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갈림길 (2)
천태성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여자를 바라봤다.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지스의 S랭크 헌터.
그중에서도 백명의 길드장인 한승희를 찍어 눌렀다던 이즈나였다.
워낙 최근에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건이다 보니 자세한 정보를 듣지는 못했지만.
소문으로 들어서 한눈에 바로 알아볼 수 있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네가 그 야차를 쓰러뜨렸단 말이지.”
천태성의 눈이 길게 늘어졌다.
확실히 보통은 아니었다.
바로 뒤까지 접근하는 동안, 전혀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S급 헌터의 뒤를 잡을 수 있는 건 오직 S급 헌터뿐.
‘과연, 주군의 말씀이 들어맞았군.’
타악!
이즈나는 마법으로 검을 회수했다.
한창 사냥으로 레벨을 올리던 이즈나가 사전에 이야기도 없이 백명 길드원들의 뒤에 따라붙었던 이유는 성현이 직접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성현은 S랭크의 던전이 청성의 남쪽 구역에 발생했다는 것을 도중에 전해 들었고.
정확히 이번 작전 지역과 같은 장소는 아니라고 해도 굉장히 가깝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재수가 없다면 해당 던전을 해결하러 내려온 청성의 최고 간부와 마주치게 될 것을 예상했기에 바로 이즈나를 바깥으로 보낸 것이다.
“어서 정하지?”
이즈나가 그를 향해 말했다.
슬쩍 찌푸려진 천태성의 표정.
“…….”
천태성은 쥐고 있던 검을 만지작거렸다.
청성의 최고 간부.
청성 최고의 전력이라는 3성의 멤버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이제 막 주목을 받기 시작한 S급 헌터 정도를 제압해 내지 못할 실력은 아니었다.
‘벨까, 말까.’
이미 검 손잡이에 가져가 있던 천태성의 손.
하지만 바로 뽑아 들진 않았다.
분위기만 봐도 알 수 있듯 여기서 검을 뽑는 순간, 이 자리에 있던 둘 중 한 명은 죽는다.
일반 간부직을 쳐내는 것도 아니고, S급 헌터 간의 사투는 길드 간 전면전에 돌입한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이지스라면 그의 입장에서는 그동안 있는지도 몰랐던 무명의 길드였지만.
급격히 세력을 키운 지금은 청성이라고 해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는 세력이 되었다.
세력을 떨치던 대형 길드 세 곳을 흡수하고서 경기 서남부 지역을 통째로 먹어 치웠으니 그 규모만 해도 상당했다.
‘그래 봤자 청성에 비하면 날파리에 불과한 놈들이… 꽤 거슬린단 말이지.’
충돌이 생기면 승패는 뻔한 수준의 격차.
그런 주제에 대등하다는 듯이 코앞에서 설치고 다니며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게 문제였다.
딱히 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기에.
마음 같아선 이 자리에서 당장 베어 버리는 싶은 심정이었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예전 같았으면 그딴 소리는 입에 담기도 전에 네 목이 날아갔을 테니까.”
쯧 하고 혀를 찬 천태성이 등을 휙 돌리며 물러났다.
저런 길드 따위 얼마든지 박살 낼 수 있었지만, 분쟁 지역을 맞대고 있는 다른 9대 길드가 문제였다.
화신과 백룡 길드 사이에서 동시에 마찰을 빚고 있는 와중에 무턱대고 사고를 칠 순 없었다.
이지스라는 길드에 대해선 아직 알려진 바도 없었기에.
독단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길드의 판단을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네 길드장에게 잘 전해 두는 게 좋을 거다.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주제 파악을 잘하는 게 좋을 거라고.”
“달아나는 주제에 그렇게 말이 길어지면 무섭지가 않은데.”
“건방진 꼴을 보니 곧 다시 보게 되겠군. 기대하고 있으마.”
코웃음을 친 천태성은 땅을 박차 순식간에 그 자리를 떠났다.
“후…….”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진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임대한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두 S급 헌터가 벌이는 신경전을 피가 말리는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그였다.
자칫하면 청성과의 전면전이라는 최악의 사태로 번질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으니.
십 년은 감수한 듯한 그였다.
‘조금은 아쉽네.’
