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초대받은 손님
“리치라길래 해골 머리인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네.”
검을 까닥인 성현이 말했다.
얼굴을 가린 후드를 베어낸 그의 앞엔 인간과 별다를 바가 없는 남자의 모습이 있었다.
“본래의 모습을 잃는 건 실패작들이나 겪는 일일 뿐.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지.”
남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스스로 생명을 버리고서 죽음의 경계에 선 고위 언데드, 리치.
그것이 바로 녀석의 정체였다.
‘여덟 번째 필드의 주인이라던 마족. 이야기야 미리 들었지.’
성현은 놈의 정체에 대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막연히 상상하던 것에 비해, 놈들은 과거의 모습을 잃지는 않은 모습이었다.
하기야 지구에서도 종종 고위 리치들은 멀쩡한 인간의 모습 지니고 있다는 설정도 있었으니.
아예 다른 세계의 녀석들이 어떤 모습이든 이상할 건 없었다.
“도망갈 수 없다는 걸 알았나 보지. 입이 열린 김에 뭘 좀 물어봐야겠는데, 건너편의 마족이 여기엔 뭐 하러 나타난 거지?”
“네놈을 제거하기 위해서지. 너희의 존재에 대해서라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우거와 스펙터들이 지니고 있는 저 이질적인 기운을 너희가 건네줬다는 건가?”
성현은 줄곧 그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지금 마주하고 있는 저 리치 역시 저주라 불리는 붉은 힘을 지니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질적인 기운을 물씬 풍기는 것이 다른 일반 몬스터들보다 더 강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이 리치의 소행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게 만드는 증거는 아니었다.
마법에 능통한 리치들의 특성상, 놈들이 몬스터를 강화시킨 건 아닐까 의심했던 것은 사실이나.
다만 그런 생각을 하는 한편, 아무리 마족이라 한들 이 정도 행위가 가능한 건지는 의문이었다.
성현으로선 정확히 리치라는 존재를 겪어 본 적이 없어서 알 방법이 없었다.
스펙터든 오우거든 다른 몬스터들이야 이쪽 업계에서 일하며 듣게 되는 정보가 있었지만.
뱀파이어나 웨어울프 같은 마족들이 늘 그렇듯, 리치들 역시 바깥에선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는 존재였다.
당연히 그들에 대해 알려진 사실도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그리고 녀석의 대답이 돌아왔다.
“너희의 소행이 아니라고?”
“아무리 우리라 해도 할 수 있는 범위의 일이 아니다.”
“그럼 마족인 너희도 외부에게서 힘을 받았다는 소리인데. 이게 자연스러운 현상일 리는 없고. 너희도 다른 이의 명령을 받고서 움직인 건가?”
“그건 대답하지 못하겠군.”
“어째서?”
“네놈은 여기서 죽을 테니까!”
후우웅!
성현을 향해 다짜고짜 마법이 날아들었다.
커다란 화염구가 성현을 향해 날아들었고, 그는 급히 자세를 낮춰 마법을 피했다.
콰아아앙!
뒤편을 모두 날려 버린 심상치 않은 위력.
붉은 힘이 감도는 녀석의 마법이었고, 그 위력이 대단했다.
마법을 날린 의도 역시 한 방으로 그의 목숨을 확실히 끊기 위한 살벌한 기세였다.
‘역시 맨입에 다 들어내기란 무리였나.’
바닥을 구른 성현이 입에 들어온 흙먼지를 퉤 뱉어냈다.
저렇게 비협조적인 몬스터를 상대할 때 늘 그렇듯이, 약간의 실력 행사를 곁들여 줘야 할 때였다.
성현은 단박에 발을 박찼다.
리치의 뒤로는 불길이 가로막고 있었고, 그와 성현의 거리 또한 아주 근접해 있었다.
거리를 벌리기조차 여의치 않은, 당연히 마법사로서는 불리한 상황이다.
쩌저저적!
허나 리치는 순식간에 마력을 끌어올렸고, 사방으로 뻗어지는 한기와 함께 바닥이 꽁꽁 얼어붙었다.
서늘한 기운이 녀석의 주위로 서렸다.
리치의 뒤로 퇴로를 막고 있던 불길 역시 얼어붙어 사그라들고 말았다.
‘하지만, 예상 범위 안이다.’
성현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마족에 저 붉은 힘까지 지니고 있는 만큼 최소한 오우거보다는 한참 강할 것이라는 것쯤은 이미 예상하고 있던바.
하지만 보스 급이 아닌 이상 그의 상대가 되기엔 무리였다.
파앗!
달려든 성현이 힘껏 놈에게로 파고들었다.
