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그림자의 왕 (2)
사실상 국내를 지배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한 9대 길드의 힘.
고작 개인의 신분으로 이 거대 길드와 관련된 부조리를 제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심지어 이 거대 길드들은 각자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한통속이었다.
각 길드들이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강력하게 경쟁한다고는 하나, 자신의 영역 내에서 사람들에게 저지르는 부조리에 대해서만큼은 서로가 못 본 척 입을 닫고 있었다.
물론 이는 길드 간의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장 상대를 압도적으로 누를 만큼 체급 차가 나는 것도 아니고.
서로의 비밀을 폭로하며 진흙탕 싸움으로 끌고 가다간, 결국 자신들이 움직일 수 있는 운신의 폭만 좁아지는 결과를 초래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 길드들은 힘으로 상대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한이 있어도, 뒤에서 벌이지는 지저분한 일들에 대해선 파헤치지 않기로 합의를 봤다.
그래서 지금 사회가 이 모양이 된 것이기도 했다.
얽히고설킨 거대 길드들의 장악력은 더욱 커져만 갔고, 언론들은 거대 길드 일반 직원의 전화 한 통에도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단순히 언론만이 아니라 모든 매체가 직간접적으로 통제, 감시당하는 디스토피아 뺨치는 사회.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마냥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행히 9대 길드는 서로 치열한 경쟁 관계라는 거지. 거기다 암묵적인 합의가 있다곤 해도 그중 막 나가는 녀석이 있기 마련이니까.’
성현의 힘이 되어 줄 곳은 바로 인천의 백룡 길드였다.
이들은 지저분한 일에 대한 암묵적인 합의건 뭐건, 길드의 성향상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대놓고 미친놈 소리 듣는 길드와 그 길드장이었기에 남들이 뭐라고 떠들건 이미지 따위 알 바가 아닌 것이다.
물론 9대 길드답게 직계 언론사를 몇 곳 쥐고 있긴 했지만.
이만한 규모의 길드에서 이렇게나 자기들 이미지에 신경 안 쓰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는 힘이 전부라는 백룡 측 길드장의 확고한 가치관이 반영된 것이다.
‘아무튼 그 덕분에 내 입장에선 딱 알맞은 카드가 된 셈이지.’
백룡 길드라면 경쟁 길드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폭로전에 나설 곳이었다.
거기다 최근 서울 진출을 노리며 포석을 깔고 있었기에 청성과 접경 지역에서 마찰을 빚고 있던 참이었다.
청성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가 가져온 떡밥을 기꺼이 물어 줄 게 뻔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예상대로였지.’
화면을 들여다본 성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백룡이 쥐고 있는 계열 언론사들이 청성에 대한 기사들을 쏟아 내고 있었다.
똑같은 9대 길드를 뒤에 두고 있는 만큼, 청성이 발악해 봤자 터져 나온 이 기사들을 내리기란 불가능한 일.
뭣보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떡밥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일은 다 끝났습니다. 저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이었는데… 덕분에 진실을 알릴 수 있었군요.”
황석일을 막다가 쓰러졌던 A랭크의 헌터.
서준영이 가면 쓴 성현에게 다가와 고개를 꾸벅였다.
“아뇨. 저도 덕분에 이번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저 혼자였다면,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했겠죠.”
서준영은 이번 일에 성현을 적극적으로 도운 조력자였다
이미 청성과 적대하고 있는 성현이 나서서 이야기해 봐야 진실이 희석되어 버릴 것은 뻔한 일.
당시 현장에 있던 제3자가 직접 폭로하고 증거를 내주어야 더 큰 파장을 불러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역할에 가장 적합했던 것이 서준영이었다.
이번 일로 청성에 대한 반감이 극심해진 그는 접근한 성현의 계획에 기꺼이 동참하며 도왔다.
“황석일의 손에서 제 목숨을 살려 주시기까지 하셨는데,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젠 어떻게 하실 셈이십니까?”
“어떻게 하냐니요?”
“청성과 적대하고 계시다는 건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혼자서 거대한 길드를 상대하는 건, 아무리 S급 헌터라고 해도 쉽지 않을 겁니다.”