이즈나는 슬쩍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꽤 강해 보이던 녀석이었기에 제대로 된 상대에게 검의 성능과 강해진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고 싶었는데, 그러기엔 이미 물 건너간 상황이었다.
하지만 성현이 바라던 것은 딱 이 선까지였다.
당장에 홀로 저 거대 세력과 전면전을 벌이기엔 무리였지만, 청성조차 내키는 대로 무작정 건드릴 순 없는 세력권이 되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크으윽…….”
“다들 부상자를 챙겨!”
한편, 정신을 차린 임대한은 곧장 길드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갑작스레 나타난 천태성의 기습 공격에 휩쓸려 널브러진 부상자들이 있었다.
단순히 벽만 부수고 나타난 것이 아니었기에 S급 헌터의 공격에 다치고만 백명 길드의 헌터들.
개중엔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큰 부상을 입은 이도 있었다.
“젠장, 지독한 상처로군…….”
“비켜.”
길드원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던 임대한을 밀치고 끼어든 이즈나.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당황한 임대한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품속에서 포션 병을 꺼내 들고 있었다.
‘포션? 소용없는 짓을…….’
그녀의 행동을 본 임대한이 생각했다.
입은 상처가 깊고 부위도 좋지 않아 포션으로 회복시키기엔 너무 심각한 부상이었다.
아무리 헌터의 몸이라고 한들 버티기 힘든 수준이라 곧 숨이 끊어질 것이었다.
“마셔라.”
“컥…….”
하지만 이즈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부상자의 입 속에 포션병을 쑤셔 넣었다.
꿀꺽꿀꺽 들어가는 포션에 고통스러운 듯 몸을 꿈틀거렸지만.
이즈나는 남김없이 포션을 털어 넣어 주었다.
츠츠츠츳!
그러자 곧 부상자의 몸에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러진 뼈가 다시 붙고, 상처가 아물면서 쏟아지던 출혈이 완전히 멈추었으며, 바닥난 기력이 조금이나마 돌아왔다.
덕분에 백짓장처럼 창백해졌던 남자의 안색에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 이럴 수가. 저 부상이 바로 나았다고?”
놀란 임대한의 표정이 굳었다.
아무리 S급의 간부들이나 마시는 고가의 포션이라고 해도, 이 정도 부상을 잡아내기란 불가능할 터인데.
대체 무얼 먹인 것인지는 몰라도 그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치유 포션은 아니었다.
“가, 감사합니다. 이대로 죽는 줄 알았는데…….”
“말할 기운이 있으면 몸을 일으키기나 해라. 싸움이 다 끝날 때까진 뒤로 빠져 있어.”
고개를 꾸벅이는 남자에게 이즈나가 까칠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죽음의 문턱 앞에서 목숨을 구한 남자는 몇 번이나 감사를 표했고.
임대한은 충격을 받은 듯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이지스의 헌터도 아닌 산하 길드에 불과한 부상자.
그것도 C급에 불과한 일반 길드원이다.
한데 그런 남자 하나를 살리기 위해 거리낌 없이 저런 엄청난 값어치의 포션을 먹이다니.
청성이나 화신 같은 9대 길드도 결코 하지 못하는 일이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할 수 있어도 하지 않을 일이겠지만.
‘난데없이 내세운 길드의 규율들도 그렇고, 이상한 기행이나 일삼는 녀석들이라 생각했는데. 이거… 아무래도 이지스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겠군.’
* * *
한편, 성현은 지하실의 던전 안에서 꽤 긴 시간에 걸친 사냥을 끝마쳤다.
밀집 지역을 휘젓고 다닌 만큼, 굉장한 숫자의 야수들을 베어 내며 대량의 경험치를 얻어 내었고.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사냥이었다.
‘이제 장소도 옮겨야 하고, 잠깐 휴식도 필요하니까 여기서 가장 가까운 거점에 일단 들러 볼까.’
성현은 휴식을 하기 위해 주변 거점으로 향했다.
확보한 벌목장 옆에 지어진 간단한 목책으로 만든 성이 있었고, 그곳은 고블린들이 점거하고 있는 장소였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하자 성현은 생각지도 못한 광경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 이게 무슨?”
초토화되어 있는 목책 성의 모습.
