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일타삼피 (3)
비류, 백명, 오성 길드.
드넓은 지역에 걸쳐 굳건한 입지를 보이고 있던 세 길드였다.
하지만 고작 며칠 사이에 그 모든 대형 길드가 몰락하고 말았다.
백명의 길드장은 적에게 굴복해 투항했고, 나머지 두 길드장은 그대로 목이 날아갔다.
그들 모두가 커다란 세력을 이끌고 있던 S급 헌터였기에 세간에 큰 충격을 안겨 준 대형 사건이었다.
치열한 경쟁을 벌여 온 세 길드 중 하나가 승리를 쟁취해 낸 것도 아니고.
외부에서 개입한 거대 길드의 소행도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새롭게 등장한 신생 길드가 지역의 패자로 우뚝 올라섰다.
경기 서남부 지역을 모두 먹어 치운 이지스 길드는 순식간에 수도권의 강력한 세력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백명 길드는 그대로 흡수되었고, 비류와 오성 길드는 항복한 간부들만을 살려 둬 꼭두각시로 세운 뒤 산하 길드로 만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각 머리들이 이지스에 고스란히 흡수된 만큼.
대형 길드의 아래에 있던 산하 길드들도 자연히 이지스 길드의 휘하로 들어오게 되었다.
“다들 빠짐없이 모여들었군.”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었으니 얌전히 고개 숙여야지.”
서남부 지역에 퍼져 있던 수백의 산하 길드장들이 이지스 길드의 부름을 받고서 몰려든 모습.
비류든 오성이든 간에 대형 길드라면 그 아래 수많은 산하 길드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확실한 구역의 장악을 위해선 이지스 길드 역시 이들의 존재가 필요했다.
직접적인 이지스의 구성 길드원들은 오직 그의 수하로만 이루어져 있었지만.
그들만으로는 서남부 지역 전체를 소화해 내기엔 당연히 무리였고, 공백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성현도 그들을 산하 길드로 받아들인 것이다.
“어제까진 적이었던 놈들도 바로 옆에 있군.”
“그래도 이지스하고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니까 이번 일에 불만은 없어. 우리가 무슨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니고.”
보통 지배 길드가 무너지면 그 아래의 산하 길드들도 대부분 교체되어 치워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소속만 바뀌었을 뿐 이전의 활동 영역도 보장해 주고, 산하 길드의 입장에선 크게 바뀐 것이 없었다.
거기다 이번 싸움은 산하 길드들이야 참여조차 하지 못하고 속전속결로 끝나 버렸으니.
이지스 길드와 얽힌 앙금이나 원한 관계도 전혀 없었다.
물론 소속이 달라 그동안 싸워 왔던 산하 길드들 사이에서 몇몇 원수지간이 있기는 했다.
“서, 서필주 너 이 새끼……! 네놈도 여기 와 있었던 거냐!”
“머저리 같은 놈, 장소도 봐 가면서 까불어라.”
“진정해. 이런 자리에서 소란을 피웠다가 괜히 찍히기라도 하면 자기만 손해 보는 거니까.”
“이… 이런 젠장할.”
만류하는 주변의 목소리에 남자는 화를 삭이며 겨우 물러났다.
당연하게도 직접적인 상하 관계에 놓인 산하 길드는 소속된 길드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이다.
엄연한 ‘갑’의 입장인 이지스 길드에 찾아온 것인 만큼 함부로 날뛸 수가 없었다.
이러한 입장 차이 덕에 문제를 조율하는 것 정도야 길드 차원에서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다들 모이셨군요. 세부적인 조율에 대해서라면 잠시 뒤에 개별적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우선 안내 사항에 대해 먼저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여러분께서 반드시 지켜 주셔야 할 내용입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지역을 손에 쥔 지배 길드가 바뀐 만큼, 그들은 바뀐 세상에 따른 새로운 규칙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전혀 반갑지 않은 불리한 규칙이라도 말이다.
직원들에게 안내장을 받아 든 산하 길드장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소리야?”
“정말 이걸 우리더러 따르라고?”
앞으로 지역 내에서 이루어질 각성자 관리에 대한 방침.
일반인을 상대로 한 폭력과 부조리를 금하고, 혹 이를 저질렀을 경우 실질적인 처벌까지 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지스 길드가 자기 구역 안에서 벌여 온 기행에 대해서는 길드장들도 듣기는 했지만.
설마 이번에 새롭게 차지한 모든 지역에까지 앞뒤 가리지 않고서 확대 적용을 할 줄은 몰랐다.
당연히 산하 길드의 입장에선 강한 반발이 뒤따랐다.