서준영이 조금은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 놈들의 손에 허무하게 죽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다.
“괜한 오지랖일 수 있지만… 청성에 맞서시려면 차라리 다른 길드에 몸을 담는 게 나을 겁니다.”
“아뇨,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서준영의 말에 성현은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청성을 무너뜨리려면 경쟁 길드에 몸을 담는 게 훨씬 더 쉬운 길인 것은 맞았다.
아무리 강해도 개인이 길드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성현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입장이었고.
무엇보다 이번 사태만 봐도 알 수 있듯, 다른 거대 길드들도 청성과 근본적으로는 다를 게 없었다.
청성이 가장 앞서 처리해야 할 존재일 뿐.
이 어긋난 사회를 뜯어 고치려는 성현의 입장에선 결국 적으로 마주 서게 될 상대들이었다.
* * *
“와, 이거 완전 미친놈들 아니야?”
거리를 걷는 시민들이 쉴 새 없이 수군거렸다.
워낙에 충격적인 소식이었으니 금세 모두에게 퍼졌고, 이견의 여지도 없이 입을 모아 분개했다.
“뒤에서 온갖 더러운 짓을 하고 다니는 건 알고 있었지만, 결계에 갇힌 시민들을 죽이고 다녀?”
“이런 쳐 죽일 놈들! 헌터만 아니었어도…….”
“제대로 보호해 줄 것도 아니라면 청성은 왜 있는 거야? 이럴 바엔 화신 길드가 강남까지 관리해 주는 게 낫지!”
청성에 대한 지역 내 시민들의 감정은 심각하게 악화되어 있었다.
일처리를 워낙 철저히 하던 청성에선 이 정도의 대형 사건이 외부로 새어 나가 터진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더욱 파장이 커지게 된 것이다.
“누구하고 엄청 대비되네.”
“내 말이, 애초에 괜히 원수지간인 게 아니었다니까.”
더군다나 성현은 얼결에 이번 이슈를 통해 이득을 보게 되었다.
결계 안에 있던 청성의 길드원을 전멸시켰다는 성현의 행적.
단순히 악연 탓인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전의 원한 때문에 싸우던 게 아니라 시민들을 구하기 위함이었다며.
자연히 황석일의 학살을 막은 그의 주가가 갈수록 상승했다.
몬스터로부터 시민들을 구한 것과 더불어,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둘의 차이에 여론은 성현의 쪽으로 완전히 쏠려 버린 것이다.
물론 워낙 강한 기반의 세력이다 보니, 시민들이 들고일어난다고 해서 청성을 내쫓거나 하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불만과 여론만으로도 청성에게 제법 큰 부담과 리스크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청성은 서울 안에 화신 길드라는 강력한 숙적을 두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내부의 민심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번 일이 터지고 나서 청성은 부랴부랴 대처에 나섰다.
청성의 요구에 입을 굳게 닫고 있던 언론사들은 뒤늦게 여론 눈치를 보며 늦장 기사 써서 올리기 시작했고.
청성 길드는 공식적으로 사과 발표에 나섰다.
S급 던전이라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 겁에 질린 소속 헌터들이 독단으로 저지른 범죄 행위가 내부 조사 과정에서 밝혀졌다며 서둘러 꼬리 자르기에 나섰다.
역시 녀석들다운 대처였다.
허나 그런 발표 하나로 쉽게 잠잠해질 만한 사안은 아니었다.
워낙에 충격적인 일이다 보니 한번 타오른 불길은 쉽사리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특히나 이미지 관리를 열심히 해 온 청성과 한인호의 평판엔 크나큰 타격이 되었고, 꽤나 곤욕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겨우 이것만으로 청성의 몰락을 바랄 순 없겠지. 이거 하나로 몰락할 거라면 진즉에 사라졌을 놈들일 테니까. 하지만 덕분에 일반인을 대상으로 강압적인 조사를 벌이는 데엔 당분간 제동이 걸릴 거야.’
