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초대받은 손님 (3)
성현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응시했다.
공간을 감싸고 있는 검은 기운들.
들어와서부터 느꼈지만 과할 정도로 기운만 뿜어내는 것이 마치 감각을 고의로 뒤덮도록 만드는 듯한 장소였다.
그래도 피해를 입는다거나 전투에 직접적인 영향은 없었다.
‘하지만 그게 만약 다른 기운을 숨기기 위해서였다면?’
마법에 필수적인 캐스팅 시간이나 준비 동작조차 없이 바로바로 사용하는 듯한 상대의 행동.
그것도 대규모 소환이나 공간 이동 마법 등 사전 준비가 필요한 마법들조차 마찬가지였다.
마치 마력을 스스로 끌어올 필요가 없다는 듯 거리낌이 없는 그녀의 행동이었다.
마법이란 체계를 사용하는 이상, 아무리 보스 몬스터라 해도 일반적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딱 한 가지.
가능한 경우의 수가 있었다.
“마법진을 사용한 거지?”
“…뭐?”
정곡 찔린 듯한 네이아의 반응이 돌아왔다.
역시나 표정이 읽기가 쉬웠다.
마족이라 지능도 높고 머리는 쓸 줄 안다만, 던전 속에 틀어박혀 있어 그런지 사람처럼 영악하진 못한 모양이었다.
“이런 식으로 마법들을 구사하려면 방법은 하나뿐이지. 마법진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계열의 마법사는 전 세계의 고위 헌터들 중에서도 몇 명 없는데. 탐날 만한 좋은 능력이야. 내 밑으로 들어온 뒤엔 잘 활용해 주지.”
“인간 주제에 그따위 헛소리를……!”
파지지직!
“큭?”
발끈한 네이아가 성현을 향해 지팡이를 치켜올리려는 순간.
그녀의 뒤편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튀었다.
“이건?”
뒤를 돌아본 네이아가 흠칫했다.
성현이 던진 검이 박힘으로써 인해 벽에 설치되어 있던 마법진이 하나 망가져 있었다.
‘이걸 노린 거였나?’
일반 검이 아닌 성현의 마력인 그림자를 머금은 칼날이다.
회로의 일부가 잘려 나가자 복잡한 수식으로 이루어져 있던 마법진은 전체가 망가지며 파괴되었다.
‘보인다. 온 방이 마법진들로 가득 차 있군.’
매의 눈 특성을 발동시킨 성현.
푸른빛으로 물든 그의 시야에선 곳곳에 그려진 마력진들이 훤히 다 보였다.
일반적인 시야나 감각으로는 전혀 눈치챌 수 없을 만큼 깔끔한 솜씨로 잘 숨겨줬다만.
그의 통찰안 앞에선 무용지물일 뿐이다.
“그래 봐야 바뀌는 건 없다.”
이를 빠득 간 네이아가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이제 와서 파훼를 해봐야 이미 발동한 마법과 소환수들이 어디 가는 게 아니었다.
저주와 쇠약의 중첩 효과로 인해 제대로 된 움직임을 가져갈 수도 없는 상대.
그런 반면 아직 이 방 안에 설치해 둔 마법진들은 넘쳐흘렀다.
공간 이동 지점들부터 최소 수백 개가 넘는 마법진들이 발동을 기다리고 있었고, 천천히 요리해 주면 그만이었다.
[군주, 칼라일의 그림자를 흡수하였습니다!]
[‘기사도’ 특성이 활성화됩니다!]
파앗!
하나 그 순간 성현의 주위로 일순간 밝은 빛이 터져 나오더니 그의 몸에 영향을 끼치던 저주들이 일제히 상쇄되었다.
모든 상태이상을 무효화시키는 기사도 특성.
성현은 놈의 저주를 무력화시킴과 동시에 이즈나의 특성인 마력의 심장을 가져왔다.
콰아아앙!
성현에게서 화염 마법이 쏘아지며 연쇄 폭발이 일어났다.
네이아를 향해 쏜 마법이었지만, 반드시 맞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네이아는 마법진을 발동시켜 공간이동으로 마법을 피했지만,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 폭발의 여파가 뒤덮였다.
츠츠츠츳!
폭발에 휘말린 주변의 마법진들은 원래의 구조를 잃고서 흩어졌다.
성현이 노리는 게 바로 이것이었다.
굳이 적중시킬 필요도 없이 최대한의 화력을 내면서 방 안의 마법진들을 파괴하는 데에 집중했다.
