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일타삼피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는 비류 길드의 지부들.
지배 길드이자 대형 길드인 비류 길드의 구역인 만큼 어느 누구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지부는 어느 곳 할 것 없이 동시다발적인 공격을 받고 있었다.
쿠당탕!
“커억……!”
검은 코트를 입은 헌터들의 무리가 안으로 들이닥쳤고.
복도에서 벌어진 놈들과의 싸움에 비류 길드원들은 우르르 쓰러졌다.
분명 숫자는 비류 길드 헌터들이 더 많았으나, 싸움의 양상은 일방적이었다.
압도적인 실력을 지닌 습격자들의 칼날에 그들은 하나둘 무력화된 채 쓰러지고 말았다.
놈들을 쓰러뜨리기는커녕 시간을 끌거나 버티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젠장, 도저히 막을 수가…….”
“거기 문 닫아!”
쿠웅!
동료의 말에 남자는 급히 복도로 향하는 문을 틀어막았다.
특수 제작된 문에다 비상 잠금장치를 걸어 잠갔지만.
이게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는 건 비류 길드원들도 잘 알고 있었다.
“뭐 하고 있어! 본부로 바로 연락해!”
“젠장, 연결이 안 된다고!”
남자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조금 전부터 계속해서 연락을 시도했지만, 어째서인지 연락이 전혀 닿지를 않았다.
24시간 유지되는 긴급 연락망마저도 두절이 된 상태.
길드 시스템상,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이런 습격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긴급 연락망이었는데, 정작 필요할 때 연락이 안 된다는 건 어불성설인 셈이었다.
비류 길드의 본거지가 대규모 공격을 받고 있는 게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
콰아아앙!
“크아아악!”
커다란 불덩이가 날아들어 문과 벽을 우르르 무너뜨렸다.
충격에 빠진 길드원들은 바닥을 나뒹굴었고.
그중 심각한 부상을 입은 이들 몇 명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크윽…….”
“마, 마법?”
무너진 벽 사이로 검은 코트 차림의 헌터들이 들이닥쳤다.
복도의 헌터들이라면 이미 당한 지 오래였다.
압도적인 실력의 차이.
비류의 길드원들은 이곳의 인원만으로는 놈들을 도저히 당해 낼 수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잠깐, 그 문양은… 이지스의 길드원이냐?”
“잘 알고 있군.”
새하얀 머리칼을 지닌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이즈나의 수하인 뱀파이어 일족.
외부적으로 알려진 바로는 이지스의 평길드원이었다.
“우릴 노리려 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뭐야? 웃기지 마라. 그런 일은…….”
“그새 흘러 들어가고 만 건가. 철저히 비밀로 부쳤을 텐데.”
“티… 팀장님?”
비류의 길드원 사이에서 상반된 반응이 나타났다.
이지스 길드를 공격하려던 건에 대해 알고 있는 길드원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런 작전의 특성상 최대한 비밀로 부쳐야 일이 수월했으니 바로 전날까지도 일반 길드원들에겐 전혀 전달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작전도 결국 상대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정확히는 정보를 주워들을 필요도 없이 성현이 놈들의 행동을 예측했을 뿐이지만.
“네놈들…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고나 있나?”
“무슨 짓을 저지르려 했던 건지도 모르는 건 바로 너희들 같은데.”
“당장 우릴 제압했다고 우쭐해하지 마라. 두 길드 사이의 규모 차이를 모르는 건 아니겠지. 너흰 지금 감당도 못 할 짓을 벌이는 중이다.”
“어차피 싸워야 할 상대라면 규모가 무슨 상관이지?”
“우리 계획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항복을 하거나 교섭을 요청해 왔어야지. 그쪽 결정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한참 잘못 생각하고 있군.”
“글쎄.”
남자의 입가가 피식 올라갔다.
하등종 따위가 자기가 입에 담고 있는 분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는 데 대한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옳았는지 틀렸는지는 곧 알게 될 거다. 네놈들의 목숨은 그분의 말 한 마디에 달린 거나 다름없으니.”
* * *
자신들이 속한 지부만 공격을 받았을 거라는 길드원들의 생각과는 달리.
대규모 공격을 받고 있는 비류 길드의 본거지 사정도 좋지 못했다.
모든 지부가 동시다발적인 습격을 받은 데다 그들의 머리나 다름없는 길드의 본거지 역시 똑같은 사정이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더한 꼴을 당하고 있었다.
콰과과광!
“놈들이 온다! 위치를 사수해!”
“우어어어!”
무자비하게 들이닥치는 서리 트롤 군단.
그렇지 않아도 강력하기 짝이 없는 몬스터였는데, 그림자를 품고 있는 놈들의 파괴력은 더욱 놀라운 수준이었다.
심지어 갑옷을 입고 있어 무기가 쉽게 박히지도 않았다.
저 갑옷을 뚫어 봐야 트롤이라면 재생력도 뛰어날 게 뻔했기에 더욱더 절망스러운 상황이었다.
“끄아아악!”
