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미친개에게 필요한 건 (5)
구역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중견 길드들은 충분히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은 세력이라고 볼 수 있었다.
주변 지역에 한해선 나름의 인지도도 있고, 자신들의 입맛대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다.
하지만 지역 단위로 진출하는 대형 길드쯤 되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단순한 지역 길드가 아닌 소속된 산하 길드를 이끌고, 휘두를 수 있는 영향력과 전력도 차원이 달라졌다.
중견 길드는 기껏해야 규모에 따라 A급이나 B급 헌터가 길드장 자리를 맡아 이끌어 가기 마련이지만.
대형 길드로서 세력을 유지하려면 최소 S급의 길드장이 필요했고, 그 아래에 A급의 고위 헌터들이 여럿 포진해 있었다.
당연히 그 밑에 속한 일반 직원이나 헌터들의 규모 차이도 더욱 확연히 눈에 띄었다.
대형 길드로 분류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국내의 사정에 무시 못 할 영향을 끼치는 세력이 되었다는 뜻이고.
일반적인 길드의 범주를 넘어섰다는 의미였다.
헌터 업계를 주도해 나가는 세력 중 하나.
비록 거대 길드엔 미치지 못한다고 한들, 대형 길드로서 군림하고 있는 비류 길드 역시 이는 마찬가지였다.
“대표님 차량이다. 통과시켜!”
삼엄한 경계가 이루어지고 있는 비류 길드의 본거지.
산 중턱에 위치한 그들의 본거지는 여러 채의 건물들이 주르륵 늘어서 있는 아주 넓은 부지를 지니고 있었다.
길드 부지 안에 검은색 차량 한 대가 들어섰다.
터엉!
다소 신경질적으로 여닫힌 차량의 문.
비류의 길드장, 구창환이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길드로 돌아온 그를 맞이해 다가온 남자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돌아오셨습니까.”
“그래.”
“좀 늦으셨군요. S급 헌터와 마찰이 있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남자가 슬쩍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해가 사라진 지 오래인 늦은 밤 시간대였다.
S급 던전이 생성된 데다 다른 헌터와의 마찰이 있었던 걸 감안하더라도, 일정에 나섰던 이른 시간대를 생각하면 꽤 늦은 시간이다.
“도망간 쥐새끼를 잡으러 온 사방을 뒤지고 왔지. 결국엔 못 잡았지만.”
구창환이 인상을 팍 찌푸리며 답했다.
분명 싸우고 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녀석이 던전 안에 있어 확실히 잡았다고 생각했다.
한데 도중에 난입한 청성 놈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것은 물론.
영왕 녀석은 그들 모두를 따돌리며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
낮의 일을 상기한 구창환은 이를 빠득 갈았다.
청성의 헌터들이 던전에 들어서며 입구 쪽에 보초까지 세워 뒀다는데, 그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차라리 막지 못했다면 모를까.
허접한 하급 헌터도 아니고 청성의 길드원들이 아예 밖으로 나간 걸 보지도 못했을 리는 없었다.
“그럼 녀석이 길드장님의 추적을 따돌렸다는 말씀입니까?”
남자가 놀라워하며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의 길드장 구창환은 추적에 관련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추적계 능력자라면 이래저래 한계점을 가지고 있거나 애매한 효과가 발목을 잡기 마련이었는데.
구창환의 능력만큼은 S급 헌터의 특성답게 아주 놀라운 실력을 자랑했다.
직접 마주한 이에 한해서는 아주 조금의 흔적이라도 남겨져 있다면 어디로 도망가든 지구 끝까지 쫓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의 능력도 빛을 발하지 못했다.
아무리 주변을 뒤져 봐도 추적할 흔적조차 전혀 없던 탓에 결국 찾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직접 마주치지까지 한 상대를 놓치게 될 줄이야.
여태 그 지독한 청성 놈들이 개인 헌터 하나를 못 잡고 빌빌대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마지막에 갑자기 사라졌을 땐 무슨 수작을 부렸다고 쳐도, 최소한 던전까지 찾아올 때의 흔적 정도는 남아 있어야 하는데 놈은 그런 게 없었어.”