벽과 바닥을 온통 부숴 버리는 그의 행동이었고, 덕분에 바닥이 휩쓸리며 설치된 마법진들이 망가졌다.
“네, 네놈……!”
마치 정답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네이아에게서 보기 좋은 반응이 돌아왔다.
그러자 성현은 이즈나와 시선을 주고받았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성현과 마찬가지로 마법을 준비했다.
“방 안을 망쳐 놓는 짓에 예민하던데… 어디 한번 놀아 보자고.”
* * *
쿠구구궁!
완전히 초토화된 방 안.
성현은 물론 이즈나까지 합세해 화력이 출중한 온갖 마법들을 쏟아낸 덕에, 수백이 넘던 방 안의 마법진은 남아나지가 않았다.
네이아야 그들의 그런 행동을 막아내려 했다.
하나 싸우는 와중에 방 전체를 보호하며 사방에 흩뿌리는 마법들을 저지할 수야 없는 일.
그들이 쏘아대는 마법은 1차적으로는 네이아를 직접 노려왔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견제의 의미도 담겨 있었다.
모든 마법진이 파괴되며 광역 저주나 대규모 소환 마법도 막혀 버린 상황.
무엇보다 좌표를 지정해 둔 공간 이동 마법진을 모조리 파괴시켰기에 이전처럼 모든 공격을 자유자재로 흘리는 그녀의 행동은 불가능해졌다.
물론 그렇다 한들 여전히 상대는 골치 아픈 상대였다.
그렇지 않아도 강력한 마법과 저주를 구사하는 리치 계열의 S랭크 보스 몬스터인데.
그 상태에서 붉은 힘을 받아들이며 전력이 더 상승했으니 보통 적이 아님은 당연했다.
마법진이라는 강력한 옵션이 제거했다고 한들 쉽게 쓰러뜨릴 수 있을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털썩!
하지만 엉망이 된 방의 안.
잔해 더미 사이에선 네이아가 검은 피를 토해냈다.
“크르르.”
쓰러진 네이아의 주위를 둘러싼 군주들의 모습.
성현의 주위로 무려 다섯이나 되는 군주가 모여 있었다.
성현은 마법진을 제거하자마자 과감하게 이즈나와 로칸을 제외하고도 게아드를 비롯한 각 군주들 소환했고 네이아의 숨통을 끊어내는 데 성공했다.
“생각 이상으로 애를 먹이긴 했다만, 그래도 이쪽의 손실은 없이 쓰러뜨렸으니.”
파악!
성현은 네이아의 심장에 꽂혀 있던 검을 뽑아내었다.
츠츠츠츳!
[죽은 자의 군주 ‘네이아’(A)]
[등급 - 군주]
[레벨 - 220]
[보스의 위압감], [저주술사], [마력진법]
흘러간 성현의 그림자가 네이아의 시체로 흘러들어갔다.
“…….”
비틀거린 네이아는 팔을 짚으며 일어났다.
그림자를 받아 성현의 수하가 된 네이아.
하지만 기존의 마력에게서 곧바로 새로운 종류의 힘을 받아들인 반작용인지, 머리를 부여잡고선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정신을 차린 듯한 그녀의 모습에 성현이 말을 붙였다.
“이제 좀 정신이 들어?”
“아, 네… 주군을 뵙습니다.”
네이아가 예를 갖추며 고개를 숙였다.
이미 그림자를 뻗어 다른 리치들을 모두 성현의 권속으로 편입시킨 그녀였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도 그녀에게 물어볼 게 많았기에 진득하게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메시지가 그의 앞에 주르륵 떠올랐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해 조건을 만족하였습니다!]
[연계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긴급 퀘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영혼의 호수에 위치한 두 번째 성소의 가디언을 서둘러 저지하십시오!]
[보상: 대량의 경험치 및 모든 스탯 100 획득]
[남은 시간 ‘00:34:59’]
[임무 실패 시 강력한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제한 시간? 가디언을 저지하라니……?”
갑작스러운 퀘스트의 발생에 성현이 흠칫 놀랐다.
성소나 수호자의 존재라면 이미 이전의 사건으로 인지하고 있던 그였지만, 긴급한 퀘스트의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주, 주군!”
“어엇?”
타악!
성현의 손을 낚아챈 네이아가 달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당황한 성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뭐 하는 거야? 일단 이건 놓고…….”
“가디언과 성소의 존재라면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존재를 뒤늦게 상기한 네이아가 성현에게 말했다.