“이건 말도 안 돼!”
“비각성자 놈들이 우리 앞에서 눈 부라리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한다고?”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비각성자 눈치를 봐 가면서 살아야 돼?”
길드장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높아졌다.
반발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지만, 불만을 가진 쪽이 더 많았고 분위기는 그쪽으로 기울어 갔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불길이 점화되어 불만이 터져 나오기 직전.
딱 알맞은 타이밍에 이지스의 간부들이 등장했다.
“길드 안에서 무슨 소란이지?”
“헉…….”
뜨겁게 달아오르던 분위기가 일시에 딱 얼어붙었다.
두 S급 헌터의 등장.
삼대 길드장 중 한승희와 유정수를 쓰러뜨린 장본인, 즉 이즈나와 로칸이었다.
‘왜 이런 곳에 직접…….’
‘이, 이게 S급 헌터라는 건가?’
두 헌터가 뿜어내는 위압감에 길드장들은 바짝 찌그러졌다.
이곳에 있는 길드장 전부가 달려들어도 도저히 당해 낼 수 없는 상대였다.
무려 S급 헌터 둘이 길드장도 아니고 한 길드에 간부직으로 소속되어 있다니.
보통의 대형 길드 수준을 훌쩍 넘어선 수준이었다.
심지어 백명의 길드장 한승희까지 얌전히 그들의 밑으로 숙이고 들어갔으니, 대외적으로 알려진 이지스의 S급 헌터만 셋이다.
비류와 백명, 그리고 오성 길드를 모두 합친 것보다 강한 길드라는 것이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
로칸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지만, 길드장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며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불만이 있어 봐야 간부의 앞에선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꽤 볼만한 광경이네.’
그 모습을 일반 직원들 사이에 섞여 지켜보고 있던 성현은 피식 웃었다.
저들이 그동안 다른 이들을 힘으로 찍어 눌러 왔듯.
그들의 투정쯤이야 성현도 힘으로 가볍게 찍어 눌러 줄 생각이었다.
애초에 새로운 규칙이라 해 봐야 시민들에게 폭력을 저지르지 말고 부당한 갑질을 하지 말라는 게 전부였다.
그 이상으로 통제하려는 것도 아니고.
이것도 못 받아들이겠다면 지역을 떠나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나갈 생각도 전혀 안 하겠지만.’
여태 자신들이 일궈 놓은 기반을 다 버리고서 떠날 순 없을 것이다.
한번 자리 잡은 길드가 다른 지역으로 통째로 옮겨 가는 것은 사실상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이다.
새로운 지역에서 구역을 확보하고 새롭게 자리를 잡으려면 또 다른 길드와 싸워야 했고, 감수해야 할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번 일 때문에 이탈하는 길드는 사실상 없을 것이다.
어차피 산하 길드는 지배 길드의 말에 거스를 수 없으니까.
뭐든지 힘 앞에선 얌전해지는 게 바로 헌터들의 세상이다.
* * *
이지스 길드의 본사 건물 안.
어째서인지 백명의 길드장인 한승희가 따로 배정까지 받은 집무실의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들어간다.”
덜컥!
성현이 집무실의 안으로 들어왔다.
또다시 나타난 그의 모습에 한승희는 기겁을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자, 여기 오늘까지 처리해야 할 서류들이야. 산하 길드와 조율할 사항이 조금 많았던 모양이네.”
“자, 잠깐만!”
터엉!
책상 위에 이미 한가득 쌓아 올려진 서류들 사이로.
새로운 서류 더미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그 처참한 광경에 죽상이 된 한승희는 성현을 올려다보았다.
“나도 헌터라고… 헌터……. 도장 찍는 직원이 아니라 몬스터 사냥꾼!”
“어쩔 수 없잖아. 할 일은 다하고 쉬어야지. 당장은 바쁠 때니까 참아.”
“그거 다 네가 벌여 놓은 짓이잖아!”
“뭐, 그건 맞지.”
터엉!
성현은 서류 세 박스를 그녀의 책상 위에 더 얹어 주었다.
길드 규모가 급격히 커지면서 일반 직원의 인력을 충원해야 하는 데다 새로 얻은 구역들의 시스템을 재정비하고, 산하 길드에 지시 사항을 내리는 등등.
처리해야 할 일들이 한가득 몰려 있었다.
“왜 길드장이 하는 일까지 나한테 가져다주는 건데? 항복해서 들어온 적한테 이런 걸 맡기는 게 정상이야?”
“그만큼 신뢰하니까 그렇지.”