공간 이동에 관한 능력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굉장히 희소하긴 했지만 사용하는 이들이 있었고, 특히 네크로맨서처럼 마법을 사용하는 직업군이라면 불가능할 게 없었다.
허나 공간 이동 능력이라면 종류를 불문하고서 사용에 붙어 있는 조건이나 제약이 굉장히 많았다.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서 자유자재로 옮겨 다니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
그로선 당최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도윤일, 그 얼빠진 놈이 중간에 나서지만 않았어도… 도망갈 시간도 안 주고 숨통을 끊어 버리는 건데.”
구창환은 짜증스러움이 한가득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길드 건물로 들어서기 위해 그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발을 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갑작스런 통증에 구창환은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큭…….”
“괘, 괜찮으십니까?”
“됐으니까 호들갑 떨지 마.”
인상을 한껏 찌푸린 구창환이 말했다.
오늘 있었던 전투에서 놈에게 입은 부상 때문이었다.
S급 헌터의 몸뚱이에 더해, 치유 포션까지 마신 터라 다시 살점과 뼈가 붙어 엉망이었던 꼴은 회복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몸이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경미한 통증이 남아 있었다.
“아직 말했던 포션은 못 구했나?”
“예. 급히 암시장 쪽에 연락해 구해 보려 하곤 있지만 물건을 확보하는 데엔 최소 사흘은 걸릴 듯하다고 합니다.”
“사흘? 젠장, 몸이 다 멀쩡해지고 나서야 구하겠군.”
구창환이 마신 치유 포션도 충분히 값비싼 고급 포션이었다.
일반인들은 물론 어지간한 헌터들은 손에 넣기도 어려울 정도였고, 비싼 만큼 그 효과도 확실했다.
그러나 아무리 치유 포션이라고 해도 깊은 상처로 인한 후유증까지 완전히 치유해 줄 수는 없었다.
다만, 보통의 포션이 아닌 최상급의 치유 포션은 달랐다.
성현이야 언제나 주스 마시듯 들이키는 최상급의 포션들이었지만.
바깥에선 수량이 언제나 부족한 물건이라 S급 헌터들조차 제때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급난이 심각했다.
애초에 일류 연금술사가 최고급의 재료로 수많은 실패를 거듭한 후 겨우 하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
아직 각성자 연금술사들은 차원 너머에 거주하던 뱀파이어들에 비하면 실력이 한참 부족했다.
“국내에선 물량이 나오는 족족 9대 길드에서 쓸어 가고 있는지라… 애초에 그 정도 실력을 지닌 연금술사들은 대부분 그들이 독점하고 있고요.”
“그런 건 나도 안다, 이 자식아.”
어차피 쉽게 구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안 했던 구창환이다.
다만 내일 일정에 차질이 생길 거라는 생각에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후유증이야 하루 이틀이면 없어질 테니 됐어. 하지만 그 자식은 무조건 잡아야 한다.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지.”
“길드원들을 움직일까요?”
“그래. 청성의 손에 넘어가기 전에 주변 구역을 싹 뒤지도록 시켜. 어차피 청성의 눈치까지 보는 놈이라 대놓고 움직이기도 어려울 테고 아예 꼼짝도 못 하게 더 압박한다.”
구창환은 자신에게 엿을 먹인 영왕을 놓아줄 생각 따윈 없었다.
아예 그의 목에 거금의 현상금을 걸기까지 할 계획이었다.
물론 S급 헌터에게 현상금을 아무리 높게 붙여 봐야 어느 미친 현상금 사냥꾼들이 덤벼들겠냐마는.
녀석에게 압박감을 크게 느끼게 하기 위한 상징적인 의미였다.
“하지만 놈이 무사히 추적을 따돌리는 데 성공했다면 저희 길드에게 보복하려 들지도 모릅니다.”
“우릴 공격한다고?”
“영왕이라면 이미 S급 헌터가 되기도 전에 길드 하나를 홀로 부순 전적이 있지 않습니까. 청성까지 적으로 돌릴 만큼 행동에 거침이 없는 녀석이니 마찰을 빚은 저희를 공격해 오더라도 이상할 건 없습니다.”
