봤다.
청성의 전력이라면 이 자리에서 최대한 무력화시켜야 한다는 성현의 명이 있었고.
놈들로선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 * *
“키이이익!”
“벌레 같은 놈들이……!”
콰지지직!
도심의 중심부.
뇌제 성찬일은 거리로 몰려드는 몬스터들의 무리에게 자신의 뇌전을 쏟아부었다.
하나 전격이 주변 거리를 완전히 파괴하며 위력을 뽐냈음에도, 정작 그에 휩쓸려 쓰러진 놈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아까부터 공격이 제대로 먹혀들지가 않는다. 어째서지?’
성찬일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원래대로라면 방금 저 공격 한 방에 거리를 가득 메운 몬스터들을 모조리 산화시켜 버렸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아예 뇌전에 직격당한 녀석들 몇몇을 제외하고선 숨통이 제대로 끊기지도 않았고.
스쳐 지나간 정도로는 큰 부상 없이 전투에 다시 참여하기까지 했다.
이는 물론 성현의 아래에 있는 모든 군단의 병력이 전격저항력을 무려 80퍼센트나 얻은 덕분이었다.
특정 원소에 대한 저항력이 80퍼센트에 달했다는 것은 해당 원소에 대해 사실상 면역에 가까운 효율을 보인다는 것이었고.
규격외나 다름없는 성찬일의 강력한 전격계 공격의 위력조차 아주 크게 경감시켜주었다.
전격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성찬일에게 있어 단순히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소환수 무리 따위 쓸어 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테지만.
이 드높은 저항력을 얻은 덕분에 지금은 완전히 이야기가 달라진 것이다.
이곳을 찾아온 성찬일에겐 운이 없게도.
이번에 새롭게 얻은 니아글리프의 정수는 녀석의 완벽한 카운터인 셈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호락호락 당해 줄 것 같나?”
콰드득!
창을 휘두른 성찬일이 달려들던 서리 트롤 두 마리를 단숨에 꿰뚫었다.
가장 강력한 공격 수단이 봉쇄당한 상황에서도 성찬일은 약간의 상처조차 입지 않고서 몬스터들을 일방적으로 베어나갔다.
역시 청성의 세 기둥 중 하나답게 강하긴 매우 강했다.
수단 하나가 막혔다고 맥없이 무너질 상대는 아니었다.
‘확실히… 성찬일은 장기전에 취약한 마법사가 아니야. 일반적으로 마력을 소비하는 직업군이 아닌 이상, 헌터들은 강해질수록 전투 지속력 측면에서도 뛰어나지기 마련이니. 일반 수하들만으로 밀어붙여 쓰러뜨리기에는 무리겠지.’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성현이 생각했다.
전격은 특성에 따른 공격 옵션일 뿐.
직접 몸을 쓰는 창술사다 보니 압도적인 숫자 앞에서도 거뜬히 버틸 수가 있었다.
물론 그것이 성찬일에게 물량이 소용없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아무리 최강의 헌터라도 체력적인 한계는 있기 마련이었고, 주위를 포위한 적들은 지나치게 많았다.
단순히 숫자만 많은 거라면 끄떡도 없었겠지만, 이 괴수들은 모두 네크로맨서 하나가 다룬다기엔 말도 안 되는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키에에엑!
‘아무리 베어내도 수가 줄어들 생각조차 안 한다. 이대로는 답이 없어. 방심한 것도 아닌데 이 정도로 예상을 뛰어넘을 줄이야…….’
S급 특성, 뇌신의 눈을 지닌 성찬일은 알 수 있었다.
주위에 느껴지는 것들은 온통 영왕의 소환수들뿐이었다.
가까운 거리의 헌터들은 이미 모두 당했고, 성찬일은 꼼짝없이 고립을 당한 꼴이 되고 말았다.
‘역시 그 방법밖에는 없겠어. 네크로맨서를 쓰러뜨리면 소환수들은 자연히 무력화되기 마련.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술사를 제거하는 것뿐이다.’
휙 돌아간 성찬일의 시선이 성현에게로 향했다.
섬뜩한 살기를 읽은 성현.
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터엉!
빈틈을 읽어낸 성찬일은 순식간에 발을 박찼다.
몬스터들을 뚫고서 그의 창이 성현의 목을 노리고선 뻗어졌다.
성찬일의 강점인 무시무시한 속도에, 미리 자세를 취하지 않은 성현으로선 반응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카아아앙!
“너는……? 그때 부상으로는 포션이 있다 해도 바로 회복하는 건 무리였을 텐데?”
“내가 몸이 좀 튼튼해서.”
성찬일의 앞을 막아선 이즈나가 입가를 말아 올렸다.
몬스터들의 틈 속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한 그녀는 주위로 커다란 화염 기둥을 일으킴과 동시에 성찬일을 한껏 밀어붙였다.
“그리고 당하고만 넘어갈 수는 없지.”
카가가강!
휘몰아치는 뜨거운 열기 속.
둘은 순식간에 수십여 차례 합을 주고받았다.
방금 싸웠을 때만 해도 성찬일이 손쉽게 찍어 눌렀던 상대였고, 이번에도 전격을 사용해 그녀를 쓰러뜨리려 했다.
하지만 성찬일이 주위로 방출한 강력한 전격은 이즈나에게 통하지 않았다.
‘이 녀석도 전격이 통하지 않잖아……?’
심지어 단순히 전격만 통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방금 상대했던 것과 달리, 움직임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그야 두 번째 정수를 얻으며 이즈나도 총 180의 추가 스탯을 얻었고, 생명력까지 기존의 26퍼센트 이상 올랐으니 당연히 달라지는 게 당연했다.
키이이익!
‘젠장!’
고립된 상황 속에서 끝도 없이 몰려드는 몬스터.
거기에 다른 소환수와는 격이 다른 이즈나까지 동시에 상대하려다 보니 도저히 제 실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당혹감에 빠져 있던 그 순간.
등 뒤에서 붙잡고 늘어진 고블린 한 마리가 그의 움직임을 방해했고, 그로 인해 이즈나의 하체 쪽 움직임을 일순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콰아아앙!
“커억……!”
발차기에 타격당한 성찬일이 한참을 나가떨어졌다.
인상을 한껏 찌푸린 그는 고통스러운 듯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젠장, 뼈가 완전히 나갔어. 하지만 이대로 당해 줄 수는 없…….’
검을 집어든 성찬일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가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쿠우우웅!
“크르르륵!”
하늘 위에서 거대한 비룡, 안타라스가 바닥에 착지했다.
커다란 날개를 접은 녀석은 성현을 감싸듯 곁에 섰고.
안타라스를 시작으로 곳곳에 흩어져 있던 군주들이 사방에서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쿠웅!
“아, 다른 쪽도 다 끝난 모양이네.”
이즈나와 로칸 같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들부터.
해골군주, 칠흑기사, 거미여왕.
오우거, 벤시, 고대 골렘, 좀비 계열 등.
최소 S급 보스 이상의 소환수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이건…….’
‘뇌신의 눈’ 특성을 지닌 성찬일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전격의 힘까지 무력화되어 버린 이 상황에.
절대로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싸움은 이미 끝이 나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저벅저벅.
성찬일을 향해 맹렬히 달려들던 군단의 움직임은 일제히 멈춰 서 있었고.
주위를 둘러싼 군주와 수하들 사이로, 성현은 앞으로 나서 성찬일에게 다가섰다.
뇌제라는 이명을 지닌 청성의 최고 간부.
그런 그를 향해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이제 어떻게 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