물론 신뢰하는 대상은 한승희가 아니라 그녀의 목에 새겨진 마법이지만.
그만큼 이즈나가 한승희에게 건 피의 맹약이 강력했기 때문에 비밀이 새어 나가는 것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었다.
혈마법은 뱀파이어들조차 잊고 있던 과거의 마법이다.
던전에서 나오는 것들만을 접하는 인간들은 당연하게도 차원 너머의 다른 요소들에 대해선 아예 기초적인 지식조차 없었다.
그 말인즉, 이쪽 세계에서 혈마법을 풀어 낼 방법을 알아낼 가능성은 사실상 전혀 없다는 것이다.
“…젠장.”
울상이 된 한승희는 털썩 자리에 앉아 쏟아진 일들을 묵묵히 처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역시 일처리 하나는 빠르군.’
능숙한 그녀의 일처리에 성현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간 이 살벌한 헌터 세계에서 백명이라는 대형 길드를 운영해 온 한승희였다.
아무리 이즈나를 비롯한 마족들의 습득 능력이 빠르다고 해도, 길드 운영에 대한 능력은 하루 이틀 만에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성현에게 딱 필요했던 인재라는 소리다.
그때, 한승희가 성현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이지스의 길드원들은 다 네 부하들인 거지?”
“부하?”
“그러니까… 소환수 말이야.”
“그새 알아챘나 보네. 눈치가 빠른걸. 맞아.”
그녀의 물음에 성현이 답했다.
어차피 이만큼이나 길드 깊숙이 들어온 한승희에게 딱히 비밀로 할 거리는 아니었다.
‘어디서 이만한 고위 헌터들이 튀어나왔나 했더니 역시나… 그 뱀파이어 녀석을 보고서 대강 예상이야 했지만, 믿기지가 않네.’
이즈나와의 싸움을 떠올린 한승희는 고개를 저었다.
던전의 보스 몬스터를 되살려 자신의 수하로 삼았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어떻게 몬스터 시체가 저 정도 지능을 지니고 행동이 가능한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겉모습만으로는 영락없는 인간 헌터나 다름없었으니.
이는 단순히 특성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건 간에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가 믿을 수 없는 능력을 지닌 자라는 사실은 확실했다.
이런 힘을 지녔다면, 과거에 무모하게 청성과 척을 졌다고 할 수도 없을 듯했다.
당장 맞부딪히기엔 시기상조라고 해도, 진지하게 9대 길드의 자리 중 하나를 노려 볼 만한 저력이 있었다.
“슬슬 나가 봐야겠군.”
한편, 시간을 슬쩍 확인한 성현이 등을 돌렸다.
“당장 급한 업무들은 다 넘겨줬으니, 최소 이삼 일간은 내가 여길 들를 일은 없을 거야. 그리고 일을 하나 더 맡기려고 하는데.”
“일이라면 이미 산더미처럼 쌓여 있거든?”
“아니, 너 말고. 백명의 길드원들을 좀 움직여야겠어.”
“우리 길드원들을?”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던 한승희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백명은 엄연히 이지스 아래에 종속된 산하 길드였기에 길드장인 성현이 못 움직일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무슨 일로 그들을 움직이려는 건지는 알아야 했다.
“어려운 임무는 아니야. 너희 구역 위쪽에 손봐 줄 길드들이 조금 있어서 말이지.”
“뭐? 구역 위쪽이라면…….”
백명 길드의 구역 북쪽.
확고한 대형 길드의 존재 없이 크고 작은 중견급 길드들이 다수 포진해 있는 분쟁 지역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만 그럴 뿐.
사실상 청성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앞마당이나 다름없었다.
9대 길드쯤 되면 자신의 지역 밖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마련이었고, 그로 인해 해당 지역의 길드들과 비밀스러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우리 길드원도 여럿 붙여 줄 테니 청성과 모종의 관계가 있는 길드는 모조리 밀어 버려. 확보한 구역은 백명 길드가 관리하고.”
“여기서 위쪽으로 더 확장을 하려 하다니… 청성과 아예 구역을 맞대기라도 할 작정이야?”
놀란 한승희가 물었다.
경기 서남부 지역 대부분을 먹어 치운 이지스였고, 여기서 위쪽 구역까지 먹어 치우게 된다면 진짜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서 청성과 마주하게 된다.
분명 그는 청성에게 쫓기는 입장이었을 텐데.
그러니 청성과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걸 꺼려해야 하는 입장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성현은 당연하다는 듯 답할 뿐이었다.
“애초에 이 길드부터가 청성을 부수기 위해 만들어진 거야. 그러니… 이제부터 진짜 시작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