“이런 괴물들을 어떻게 막으라는 거야!”
사정없이 쓰러지고 튕겨져 나가는 비류의 길드원들.
하지만 서리 트롤들의 수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잠깐, 저기 좀 봐…….”
“저, 저게 대체 뭐야?”
정문 방향에서 몰려들고 있는, 말도 안 되는 규모의 몬스터 군단.
달빛 아래 가득 찬 그림자들의 향연에 그만 입을 딱 벌린 길드원들은 힘없이 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한편, 건물 밖으로 나온 구창환은 버럭 소리쳤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대대적인 공격을 받고 있는 길드의 모습.
수만의 몬스터가 사방에서 몰려들고 있었고, 간부를 포함한 길드원들은 꼼짝없이 압도당하고 있었다.
“영왕, 그놈이 벌써 움직일 수 있다니… 아니, 그보다 숫자가 많다고 해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을 리가……,”
구창환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네크로맨서 영왕이 엄청난 무리의 언데드를 부린다는 것쯤이야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나타난 몬스터들의 전력은 말이 되지 않았다.
여기에 있는 수만 마리의 몬스터들 모두가 비류 길드원의 수준을 훌쩍 넘어서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 그때 봤던 소환수들이 정예가 아니었다는 말인가……?’
던전에서 마주했을 때 보았던 영왕의 소환수들.
구창환은 그때 본 소환수들이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 꺼내 든 최정예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단 한 명의 헌터가 수만의 소환수를 거느린다는 것만 해도 상식을 깨부수는 일이다.
한데 모든 소환수가 그 정도로 높은 수준을 지녔을 리는 없으니, 당연한 추론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구창환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성현은 이미 상식을 수도 없이 깨 온 이레귤러라는 사실이었다.
콰아아아!
“저… 저건…….”
구창환의 시선이 멍하니 위를 향했다.
불길을 내뿜고 있는 거대한 비룡 안카라스.
그는 녀석의 모습을 보자마자 일반적인 와이번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일반 몬스터를 일으킨 언데드가 아니야……. 보스 몬스터다.’
보스 몬스터는 결코 네크로맨서의 소환수가 될 수 없었다.
너무나도 기본적이고 절대적인 또 하나의 ‘상식’이었다.
지금 구창환의 시야엔 보이지 않아도, 사방에서 군주들이 나타나 수하들과 함께 길드를 마구 휘젓고 있었다.
덕분에 A급 헌터인 간부들조차 버텨 내질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이었다.
쿠우우웅!
비룡 안카라스와 함께 바닥에 내려선 남자.
그의 등장에 구창환은 흠칫 물러섰다.
“너… 너는……!”
뼈 가면을 쓰고 있는 남자의 모습.
저들의 모든 그림자를 품고 있는 S급의 네크로맨서 영왕(影王)이었다.
하지만 구창환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네놈은 대체 뭐냐!”
“모르는 척하려는 건가?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을 텐데.”
“웃기지 마라! 똑같은 가면을 뒤집어썼다고 내가 못 알아볼 것 같아!”
구창환은 신경질적으로 버럭 소리쳤다.
자세히 따질 것도 없이 자신과 싸웠던 영왕과는 목소리와 체형부터가 달랐다.
“하긴 이런 걸 눈치 못 채진 않겠지. 영왕이라는 이명을 지닌 헌터라면 내 쪽이 진짜야. 네가 본 건 내 부하 중 한 명이었고.”
“부, 부하라고? 그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자신이 본 것이 가짜였다니.
그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늑대인간으로 변했던 그의 힘은 최소 S급 헌터의 전력임은 확실했다.
직접 맞붙어 봤기에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이제 막 S급에 들어선 영왕이 그 정도의 헌터를 자신의 아래에 두고 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뭐, 내 말을 믿든 말든 상관없지. 어차피 이제 곧 알게 될 테니까.”
스릉!
성현은 주저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뒤편에 있던 안카라스는 다시 날개를 펼쳐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이 자식이… 나와 해 보자는 거냐?”
“같은 S급 헌터를 먼저 건드렸으면 이 정도는 각오해 뒀어야지. 부상까지 당한 몸뚱이로 이렇게 무방비하게 있으면, 어서 먹어 치워 달라고 부탁하는 꼴이나 다름없잖아.”
성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만약 비류 길드가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 청성이나 다른 외부의 세력들을 끌어들였다면 굉장히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하지만 구창환은 자기가 적으로 돌린 영왕의 진짜 전력을 가늠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고.
결국 이렇게 손쉬운 상황이 연출되었다.
“감히 누굴 얕잡아보고 있는 거냐!”
버럭 소리친 구창환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로칸을 통해 그의 전력과 부상의 정도에 대해 알고 있는 성현은 여유롭게 검을 움켜쥐었다.
촤아아악!
번뜩이는 섬광과 함께,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 * *
S급 헌터, 광견 구창환의 죽음.
그가 이끌고 있던 비류 길드 역시 무너졌다.