최근 성현을 잡기 위해 조금이라도 의심이 되는 이들을 잡아들이고, 폭력적인 수단까지 동원해 가며 단서를 쫓고 있던 청성이었다.
하지만 당분간 놈들은 그런 짓을 하고 다니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청성이라고 한들 이 정도로 민심이 악화된 상태에서 그런 짓을 벌이고 다니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다.
황석일이 죽은 이상, 길드 방침까지 어겨 가며 무리해서 조사에 나설 이도 없을 테고.
‘혹시나 싶어서 강일훈에게도 확인해 봤는데, 당분간은 안심해도 될 거라고 하니 걱정은 덜었어.’
녀석이 의도한 건 아니지만 적진 안에 내부자가 있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쓸모가 많았다.
아무튼 이번 사건으로 청성의 움직임을 소극적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성현으로선 비교적 부담 없이 움직일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일은 힘을 키우는 것뿐.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S급 헌터의 세계에 발을 들인 성현이었다.
여전히 더 강해지는 데 집중해야겠지만, 이제 그는 본격적으로 청성을 비롯한 세력들과 맞설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지하실의 던전은 성장을 위한 최고의 장소였지만, 더 이상 이곳에서만 틀어박혀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에 확실히 느꼈어. 내 힘과 수하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던전 바깥의 세력도 필요하다. 언제까지고 청성의 발치 아래에서 눈치만 보며 몰래 숨어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앞으로의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서는 청성의 눈을 피해야 하는 성현의 움직임만으로는 부족했다.
모두의 시선이 닿는 양지에서도 자신을 위해 움직여 줄 수 있는 그의 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준영이 말했듯 개인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법이지. 그렇다면 나도 길드를 만들어 놈들에게 대항한다.’
“주군,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의 곁에 이즈나가 다가와 보고했다.
그러자 성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선 산맥 아래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후우우웅!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그의 눈에는 던전의 세 번째 필드가 훤히 내려다 보였다.
온통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설원 지대.
날카로운 빙하 협곡들이 곳곳에 휘몰아치듯이 있는 모습이었다.
“세 번째 필드엔 또 다른 마족이 있다고 했지?”
“네. 굉장히 강한 녀석들입니다.”
“그렇다면 더 좋고.”
외부에 세력을 만들어 놔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헌터들을 믿을 수 없었다.
이 너저분한 업계에서 서로를 배신하고 등을 찌르는 일은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일이었다.
앞으로 거대한 적들과 맞서 싸울 성현으로선 오히려 어설픈 아군이 더 큰 위험 요소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그림자가 된 수하들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고블린이나 스켈레톤 같은 몬스터가 바깥에서 활동할 수야 없는 일이지만, 지금 그의 앞에 선 뱀파이어의 군주 이즈나는 달랐다.
약간의 교육만 시켜 준다면 외부에서도 멀쩡히 사람처럼 활동할 수 있는 마족이었고, 이는 그녀 휘하의 모든 뱀파이어가 마찬가지였다.
성현은 바로 이들을 이용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길드와 세력을 구축할 작정이었다.
‘다만 아무래도 숫자도 적은 고급 인력이다 보니, 이미 연금술과 마법 부여 같은 일들로 바쁜 뱀파이어만으로는 부족해. 인원을 조금 더 충원할 필요가 있다는 거지.’
고급 인력 충원을 위한 대규모 강제 채용.
다음 필드를 지배하고 있는 마족들이 바로 그 대상이었다.
“가자.”
쿠웅!
이즈나, 게아드, 칼라일 등.
성현의 뒤편에 선 여덟의 군주들이 동시에 그의 뒤를 따랐다.
물론 예전처럼 천천히 영역을 넓혀 갈 생각 따윈 없었기에 군주들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묵직한 대검과 핼버드를 들고서 늘어서 있는 50기의 데스 나이트.
그리고 경계의 산맥을 가득 메운 8천의 악령 병사 군단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아아아아!”
산맥을 쩌렁쩌렁 울리는 악령 병사들의 포효와 함께, 성현은 새로운 필드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세 번째 필드 ‘칼날 협곡’에 입장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