“하기야… 그럴지도 모르겠군.”
꽤 일리 있는 말에 구창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S급 헌터라도 대형 길드를 혼자서 부수겠다고 달려드는 놈은 많지 않았지만.
놈은 청성에게도 덤벼드는 미친놈이니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어쩌면 길드장께서 부상을 입은 틈을 타 길드를 공격해 올지도 모릅니다. 녀석에겐 가장 큰 기회일 테니 미리 방비를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나중에 공격을 해 올 수야 있겠지만, 녀석도 당분간은 움직이지 못해.”
영왕이 지녔던 정체불명의 변신계 능력.
도무지 인간답지 않은 자가 회복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세간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능력이라 구창환도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녀석은 청성의 최고 간부인 도윤일의 마법에 호되게 당하고 말았다.
오히려 자신의 상처는 애교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온몸에 입고 말았고.
어떻게 용케 빠져나갔다고는 해도 그 정도 상처를 입었으면 당분간은 꼼짝도 못 하고 회복에 전념해야 할 터였다.
“거기다 방비야 언제나 하고 있으니 괜히 쓸데없이 힘을 빼놓을 필요야 없지.”
굳이 헌터 하나에 반응할 것도 없이, 비류 길드는 이미 구역을 맞대고 있는 쟁쟁한 경쟁 길드들이 있었다.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체급을 지닌 대형 길드들.
언제 전면전이 터지거나 마찰이 빚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 만큼.
특별한 일이 있는 게 아니더라도 언제나 방심하지 않고 대비가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에야 부랴부랴 뭉치는 중견 길드들하곤 기본적인 시스템부터가 달랐다.
대형 길드로서 자본과 규모가 받쳐 주니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내일 길드 하나를 밀어 버리기로 하지 않았나?”
“아, 예. 이지스 길드에 대한 계획은 예정대로 진행할 겁니다. 소속 헌터들의 수준이 꽤 뛰어나다는 소문이 돌긴 하지만, 그래 봐야 중견 길드 하나니 별문제는 없을 겁니다.”
얼마 전 황야 길드의 구역을 빼앗으며 나타난 이지스 길드.
명목상의 동맹이라고 해도 자신의 세력권 아래에 있던 길드에 손을 댄 이상, 그에 따른 보복은 필요했다.
속전속결로 빠르게 공격을 가할 작정이다.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지도 못한 상대인 데다 규모에서 오는 차이도 결코 뒤집을 수가 없었다.
“인원은 확실히 챙겨 가. 괜히 방심하다가 얻어맞을 바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찍어 누르는 게 훨씬 나으니까. 뒷소문이 수상한 녀석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예, 알겠습니다.”
끼익!
구창환은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책상에 털썩 걸터앉은 그는 시선을 돌렸다.
그의 취향이 한껏 들어간 동양식 건축물에 크게 뚫려 있는 창.
꽤나 선명한 달빛이 드넓은 길드 부지를 비추고 있었다.
“그래… 감히 내 길드에 도전하려는 놈이 있다면 짓밟아 줘야지.”
구창환의 입가가 씩 올라갔다.
치열한 헌터의 세계 속에서 피와 힘으로서 쌓아 온 수년간에 걸친 그의 결과물이었다.
그는 이 일대에 걸쳐 강대한 자신의 세력을 구축했고, 수천여 명의 헌터들이 그의 휘하에 있었다.
이 정도 규모의 길드를 건드리는 건 그 자체로 부담이 있었기에.
어떤 적도 그들을 쉽게 넘보지 못했다.
강대한 9대 길드라고 해도 다른 경쟁자의 견제나 세력 구도 등 함부로 밀고 들어오기엔 이래저래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순간.
‘잠깐, 뭐지?’
정체 모를 기척이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외부인의 출입이 불가능한 길드의 부지 안에 있었기에 그가 모르는 기척이란 존재할 리 없을 터.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구창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창가로 다가선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
“저… 저건…….”
밖을 내다본 구창환의 두 눈이 커졌다.
쿠구구구!
달빛 아래 일렁이는 그림자의 물결.
땅을 가득 메운 채 끝도 보이지 않는 그림자의 대군이 몰려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