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그들의 움직임 (4)
“크아아아!”
숲속에서 몬스터의 무리가 쏟아지며 성채를 공격했다.
황야 지대에서 넘어온 오우거와 각종 야수 몬스터들이었다.
던전의 입구가 생성되었다는 것.
그리고 성현과 군단의 존재에 대해 인지한 황야 지대의 몬스터들은 곧장 어둠 숲을 침범하며 쳐들어왔다.
단순히 침입자들을 제거하기 위함이 아닌 본능적으로 던전의 밖으로 나가기 위함도 있었다.
그로 인해 성현의 군단은 황야 지대의 개척 작업과 함께 방어전을 동시에 치르는 중이었다.
놈들은 어떻게든 그들을 밀어붙이거나 따돌리며 나아가려 했다.
물론 확실한 방비를 해두었고, 워낙에 촘촘히 방어망을 짜둔 덕에 전처럼 몬스터가 시선을 피해 새어 나갈 구멍 따윈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은 그리 쉽지 않았다.
“저 녀석들… 보통 몬스터가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군.”
성채 위의 로칸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몰려드는 붉은 기운의 몬스터들의 모습.
보통 같은 던전이라 해도 종이 다른 몬스터들은 사이가 좋지 못해 서로를 공격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성현이 도윤일을 상대하느라 던전의 몬스터를 유인했을 때만 해도, 서로 뒤엉키며 싸우는 녀석들이 많아 꽤나 지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게 해당하지 않았다.
놈들 모두가 붉은 기운을 띠고 있었고, 마치 같은 동족이라도 되는 듯 눈앞의 적을 함께 공격할 뿐이었다.
‘이런 현상은 우리도 처음 보는 건데. 여태 상대해 온 따로 노는 몬스터들이 아니라 우리와 비슷하게 보일 정도로군.’
로칸이 인상을 슬쩍 찌푸렸다.
마치 따로 놀던 그들이 성현의 군단이 된 이후, 거리낌 없이 함께 협동하며 활동하고 있는 것처럼.
저들도 붉은 힘 아래 또 하나의 군단이 된 듯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저 이질적인 기운이 가져다주는 힘의 증폭보다,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놈들의 행동이 더욱 위협적인 요소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콰아앙!
“크어어어!”
로칸은 성벽 위를 타오른 오우거의 머리를 통째로 날려 버렸다.
개체 하나하나가 준보스급에 가까울 만큼 강력한 붉은 힘의 몬스터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세워둔 견고한 성채는 쉽게 부서지지 않았다.
견고한 자재에 더해, 진보한 축성술, 약간의 마법적인 도움까지 더해져 상대가 최상위 몬스터들이라 해도 어지간한 충격은 거뜬히 버틸 수 있었다.
덕분에 성채는 괴력과 무식한 생명력을 지닌 놈들이 무작정 밀고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주었다.
하지만 워낙 강력한 상대다 보니 피해는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었고, ‘보스’라는 또 다른 변수까지 있었다.
콰과과광!
한쪽 성벽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무너진 성벽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오우거 군주의 모습.
“그아아아아!”
오우거 왕 ‘몰고르’가 거친 포효를 내뱉었다.
성벽을 부수고 나타난 위압적인 놈의 등장.
성채 안에 있던 다크엘프들의 화살이 날아들어 몰고르에게 박혔지만, 녀석은 멀쩡한 모습으로 팔을 휘둘렀다.
쿠구구궁!
무너진 성벽의 틈을 단숨에 커다랗게 늘려 버린 몰고르.
그 틈으로 다른 오우거와 몬스터들이 안으로 진입했고, 성채 안의 그림자 군단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막아라!”
미리 이런 상황에 대비해 대기 중이던 웨어울프 전사와 해골 기사들이 나서며 놈들과 맞붙었다.
하나 전장은 급격히 혼란해졌다.
“그어어어!”
오우거들의 왕 몰고르 역시 자신의 거체를 성채 안으로 들였다.
그렇지 않아도 강력한 고레벨 대의 S랭크 보스 몬스터.
모든 능력을 증폭시키는 붉은 힘을 얻게 된 보스 몬스터답게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로칸은 주저 없이 놈의 앞을 막아섰다.
콰아앙!
다가서던 몰고르를 강타한 로칸.
하지만 녀석은 그리 큰 피해를 입지 않았고, 쥐고 있던 도끼를 세차게 휘둘렀다.
