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이 구역은 이제 제 겁니다 (2)
덜컹!
“길드장님! 오셨습니까?”
“그래, 다 들었다. 어떤 미친놈들이 우릴 건드렸다면서.”
문을 박차고 건물 안으로 들어선 황야의 길드장이 인상을 팍 찌푸리며 말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길드 건물 내엔 비상 소집된 길드원들이 한가득 모여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수금에 나섰던 헌터들이 모조리 개박살이 났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긴급하게 소집이 이루어진 것이다.
“대체 어떤 놈들이 벌인 짓이야?”
“아직도 알 수 없습니다. 길드 문장도 보이지 않았다고 하고, 짚이는 데가 전혀 없습니다.”
갑작스러운 소속 불명 헌터들의 습격.
평소라면 경쟁 길드의 소행이 아닐까 의심했겠지만, 나타난 헌터들 중엔 아는 얼굴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최소한 이 주변 지역의 길드나 헌터가 나선 것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이 새끼들… 우리 엿 먹이려고 바깥에서 용병이라도 끌고 온 거 아냐?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길드장이 이를 빠득 갈았다.
그가 길드까지 찾아오는 동안에도 현장에 나가 있던 이들을 포함해 서른이 넘는 숫자가 당했다고 한다.
이 정도로 집단적인 공격을 해 오는 걸 보면 전면전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어떤 세력이 나선 것인지도 짐작이 가지 않는 상황.
“다들 무기 챙겨! 다 뒤집어 놓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 일 벌인 새끼들 잡아다 족친다.”
“예!”
길드장이 소리치자, 소집되었던 헌터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인근 거리 전체를 다 뒤집어 놓더라도 어떻게든 침입자들을 모조리 색출해 낼 작정이었다.
불만이야 나오겠지만,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길드의 이름이 걸린 사안이다.
“가자!”
그렇게 길드원들은 무기까지 하나씩 손에 쥔 채 바깥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앞선 길드원이 입구의 문고리를 잡는 순간.
콰아아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문 앞 쪽에 있던 길드원들은 몸이 붕 떠오르며 튕겨져 나갔고, 벽과 문 파편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콰득!
박살 난 문 조각을 짓밟고 나타난 한 명의 불청객.
“딱 좋게들 모여 있네.”
이즈나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빠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인간들이 우글우글 몰려 있었다.
갑작스런 침입자의 등장에 머뭇거리던 헌터들의 사이로 황야의 길드장이 앞으로 나섰다.
“네놈이 우릴 공격한 놈들 중 하나로군. 부하들하고 함께 온 것도 아니고, 혼자서 이곳에 나타나다니 이제 와서 목숨을 구걸해 보려는 거냐?”
“목숨을 구걸하려는 건 아니고, 너희한테 구걸할 기회를 주려는 거지.”
“뭐야?”
“우리의 주군… 아니, 길드장께서 정한 방침이다. 쓸어버리기 전에 한 번의 기회는 주도록 하지.”
길드장의 인상이 팍 찌푸려졌다.
웬 처음 보는 헌터가 혼자 나타나서 저런 소리를 늘어놓고 있다니.
엄청난 강자였다면 이미 모를 수가 없을 만큼 얼굴이 알려져 있을 텐데,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저러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바로 검을 빼 들진 않았다.
“꽤 자신이 있나 본데, 너희는 어느 길드 소속이지?”
“그딴 건 알 것 없고, 내가 이래 봬도 피를 싫어하는 평화주의자거든. 좋은 말로 할 때 구역 안에 있는 떨거지들 데리고 꺼져.”
“이… 이 새끼가!”
격분한 길드장이 이를 빠득 갈았다.
저딴 건방진 소리를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그 치열한 경쟁과 희생을 치르고 얻은 길드의 구역이다.
대형 길드 아래의 간섭 따위는 없는 자신들만의 영역이었고, 이는 거저로 얻을 수 있었던 게 아니었다.
“저놈부터 죽이고 시작한다! 쳐라!”
분노한 길드장의 호통이 떨어졌다.
그러자 길드 건물 내에 있던 모든 헌터들이 일제히 이즈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즈나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고, 허리춤의 무기조차 뽑아 들지 않았다.
콰직!
“크아악!”
가장 앞서 달려든 헌터가 주먹에 맞아 한참을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양옆에서 검을 휘두르던 헌터들도 똑같았다.
쩌어엉!
치켜들고 있던 방패까지 두 동강 내며 날려 버리는 그녀의 말도 안 되는 괴력.
이즈나의 주먹이 한 대씩 꽂힌 헌터들은 맞은 부위의 뼈들이 완전히 박살이 난 채 바닥에 널브러졌다.
“저, 저게 뭐야……!”
“완전히 괴물이잖아?”
기세에 눌려 조금씩 머뭇거리기 시작한 황야 길드의 헌터들.