이제 막 정신을 차린 지라 지체되었지만, 곧장 그에게 말해야 할 만큼 긴급한 사안이었다.
“뭐? 알고 있다니… 성소의 위치를 알고 있는 거야?”
“바로 이 아래에 성소가 있습니다. 제게 이 힘을 주고 주군을 제거하라고 속삭이던 것도 바로 녀석들의 소행이고요.”
몬스터들에게 깃들었던 정체불명의 붉은 힘에 대한 이야기.
그녀의 이야기에 성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놈들이 이번 퀘스트와 관련이 있는 건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필드 전역에 영향을 미친 성소의 ‘축복’을 건네받은 뒤.
저들의 뜻대로 움직이던 일반 몬스터들처럼,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리치들 역시 가디언에게 협조하고 있었다.
성현을 함정에 빠뜨려 공격함은 물론.
그들이 요구하는 거대한 공간 이동 마법진의 수식과 도면을 그려서 건네주었다.
네이아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성현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수호자라면 성소를 지키려 들 줄 알았는데 필드로 나가겠다는 건가? 어디로 통하는 건데?”
“던전의 입구… 첫 번째 필드로 통하는 마법진입니다.”
“뭐, 뭐라고?”
당황한 성현이 되물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순간 저도 모르게 멈춰 설 뻔한 그였다.
하지만 이성의 끈을 붙잡은 성현은 되레 속도를 올렸다.
‘젠장! 왜 긴급 퀘스트라는 건지 이제야 알겠어.’
성현이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긴급 퀘스트라는 명칭과 표기된 짧은 제한 시간이 괜히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가디언이라는 녀석은 중간의 여러 필드를 거치지 않고서 던전의 밖으로 단숨에 나가 버릴 셈이었다.
“혹시 뭐 하는 녀석인지 알고 있어?”
“저희도 가디언의 본체를 직접 본 적은 없습니다. 그저 놈들의 명령에 따랐을 뿐.”
성현은 칼날 협곡의 성소에 들어서며 수호자라는 존재와 한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떠한 이유로 인해 이미 반파가 되어 있는 녀석이었고,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나 지금 네이아에게 건네 들은 이야기로 보아, 놈들은 제대로 의지를 지니고 행동할 줄 아는 존재들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어째서인지 그를 인지하고 있었고, 적대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다 무엇보다 대형 사고를 치기 직전이라는 것.
네이아를 뒤따라 아래로 내려간 성현은 숨겨져 있던 공간의 성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쿠구구구구!
“이… 이건.”
멈춰선 성현이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성소의 입구 바로 옆에 찢겨 있는 거대한 공간의 균열.
공간을 잇는 통로였다.
“단순히 공간 이동을 돕는 마법진이었지, 이런 거대한 통로를 만들어 내는 수식이 아니었는데…….”
심지어 놀란 것은 네이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건넨 수식이라면 조금 전의 전투에서도 사용했던 단순한 공간 이동 마법진이었을 뿐.
한데 지금은 아예 포탈의 형태를 한 통로가 만들어진 모습이었다.
놈들이 지닌 미지의 힘이 여기에도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영구적인 통로인 모양인데, 정확히 어디쯤으로 통하는지는 알 수 있겠어?”
“아뇨… 이 정도로 변형이 된 이상 좌표에 대해선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직접 통과해야 알 수 있어요.”
네이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자 성현은 텔레파시를 통해 게아드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던전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게아드한테는 아직 문제가 생기지 않았어. 하지만 퀘스트 마커는 이 통로를 넘어가라고 나와 있다. 그렇다면 아직 고블린 숲 내부에서 입구까지 닿진 않은 건가.’
“이, 이런 무례한 녀석이……! 감히 주군을 제멋대로 끌고 가?”
그때, 뒤늦게 쫓아온 이즈나가 네이아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성현은 되려 이즈나의 팔을 붙잡고선 끌어당겼다.
“가자, 떠들 시간이 없어.”
“예……?”
후웅!
성현은 주저하지 않고 공간의 틈을 향해 몸을 던졌다.
* * *
파아아앗!
“여기는…….”
통로를 빠져나온 성현이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창한 햇빛이 비추는 하늘.
멀찍이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
곤란할 정도로 익숙한 풍경의 골목길이 펼쳐져 있었다.
“젠장. 대형사고네.”
서울의 한 인적 없는 뒷골목에 서 있는 성현의 등 뒤엔.
지하 던전과 이어진 커다란 통로가 일렁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