부서진 벽 안으로 움푹 파인 구덩이들이 곳곳에 남겨져 있었으며, 세워 둔 건물들은 모조리 무너져 있었다.
창고나 거주 시설을 위해 지은 것이었지 제대로 된 방어를 염두에 두고서 만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이렇게 당해 버린 건 정상이 아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절대 이 주변 몬스터에게 이렇게 당할 정도는 아닐 텐데.’
결코 적지 않은 숫자의 고블린들이 점거하고 있던 장소였다.
비록 세간에서 몬스터들 중 최약체 취급을 받는 고블린이라고 한들.
성현의 수하인 고블린들은 150레벨을 가뿐히 넘어선 괴수 그 자체였고, 쉽게 몬스터들에게 당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성현이 각 거점과 지역에 배치시켜 둔 수하들이라면.
인근 구역에서 출몰하는 몬스터의 수와 전력을 감안하고서 필요한 수를 계산해 배치한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커다란 변수라도 발생하지 않은 이상 벌어질 수 없는 일.
성현은 곧장 성채의 안으로 들어섰고, 안으로 들어가자 더욱 지독한 꼴을 보게 되었다.
처참히 살해당한 고블린들의 사체.
흔적도 없이 망가진 시설들과 정체 모를 덩굴들이 곳곳에 얽혀 있었다.
‘어떤 녀석들이 이런 짓을…….’
무릎을 꿇은 성현은 사체와 흔적들을 자세히 살폈다.
쉽사리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남겨진 전투의 흔적으로 보아 그가 여태 상대해 온 야수종은 아니었고, 상당히 몸집이 큰 몬스터들이 벌인 짓이었다.
제대로 대응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서 단숨에 목책 안으로 밀고 들어온 듯한 흔적.
뭣보다 최소한 이곳에 주둔해 있는 고블린을 전멸시킬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몬스터였다는 소리였다.
휘릭!
갑작스럽게 성현의 발목을 잡아챈 덩굴.
깜짝 놀란 성현은 발을 빼내려 했지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나무 덩굴이 아니었다.
‘이건……!’
콰득!
그제야 성현은 제대로 힘을 주어 발을 빼냈고.
곧장 옆을 향해 몸을 던졌다.
머리 위로 거대한 덩굴이 날아들어 성현이 있던 자리를 내려찍었다.
쿠구구구!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한 땅.
숲 전체가 뒤흔들리며 묵직한 소리들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우어어어어!”
‘엔트?’
발밑에서 솟구쳐 나온 거대한 나무 괴수들.
분노한 녀석들의 포효가 숲을 뒤흔들었다.
쿠웅!
엔트들이 커다란 팔을 휘둘렀고, 성현은 급히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사방에서 나타난 놈들에게 꼼짝 없이 포위된 성현이었다.
성채 내부에서 솟구쳐 나온 녀석들뿐만 아니라, 목책 바깥에서도 나무들 사이에서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두 마리가 아닌 대규모의 엔트 무리.
‘그럼 여길 습격해 초토화시킨 것도 이 녀석들이란 말인가?’
벌목장이라면 확실히 엔트들이 반길 만한 시설은 아니다.
놈들의 화를 더 돋우는 데에도 일조했겠지.
하지만 성현으로선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상대였다.
‘하지만 엔트라면 분명 네 번째 필드엔 없는 몬스터였어.’
이미 네 번째 필드인 생명의 땅을 대부분 점거하게 된 상황인데.
여태껏 나타나지 않았다가 이제야 갑자기 나타나다니 이상했다.
거기다 이곳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던 로칸조차도 엔트라는 몬스터가 존재한다는 말은 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다른 필드에서 넘어온 건가?’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든 성현.
그는 뽑아 들었던 검을 다시 칼집에 집어넣었다.
‘일단 빨리 이 녀석들을 치워 줘야겠군.’
엔트라면 저 견고해 보이는 겉모습처럼 물리적인 충격에도 굉장히 강한 몬스터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반대로 마법엔 비교적 취약한 편이었고.
특히 나무 녀석들답게 불엔 사족을 못 쓴다.
[군주, 이즈나의 그림자를 흡수하였습니다!]
[‘마력의 심장’ 특성이 활성화됩니다!]
“활활 태워 주마.”
성현의 양손에 강력한 불길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