땅을 얼어붙게 만든 한기가 주위에 퍼져 있었고, 성현의 피부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하지만 성현은 그런 와중에도 멀쩡히 움직일 수 있었다.
“어, 어떻게……!”
설마 이 한기를 뚫고 들어올 거라 생각하진 못했던 리치가 당황했다.
용의 비늘 특성을 통해 마법저항력과 내구력을 올린 덕분에 성현이 녀석의 마법에 꽁꽁 얼어붙지 않을 수 있던 것이다.
무엇보다 성현에게 항시 적용되고 있는 군단 특성.
[냉기저항력 +50%]
성현을 비롯한 모든 군단에게 적용되고 있는 강력한 저항력 옵션이었다.
두 효과가 동시에 적용된 덕분에 이 한기 속에서도 약간의 추위를 느끼는 게 전부였고, 움직임에는 아무런 제약조차 없었다.
물론 네크로맨서가 이런 비슷한 능력을 지녔을 거라곤 생각하지도 못하는 게 정상이다.
마찬가지로 리치인 그 역시 이런 변수에 대해선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카아앙!
당황을 한 것과는 별개로 리치는 민첩한 움직임으로 지팡이를 들어 올려 그의 검을 막았다.
하지만 그건 본능적인 움직임이었을 뿐.
그다음의 행동에선 머뭇거렸고, 성현은 곧장 머릿속에 짜뒀던 대로 다리를 들어 올렸다.
퍼억!
“컥……!”
성현은 단숨에 리치의 복부를 뻥 차내었다.
적과 근접해 버린 예상치 못한 상황 속.
그의 검만을 신경 쓰고 있던 리치는 꼼짝없이 발길질에 차였고, 충격에 뒤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리치의 머리 위로 이글거리는 열기.
콰아아아아!
“끄아아악!”
남자의 머리 위로 쏟아진 안타라스의 불길이 타올랐다.
마법저항력을 일부 지니고 있는 리치의 몸뚱이조차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열기다.
그렇게 하늘 위에서 쏟아진 화염이 사그라들었고.
새까맣게 그을린 자리로 성현은 다가섰다.
파스스.
“역시 한 방에 죽진 않을 거라 생각했어.”
성현이 쓰러진 리치를 내려다보았다.
리치라 한들 안타라스의 화염 숨결에 휩쓸리고도 살아 있다니.
물론 새까맣게 그을린 채 꼼짝도 못 하고 있긴 했지만, 보스도 아닌 주제에 정통으로 휩쓸리고도 숨이 붙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상적이었다.
어지간한 적이었다면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터였다.
붉은 힘을 받아들인 녀석답게 생명력이 굉장히 질겼다.
스릉.
성현은 꼼짝하지 못하는 녀석의 목으로 검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리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협조한다면 목숨은 살려 줄 수 있는데.”
“되도 않는 소리 지껄이지 마라.”
“내 물음에 답을 할 생각은 없는 건가?”
성현이 재차 물었지만 남자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스스로 선택해 죽음의 경계에 선 우리가, 죽음 따위를 두려워할 것 같으냐?”
아랑곳하지 않는 리치의 태도.
“방금 보인 네 놈의 모습은 우리의 주군 또한 보고 있었다. 똑같은 수작이 두 번 통할 거라 생각하진 마라.”
“…왜 너 혼자 여기까지 넘어와서 알짱거리나 했더니, 그런 수작이었단 말이지.”
녀석의 말에 성현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건너편에 있는 리치들의 군주 역시 이 모습을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마법도 있는지는 몰랐는데, 과연 리치라는 이름답게 별 희한한 수를 다 쓰는 녀석들이다.
“그렇다면야, 금방 갈 테니 기다리고 있어. 너희에게 들어야 할 게 많거든.”
고개를 들어 올린 성현이 이곳을 들여다보고 있을 놈들의 군주에게 말했다.
그리고는 멈춰 세우고 있던 검을 휘둘렀다.
촤아악!
목을 베어낸 그의 검.
회유나 고문을 한다고 들을 만한 상대는 아닌 걸 눈치챘기에 시간 낭비를 하진 않았다.
스스스슷!
목숨이 완전히 끊어지자, 특이하게도 녀석은 피를 흘리는 게 아니라 온몸이 부패하며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다른 마족들과 비교해서도 가장 인간과 차이점이 없어 보이는 생김새라 이질감이 들긴 했는데.
이렇게 보니 확실히 언데드가 맞긴 한 것 같았다.
‘그래도 부활시키는 데 지장은 없겠지.’
성현은 일단 놈의 시체를 적당한 곳에 옮겨뒀다.
