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그림자의 왕
S급 던전을 홀로 토벌해 낸 성현.
기절하듯 쓰러졌던 그는 다음 날이 되어서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천태성이 왔었지……. 조금만 늦었다면 큰일 날 뻔했어.’
소파 위에 앉은 성현이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했다.
비약의 부작용으로 쓰러졌던 그는 꼼짝없이 이즈나에게 업힌 채 던전에서 들려 나왔다.
덕분에 수하들의 소환을 서둘러 해제한 뒤, 헌터들이 던전에 들어서기 직전에 몰래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만약 그때의 몸 상태로 던전 안에서 천태성과 마주했다간 큰 낭패를 보았을 것이다.
‘이제 몸은 멀쩡히 움직이네.’
하루 사이에 몸 상태를 모두 회복한 성현이었다.
무리하게 비약을 중복 복용한 부작용이라고는 해도 영구적인 손상을 입는 것은 아니었고.
더 성장해서 그런지 과부하에 대한 회복도 빨랐다.
놈들에게 꼬리를 밟히지도 않고, 일들을 모두 잘 마무리 지은 듯한 상황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아직 한 가지가 더 남았다.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해.’
성현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쯤이면 이번 던전에 대한 소식들이 엄청난 화제를 모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화제가 수그러들기 전에, 성현은 청성 놈들에게 거하게 엿을 먹여 줄 작정이었다.
* * *
“야, 너 어제 그거 들었어?”
“S급 던전 말이야? 당연히 들었지. 여기서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었잖아.”
길을 나란히 걷던 학생들이 호들갑을 떨며 이야기를 나눴다.
어제부터 서울 전역을 뜨겁게 달구던 화제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으… 죽은 사람만 수천 명이라는데 끔찍하다. 우리 동네에 그런 게 생겼다고 생각해 봐. 꼭 몬스터니 뭐니 무감각해질 때쯤에 이런 일이 한 번씩 터진다니까. 무섭게시리.”
“그래도 원래 수만 명 죽을 거, 던전을 클리어해 낸 거잖아.”
“맞아. S급 헌터 이번에 새로 나타났다면서.”
S급 헌터 이야기가 나오자, 떠들던 그들의 눈이 번뜩였다.
결계 안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일이 큰 화제를 몰고 왔지만.
그 S급의 던전을 혼자의 힘으로 클리어하고, 대참사를 막아 수많은 사람들을 구한 헌터가 있었다.
당연히 이번 참사에 쏠린 시선만큼이나 모든 이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 인물이었다.
일이 벌어진 서울뿐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새로운 S급 헌터의 등장에 주목했다.
“위기의 순간에 나타난 S급의 네크로맨서라니…….”
“음, 이게 진짜 헌터지.”
절망적인 상황에서 S급의 보스 몬스터를 격파해 15만 명의 사람들을 결계 안에서 구해 낸 성현의 활약이었다.
그것도 단순히 던전만 깨고서 나 몰라라 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소환수를 부려 몬스터에게 공격받는 시민들의 피해를 최소화시키기까지 했으니.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영웅이나 다름없는 행적이었다.
“수만 마리나 되는 소환수 군단을 이끌고서 몬스터를 쓸어버리는 모습이라니. 나도 한 번쯤 직접 보고 싶다. 물론 멀리 떨어져서.”
“근데 그거 말이야……. 정말일까? 솔직히 그 정도까진 아닐 것 같은데. 몇백 마리 정도 되는 걸 과장 섞어 말했겠지.”
“뭐야, 너 설마 그 사진 못 봤냐?”
“사진? 무슨 사진?”
어리둥절한 채 말하는 친구의 물음에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성현이 이번에 큰 주목을 받게 된 요인 중엔 그가 지닌 파격적인 능력도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자, 이거 봐.”
남학생은 핸드폰을 꺼내 들어 저장해 둔 한 장의 사진을 친구에게 보여 주었다.
화면 안에는 서울 상공에서 결계 안쪽을 찍은 넓은 구도의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이… 이거 뭐야? 이게 다 소환수라고?”
“나도 처음엔 합성인 줄 알았다니까.”
사진을 들여다본 학생은 저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군단과 그림자로 뒤덮인 도심의 거리들.
아예 도심의 한쪽을 가득 채운 성현의 군단에 거리는 온통 일렁이는 검은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한 장의 사진 덕에 어제부터 인터넷상에선 뜨거운 반응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 정도 규모의 소환수 무리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아무리 네크로맨서라고 해도 파격적인 일이었고, 모든 이들이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현존하는 모든 S급 헌터들을 따져 봐도 흉내조차 낼 수 있는 이들이 없었다.
이 말도 안 되는 모습에 처음엔 진위를 의심받기도 했지만.
이번 사태 때 결계 안에 갇혔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실상의 목격자였던 탓에 그런 의심과 논란은 금방 수그러들었다.
“역시 S급은 아무나 달 수 있는 게 아니구나.”
“그럼,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완전히 괴물들만 있는 등급이니까.”
학생들은 잠시 멍하니 사진에 시선을 빼앗겼다.
네크로맨서.