로칸은 급히 거리를 벌리며 빠져나왔지만, 험악한 굉음이 터져 나오며 주위가 초토화되었다.
쿠구구구.
“역시 괴물이 따로 없군.”
인상을 찌푸린 로칸이 먼지 속에서 빠져나왔다.
온통 찣겨진 살점과 피범벅이 되어 있는 몰고르의 주위 모습이 보였다.
조준이 잘못된 탓에 애꿎은 자기 수하들만 수십을 죽여 버리긴 했지만, 놈의 저 괴력만큼은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역시나 보통 상대는 아니었다.
여태 던전 안에서 본 적 없는 수준의 막강한 적이다.
S급의 보스 몬스터이자 웨어울프 로드인 로칸 역시도 홀로 막기엔 벅찰 정도의 상대.
“…하지만 등장이 조금 느렸다.”
로칸의 시선이 슬쩍 옆을 향했다.
어둠 숲에 마련된 여러 거점 중에 가장 많은 숫자가 몰려들어 다소 고전하긴 했다만.
버틴 시간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콰아아아앙!
날아든 거대한 불덩이가 몰고르의 정면을 강타했다.
매우 빠른 속도로 투사체가 날아들어 피할 겨를도 없었던 데다, 그 위력은 굉장했다.
몰고르조차 한쪽 무릎을 꿇고 휘청일 정도였다.
“용케 죽지는 않고 있었군.”
성벽 위에 나타난 이즈나가 피식 웃었다.
다른 거점에 몰려들던 몬스터들을 전멸시키고서 곧장 이쪽으로 합류한 그녀였고.
전장에 난입한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촤아아악!
일어서려는 몰고르를 뒤덮은 단단한 거미줄.
수많은 철갑 거미와 함께 나타난 니아드라였다.
물론 몰고르는 특유의 괴력으로 곧장 니아드라의 거미줄을 뜯어냈다.
하지만 여전히 거미줄의 일부는 떨어지지 않아 그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쿠웅!
“크르르륵!”
게아드, 자고스, 그롬, 올렉 등.
몸이 그을린 몰고르의 주위로 성현의 군주들이 둘러쌌다.
로칸 혼자서 붉은 힘을 머금은 몰고르를 상대하기란 무리겠지만, 이 정도의 군주들이 몰려온 이상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보스들의 보스 사냥이었다.
* * *
후우우웅!
한편, 여섯 번째 필드인 황야 지대의 하늘 위.
칼라일과 데스나이트들이 악령병사와 함께 전진하며 새로운 필드를 접수하고 있는 동안, 성현은 안타라스와 함께 또 다른 붉은 기운을 쫓아가고 있었다.
다크엘프인 카론의 특성 매의 눈을 통해 바라본 결과.
오우거의 군주가 아닌 또 다른 존재가 이질적인 기운을 품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로 향하던 중 성현은 위에서 어렴풋한 인간형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쿠우우웅!
비룡 안타라스가 지상에 내려섰다.
그로 인해 주변 나무들이 우르르 무너졌고, 안타라스는 두 날개를 펼치며 길을 막아섰다.
타악!
성현이 녀석의 등 뒤에서 내렸다.
그리곤 멈춰선 정체불명의 존재와 마주했다.
“역시 뭔가 다르다 싶었더니. 마족이었던 건가.”
“…….”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는 남자의 모습.
하지만 물론 진짜 사람이 아니라 마족이었다.
“이 지역 안엔 마족이 없다는 건 확실히 들었고. 그럼 일곱 번째 필드의 마족이겠군.”
성현이 그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상대는 여전히 말을 내뱉지 않았다.
어딘가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녀석.
후드를 완전히 눌러쓴 것도 아니었는데, 그 안쪽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너희가 꾸민 짓인지 아니면 다른 뭔가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너희에게 들어야 할 게 많…….”
휙!
성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족은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딜!’
물론 놈을 순순히 놓아줄 생각 따윈 없는 성현은 곧바로 놈의 뒤를 쫓았다.
안타라스 역시 하늘로 날아올라 놈의 앞을 미리 막아서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황량한 숲속에서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수많은 기척이 일시에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건……?”
갑작스레 생겨난 그 기척에 성현은 급히 무기를 들었다.
카앙!
목을 향해 날아든 예리한 낫이 성현의 검에 가로막혔다.