압도적인 숫자의 차이가 있음에도 되레 이즈나가 뿜어내는 위압감에 눌려 버릴 지경이었다.
“헌터라길래 얼마 전에 상대했던 녀석들 정도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따분하네.”
거의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헌터들을 박살 내고 있는 이즈나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이미 S급 보스 몬스터 수준의 무지막지한 힘을 지니고 있었고, 이마저도 인간 행세를 위해 그림자를 억제하며 모든 힘을 사용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한데 힘을 감춰 둔 상태에서도 이런 잔챙이들은 그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이런 중견 길드에선 기껏해야 길드장이 B급 헌터의 수준이었으니.
숫자가 몇이나 되건 S급인 그녀를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끄, 끝까지 싸워! 지치고 있는 게 보인다!”
황야의 길드장이 동요하는 헌터들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정작 자신도 이즈나의 무력 앞에서 누구보다 겁먹은 상태였다.
도저히 빈틈이 보이지 않는 그녀의 움직임.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게 분명한 이즈나의 모습에 길드장은 압도적인 실력 차를 직감하고 말았다.
“젠장, 젠장……!”
뒤편에 서 있던 길드장은 재빨리 등을 돌려 전장을 이탈했다.
대체 어떤 괴물들이 끼어든 것인지는 몰라도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적이 아니었다.
일단 살기 위해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챙그랑!
급히 몸을 던진 그는 창문을 깨고서 뛰쳐나왔다.
험악한 소리가 들려오는 길드 건물을 뒤로하고서.
허겁지겁 몸을 일으킨 길드장은 골목을 그대로 빠져나가려 내달렸다.
“젠장, 빨리 비류 길드에게 알려야……!”
“부하들은 두고 가려는 건가?”
“뭣?”
갑작스레 나타난 로칸이 길목을 가로막았다.
저도 모르게 멈춰 선 길드장은 그가 뿜어내는 위압감에 놀라 검을 휘둘러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네놈에겐 누군가를 이끌 자격이 없다.”
“자, 잠깐만……!”
콰직!
길드장의 시체가 풀썩 쓰러졌다.
로칸은 무심하게 손에 묻은 피를 털었고, 뒤이어 성현이 나타나 길드장의 시체를 제대로 확인했다.
다른 녀석들이라면 몰라도 길드장을 놓치면 뒤처리가 성가셔질 수 있었다.
‘확실히 죽었군.’
자리에서 일어난 성현은 슬쩍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수고했어. 바깥세상은 좀 어때?”
“어색하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차차 적응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온통 인간들로 가득한 바깥세상.
인지를 하고 있었다고는 해도 로칸으로선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기에 이질적인 세상에 대해 아무래도 거부감이 조금 들었다.
하지만 최소한 인간을 죽이고 싶다는 본능적인 충동은 없어진 지 오래였다.
예전 같았더라면 인간과 마주하자마자 그들을 살육하고 파괴하려 들었겠지만, 그림자를 받아들이며 그런 강박에서 벗어나게 된 로칸이었다.
“뭣보다 앞으로 계속해서 임무를 수행해야 할 곳이니 빠르게 익숙해지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내가 생각한 웨어울프의 이미지하곤 다르다니까.’
로칸의 차분한 말투에 성현은 생각했다.
성현이 지난 며칠 동안 로칸을 지켜봐 오며 놀랐던 점은 그가 상당히 침착하고 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이었다.
웨어울프의 이미지를 생각하고 다혈질에 감정적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되레 이즈나보다 더 침착한 편이었다.
물론 늑대인간의 모습이 되었을 때야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긴 했다.
어찌 됐건 일을 마친 성현은 로칸과 함께 길드 건물로 걸어갔다.
예상대로 길드 쪽은 이미 다 정리되어 있었다.
“쓰러진 놈들이나 데리고 꺼져라. 앞으로 이 주변에 발을 들였다간 목을 뽑아 버릴 테니 얼씬도 하지 말고.”
“예, 예……!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으르렁거리는 이즈나의 말에 쫓겨난 헌터들은 부랴부랴 부상자들을 업고서 달아났다.
죽은 이들도 몇 명 있었지만, 전의가 꺾여 항복한 헌터들은 죽이지 않고서 내보냈다.
어차피 저런 실력의 녀석들은 죽이든 살리든 아무 의미도 없는 수준이었고, 이미 길드장이 죽어 버린 이상 다시 결집될 가능성도 없었다.
성현의 지시대로 일을 잘 처리해 놓은 이즈나였다.
“오셨군요. 주… 아니, 길드장님.”
“우리끼리 있을 때는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돼.”
“아, 네. 주군.”
이즈나의 얼굴에 잠깐 화색이 돌았다.
뱀파이어와 웨어울프 두 종족 모두 금방 인간들의 문화를 익혔을 만큼 지능이 굉장히 뛰어난 편이었지만, 그래도 이래저래 신경 쓸 게 많다 보니 머리가 아프긴 한 모양이었다.