앙상하게 변하긴 했어도 아예 가루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니었기에, 그림자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나중에 그의 전력이 될 녀석 중 하나였으니. 아무 데나 내팽개쳤다가 시체를 잃어버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 녀석들,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지. 녀석들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겠는데.’
성현에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정체 모를 사태에 대해 정보가 필요했다.
죽음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언데드를 상대로 심문이나 회유로 뭔가를 들어내기란 당연히 무리일 테고.
조금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그리고 성현에게는 그를 위한 가장 간단한 수단이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뒤쪽에 잠깐 들러 봐야겠지. 전력도 충원할 겸.’
* * *
쿠우웅!
어둠숲의 성채에 도착한 성현이 안타라스에서 내렸다.
“오셨습니까, 주군.”
양옆에 선 이즈나와 로칸이 돌아온 성현을 맞이했다.
그들을 비롯한 군주들이 쓰러뜨려 놓은 오우거왕 몰고르의 시체가 성채 한켠에 놓여 있었다.
“어떻게 잘 처리를 했나 보네.”
“시설들이 크게 부서진 걸 제외하면 큰 피해는 없습니다. 전투로 잃은 병력이 다소 있지만, 금방 리젠으로 채워질 테고요.”
“다들 수고했어. 그럼 바로 시작해 볼까.”
성현은 몰고르의 커다란 시체 앞에 섰다.
그리곤 지체 없이 녀석의 시체로 그림자를 흘려보냈다.
츠츠츠츳!
[오우거 왕 ‘몰고르’]
[등급 - 우두머리]
[레벨 - 201]
[보스의 위압감], [괴력], [단순무식]
쿠웅!
커다란 덩치의 오우거 군주, 몰고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채 주위에 있던 오우거의 시체들 역시 성현의 그림자를 받아들이며 우르르 일어섰고.
놈들은 일제히 거친 함성을 내질렀다.
“우어어어어!”
지축을 뒤흔드는 녀석들의 우렁찬 포효.
하나 여기 있는 오우거들의 숫자가 전부가 아니었다.
황야 지대 곳곳에서 몰려든 오우거들의 숫자가 상당했으니, 그들을 모두 수하로 만들어 앞장세운다면 상당한 전력이 되어 줄 것이었다.
오우거들이 지닌 괴력과 저돌성은 붉은 힘이 없더라도 이미 뛰어났으니 말이다.
“1차적으로 방어는 성공했지만 금방 또 다른 몬스터들이 몰려들겠지. 지체 없이 다음 필드로 움직인다. 오면서 말했듯이 다음 목표는 영혼 호수 지역의 리치들이고.”
“알겠습니다.”
성현의 말에 군주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돌아오는 동안 녀석들에게 몇 가지 설명을 해뒀기에, 어떻게 된 상황인지 잘 이해하고 있었다.
너머 필드에 위치한 리치의 군주를 수하로 만들어 이 상황의 인과에 대해 확실히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츠츠츠츳!
“주, 주군?”
당황한 이즈나와 로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검은빛이 그의 발밑에 일렁이고 있었다.
‘이건 뭐야……?’
마구 헝클어지는 듯한 감각 속.
마력이 주위를 덮음과 동시에 공간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파아아앗!
“여… 여긴?”
비틀거리던 성현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수하들과 함께 지상의 성채에 있던 그였지만, 일순간에 어두컴컴한 지하 공간이 되어 있었다.
‘젠장, 속이 메스꺼운 것이 공간 이동 마법 같은데.’
성현이 어지러운 머리를 짚었다.
갑작스러운 장소의 변화.
난생 처음 겪는 경험이었지만, 공간 이동 마법의 부작용에 대해서라면 들어왔기에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머리를 쓰다니. 한 방 먹은 건가.”
이런 방식의 마법엔 정확한 좌표가 필요할 텐데, 리치와 싸우는 동안 녀석이 어떠한 수작을 부려 놓은 것처럼 보였다.
성현을 납치하듯 원거리에서 불러들인 놈들의 마법.
덕분에 성현은 혼자 고립된 꼴이 되어 버렸다.
크르르르!
사방에서 느껴지는 몬스터들의 기척.
방대한 지하 공간 속에 혼자 남겨진 성현의 주위로 엄청난 수의 언데드 몬스터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네크로맨서가 자신이 부리고 있는 대규모 군단과 떨어진다면 취약해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리치들이 마련해 놓은 치명적인 함정이다.
하지만 성현은 이 상황 속에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미안하지만 내 능력이 뭔지는 몰랐나 보네.”
친절히 자신들의 집안으로 초대해 준 리치들에게.
손님으로서의 본분을 보여 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