매우 빠른 움직임으로 미끄러지듯 다가온 녀석들.
사나운 검은 존재가 그를 향해 적의를 드러냈다.
“키이이이익!”
‘이 녀석들은… 스펙터!’
성현을 공격해 오는 스펙터 무리가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이 녀석들 역시 모두 황야 지대의 너머 다음 지역인 일곱 번째 필드에 나타나는 몬스터였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마치 도망간 마족에게 시간을 끌어 주려는 듯한 타이밍에 더해, 그를 막아서며 발목을 잡는 놈들의 행동이었다.
‘아무리 스펙터가 같은 필드의 존재라 해도, 놈들에게 속한 직접적인 권속은 아닐 텐데… 마족을 위해 이런 식으로까지 행동하는 건 이상해.’
이즈나와 뱀파이어에게 속했던 데스하운드나 가고일 정도의 직접적인 종속 관계였다면 모를까.
스펙터와 해당 지역의 마족은 그런 관계에 있을 사이는 아니었다.
방어전을 치르며 로칸이 느꼈던 기시감을 성현도 느꼈다.
‘어쨌든 이런 놈들한테 발목을 잡혀서, 단서를 여기서 놓쳐 버릴 수야 없지.’
카앙!
또 다른 낫을 받아친 성현은 단숨에 반격을 가했다.
그의 검이 검은 악령의 몸을 깊숙이 베어냈고, 스펙터는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녀석의 목숨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키이이익!”
곧장 일어선 스펙터가 다시 싸움에 합류했다.
베었을 때부터 충분하지 않았던 느낌이 들었던 대로다.
콰아앙!
그렇게 날아든 낫이 그의 뒤편에 있는 바위를 산산조각 내었다.
스펙터들은 이미 그 자체로 S급의 몬스터.
물론 성현에게 달려든 이 스펙터들 역시 오우거처럼 이질적인 붉은 힘을 품고 있었다.
그로 인해 개체마다 굉장히 강력한 스펙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보스급은 아닌지라 하나쯤이야 성현이 간단히 베어낼 수 있겠지만, 놈들은 단체로 합공하며 성현을 촘촘히 압박해오고 있었다.
스펙터들의 숫자가 상당한지라 아무리 성현이라 해도 쉽사리 뚫어내기 어려웠다.
‘예상대로 골치 아픈 녀석들이군. 시간이 없는 와중에 하필 이런 적들이 나타났으니.’
성현의 표정이 슬쩍 찌푸려졌다.
스펙터들은 벤시와 비슷한 계열의 몬스터답게 물리 저항까지 일부 갖추고 있었다.
방금 그 일격으로 한 방에 스펙터를 죽이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붉은 힘으로 인해 뻥튀기된 생명력을 생각한다면, 검만으로 상대하기엔 많은 시간을 끌릴 수밖에 없는 귀찮은 몬스터들이다.
‘일일이 베고 있을 시간은 없다. 그렇다면 똑같은 방식으로 상대해 주지.’
후우우웅!
성현은 단숨에 자신의 그림자를 뻗었다.
그의 등 뒤로 수많은 벤시 무리가 쏟아졌고, 거대한 낫을 든 벤시 여왕 ‘메이트리아’가 나타났다.
“키이이익!”
수백이 넘는 스펙터들과 벤시 군단이 뒤엉키며 난전이 벌어졌다
서로가 같은 속성인 만큼 물리 저항 특성 같은 건 의미가 없었다.
다만 가장 중요한 차이는 한쪽만이 보스가 나타나 있다는 것.
서걱!
“퀴이이익!”
메이트리아가 낫을 휘두를 때마다 스펙터들의 몸은 종잇장처럼 찢어발겨졌다.
그렇게 검은 악령들이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성현은 재빨리 발을 박차며 나아갔다.
콰아아아!
하늘에서 쏟아진 거친 불길.
안타라스가 뱉어낸 화염의 숨결이었고, 달아나고 있던 마족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하였다.
덕분에 성현은 곧장 마족의 뒤를 따라잡았다.
촤아악!
“큭……!”
성현의 검이 번뜩이며 마족을 베었다.
순간적으로 목을 비튼 녀석의 움직임 탓에 제대로 목을 베진 못했다.
하지만 그가 덮어쓰고 있던 후드가 베여 나가며, 감춰져 있던 놈의 얼굴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