완전히 익숙해지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듯 보였다.
“그래도 잠깐 쓸 건물치곤 나쁘지 않네.”
내부에 들어선 성현이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도심에 위치한 5층짜리 건물.
늦은 시간이라 일반 직원들은 대부분 퇴근했고, 남아 있던 몇몇 직원들도 싸움 소리에 놀라 달아난 뒤였다.
덕분에 텅 빈 길드 건물 안에 성현과 이즈나, 로칸 셋만이 덩그러니 들어와 있었다.
덜컹!
조금 더 안으로 들어서자, 내부엔 길드의 금고와 각종 서류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이걸 챙긴다거나 파쇄할 새 따윈 없었으니 그대로 이어받아서 진행하면 되었다.
황야 길드의 구역을 그대로 넘겨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일.
길드원만 수백이 넘는 규모의 중견 길드를 단 하루 만에 궤멸시키고, 길드 건물은 물론 영역을 통째로 집어삼킨 그들이었다.
‘청성의 시선도 피하고 누군가의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있으니 내 상황에 딱 맞는 지역이지.’
거대 길드의 영역 내에서 활동하는 각 지역 길드들은 모든 수입에 수수료를 떼이고, 이런저런 간섭을 받게 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선 그럴 일이 없었다.
황야 길드는 누군가의 산하 길드가 아니었고 영향권 안에 있지도 않았기에, 그들로부터 빼앗은 이 구역은 온전히 성현의 구역으로 넘어온 것이다.
‘물론… 이제 시작일 뿐이지만.’
성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분명 이 정도 구역 하나를 차지한 것만으로도 일반인의 기준에선 큰돈을 쓸어 담고, 굉장한 영향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하지만 성현은 겨우 이 정도 성과에 만족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길드 놀이나 하려고 만든 게 아니니까. 전체 판도에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내게 의미 있는 패가 되어 줄 수 있겠지.’
성현은 자신이 손에 쥔 이 길드를 9대 길드와 동등한 위치까지 끌어올릴 생각이었다.
물론 그러기에 앞서, 본격적으로 길드를 키우고 굴려 나가기 위해선 돈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도 굉장히 많은 돈이.
* * *
“직접 보는 건 꽤 간만이네.”
여우 가면을 쓴 흑련의 길드장.
서연화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지부들과 몇 번 거래를 했다고는 들었는데, 이번엔 무슨 일로 내 얼굴을 직접 보러 왔지?”
“이제 조금 더 본격적으로 거래를 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녀의 앞에 선 성현이 답했다.
그동안 그는 흑련의 지부를 찾을 때마다 최소 수천에서 수억 원어치의 거래를 이어 왔다.
개인 거래자로서 이 정도의 양은 결코 적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수수료를 줄여 주는 우대 조건과 흑련의 길드장에게 특별 대우를 받으며 독대할 수 있을 수준의 VIP가 가지는 거래량에 비하면 턱도 없는 양이었다.
“이제 좀 신뢰 관계가 쌓인 건가? 이거 참 기대되네.”
서연화가 씩 웃으며 말했다.
여태까진 작은 규모의 거래를 이어 왔던 그였지만, 자신의 촉이 틀렸을 거라고 의심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럼 어디 가져온 물건들 좀 볼까?”
“잠깐, 여기선 곤란해. 조금 더 큰 공간이 필요한데.”
“뭐? 여기보다?”
그의 말에 서연화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공간을 쓰는 듯한 그의 능력이라면 이미 알고 있었고, 이미 물건을 건네받기 위해 꽤 큰 방의 공간을 비워 둔 참이었다.
하지만 성현은 재차 이 정도 공간으론 턱도 없다며 주장했다.
결국 밖으로 나온 그들은 텅 비어 있는 길드의 13번 창고로 향했다.
“이 정도 공간이면 충분하겠네.”
커다란 창고의 한가운데에 선 성현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급적이면 이 자리에서 거래를 끝내는 게 좋겠지만… 오늘 안에 돈을 다 받아 내기는 어렵겠지.”
“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연히 바로 지급 가능해.”
성현의 말에 서연화는 어이없다는 듯 반응했다.
소규모의 지부도 아니고 막대한 검은돈이 쉴 새 없이 오가고 있는 흑련의 본거지였다.
거기다 그는 지금 흑련의 길드장과 독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수십억 원의 거래라도 원한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돈다발을 쑤셔 넣어 줄 수 있었다.
“글쎄, 이 창고를 가득 채우면 아무리 흑련이라도 곤란하지 않겠어? 현금 흐름이라는 게 있으니까.”
“나 참, 허세부리는 남자는 매력 없…….”
띠링!
대답을 대신하듯 성현은 인벤토리를 털어 내었다.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야 직접 보여 주는 편이 간단할 테니까.
“이… 이게 무슨…….”
여우 가면의 너머.
고개를 젖힌 서연화의 입이 쩍 벌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