고작 하룻밤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고, 얼마 전 화려한 데뷔전을 치렀던 영왕의 두 번째 작품이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이 커다란 사건은 전국에 빠르게 소식이 알려지며 대서특필되었다.
많은 이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만큼이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소식이 하나 더 있었다.
비류라는 커다란 길드가 무너지며 생겨난 공백.
원래대로라면 이 공백을 차지하기 위해 주변의 온갖 길드들이 몰려들며 한참을 혼란 속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허나 이번에는 한 길드가 그 모든 몫을 가져가게 되었다.
가장 먼저 상황을 파악한 이지스 길드가 비류의 각 지부들을 빠르게 장악해 둔 덕이었다.
너무나도 깔끔한 솜씨로 처리되었고, 순식간에 이루어진 과정이었기에.
다른 길드들은 숟가락 하나를 얹을 시도조차 못 했다.
덕분에 이지스는 ‘운 좋게’ 텅 비어 버린 비류의 구역 전체를 집어삼킬 수 있었다.
대형 길드 하나가 통째로 무너진 자리에.
이미 두각을 드러내고 있던 길드도 아닌, 완전히 새로운 대형 길드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러한 길드의 행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자들도 있었다.
끼이익!
“이미 와 있었군.”
“우리 사이에 인사 같은 건 됐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자고.”
경기 서남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다른 두 대형 길드.
백명과 오성의 길드장이 한자리에 모였다.
평소대로라면 얼굴을 마주하기도 꺼려할 만큼 사이가 좋지 못한 이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우리 삼대 길드 중 한 자리가 공석이 되어 버렸군.”
“그래, 구창환이 죽었어. 비류 길드는 이지스인지 뭔지 하는 녀석들한테 통째로 집어삼켜졌고.”
백명의 길드장, 한승희가 말했다.
그러자 오성의 길드장, 유정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지스에 대해서라면 따로 알아봤는데 알려진 바가 거의 없더군. 하지만 정말 놈들이 우연히 어부지리로 길드를 삼켰을 거라는 생각 안 해. 영왕과 길드 사이에 무언가 거래가 오갔겠지.”
“아무리 S급의 네크로맨서라도 대형 길드를 혼자 부수기엔 부담이 있을 테니 다른 길드의 손을 빌린 게 분명해.”
“하지만 대형 길드도 아니고 구역 하나가 전부인 중견급 길드의 손을 굳이 빌린 걸로 봐서는… 알려진 것보다 놈들의 전력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군.”
이지스 길드의 정확한 전력에 대해선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었다.
하지만 비류 길드의 각 지부를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아예 길드까지 통째로 집어삼킨 걸로 봐서는 결코 평범한 중견 길드가 아니었다.
“그래 봤자 그 정도 규모로는 한계가 있는 법이지.”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해. S급 헌터인 영왕이 직접 나서서 구창환을 죽이고 본거지를 박살 내서 그렇지, 이지스 자체는 그렇게 대단한 전력은 아닐 테니까.”
마주하고 있는 한승희와 유정수의 눈빛이 빛났다.
어쩌다 기회를 잘 노리기야 했다지만, 놈들에겐 분수에 넘치는 크기의 영역이었다.
두 길드장이 이곳에 모인 것도 이지스 길드를 제거하고서 놈들의 영역을 정확히 반으로 나눠 가지기 위함이었다.
사실 이지스 길드 하나쯤이야 그들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무너뜨릴 수 있겠지만.
조급한 마음에 비슷한 체급의 두 길드끼리 다투다 자멸하는 꼴은 사절이었고, 둘의 싸움은 그 이후로 미루기 위함이었다.
“그럼 슬슬 진짜 본론으로…….”
콰아아앙!
요란한 폭음과 함께 박살이 난 문.
갑작스러운 소란에 길드장들의 시선이 휙 돌아갔고, 두 명의 헌터가 안으로 들어선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에게 당한 것인지 입구를 지키고 있던 길드원들은 모두 쓰러져 있었다.
“…네놈들은 뭐지?”
한승희와 유정수가 무기를 집어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히 두 길드장이 만나는 장소에 이런 식으로 들이닥치다니.
겁을 상실했다는 말로도 모자란 짓거리였다.
하지만 그들의 앞에 선 검은 코트 차림의 두 헌터는 오히려 당당했다.
“한승희 그리고 유정수,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군.”
“우리의 정체를 알면서도 찾아왔다는 거냐?”
“그래. 너희의 이름값이 필요하거든.”
스릉!
새하얀 은발의 여성이 검을 뽑아 들었다.
비류 길드를 흡수하고, 대형 길드라는 타이틀을 얻어 냈을 만큼 덩치가 커진 이지스 길드다.
그렇기에 그 크기에 걸맞은 새로운 간판이 필요했다.
이미 S급 헌터인 성현은 사정으로 인해 전면에 나설 수 없는 만큼, 새로운 인물이 필요한 시점.
로칸과 이즈나.
여기 있는 두 거물급 길드장을 잡고서, 새롭게 데뷔할 두 명의 S급 헌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