시체를 조종한다는 기피 직업이었음에도, S급이라는 딱지가 붙자 모두가 선망하는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S급 헌터가 가지는 의미는 그랬다.
“그런데 그 정도 실력의 헌터가 여태 정체까지 숨겨 가면서 청성을 공격하던 건 왜 그런 거지?”
“글쎄, 얼굴까지 가리고 다니는 걸 보면 뭔가 원한이 있나 보지. 솔직히 대형 길드들 뒤에서 구린 짓 하고 다니는 거 다 알잖아. 청성은 그나마 다른 곳보다 훨씬 낫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말소리를 줄여 가며 수군거렸다.
대형 길드들이 저지르는 잘못에 관해선 사실상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번 일만 봐도 고위 헌터와 대형 길드들이 없었다면, 시민들은 몬스터의 습격 에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생존의 문제가 그들의 손에 달린 이상, 어지간한 잘못들은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돈만 많은 부자들조차 법의 심판을 교묘하게 비껴가며 호의호식하던 세상이었는데.
던전이 생겨난 이후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힘을 초월한 각성자들을 동일한 기준에서 법의 테두리 안에 가둬 둘 수 있을 리 없었다.
“맞아. 그러고 보니 인터넷에 이상한 썰이 좀 돌아다니더라고. 결계에 갇혀 있던 시민들을 청성의 헌터들이 마구 죽였다는데 혹시…….”
“야, 야. 아무리 그래도 그런 걸 주워듣고선 믿냐? 제정신이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또 이상한 걸 주워듣고 온 친구의 말에 그는 황당하다는 듯 대꾸했다.
던전이 발생한 상황에서 헌터가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다니.
가끔 뉴스에 나오는 막장 삼류 길드나 할 법한 짓이었다.
서울을 양분한 대형 길드인 청성에서 그런 일을 벌였을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긴… 이건 좀 말이 안 된다.”
녀석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정말 그런 일이 벌어졌으면 지금쯤 난리가 났어야 정상일 터.
하지만 인터넷에 썰로 돌아다니는 게 전부였다.
주제를 돌리려는 듯, 그가 번뜩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맞아. 그러고 보니 이번에 나타난 네크로맨서, 이명이 뭐래? S급 헌터면 이명이 붙었을 거 아니야.”
* * *
S급 헌터들은 말 그대로 헌터의 정점에 다가선 자들이었고, 그만큼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단순히 A급에서 한 단계를 넘어선 것 이상의 의미.
헌터로서의 기본과도 다름없는 공격대의 개념조차, S급 헌터들은 홀로 활동하며 던전을 공략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사실상 세상을 주도하는 입장인 데다 그 아래의 헌터들과는 차원이 다른 강함을 지니고 있는 이들.
하지만 대중이 가장 알기 쉬운 차별점은 따로 있었다.
독사 한인호, 염제 최성준 등.
S급 헌터들에겐 각자의 특징에 맞는 이명이 붙어 함께 불리곤 했다.
더욱이 성현의 경우 가면을 쓴 채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정체불명의 네크로맨서였기에 그를 지칭하기 위해 더욱 빠르게 이명이 붙게 되었다.
그림자의 왕, 영왕(影王).
S급 헌터임을 인정하는 새로운 이명이 그에게 붙었다.
“하, 영왕이라.”
청성의 길드장, 한인호.
그는 성현이 세간에게서 받은 이명을 읊조렸다.
이제 막 S급에 들어선 녀석에게 ‘왕’이란 수식어가 붙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그의 이번 등장이 임팩트가 있었다는 뜻이었다.
‘확실히 그 이름이 과분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 저만한 규모의 군단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걸 보면, 분명 S급 특성을 지닌 녀석일 테니.’
S급 특성을 지니고 있는 소유자가 지닌 잠재력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는 바.
다만 청성에겐 길드에 방해가 되는 걸림돌이었고, 당장이라도 잡아 죽여야 할 상대였다.
하지만 한인호는 조바심을 내지 않기로 했다.
녀석이 S급 헌터가 된 이상, 어떤 방식으로든 조만간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신경 쓰이는 다른 일이 있었다.
“그쪽 일은 좀 어때?”
한인호가 슬쩍 옆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옆에 선 직원이 재빨리 대답했다.
“예. 제대로 당부를 해 둔 만큼 이번 민간인 학살 건이 수면 위로 올라올 일은 없을 겁니다.”
결계 안에서 황석일과 그의 팀원들이 벌인 미친 짓에 대한 이야기였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일엔 도가 튼 황석일의 솜씨대로, 목격자 한 명 없이 모두 깔끔하게 처리되었어야 했다.
일반인이 우연히 목격한다면 같이 처리될 뿐.
최소 B급 이상의 고위 각성자들이 허술하게 목격자 하나 제대로 못 알아채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비각성자들에 대한 사냥 중간에 불청객이 난입하며 그들의 일처리는 완전히 엇나가고 말았다.
자기들이 사냥당해 죽는 와중에 입막음을 할 수 있을 리 없었고,
청성의 헌터들이 학살 중에 마저 죽이지 못하고 놓쳐 버린 인원만 최소 백여 명 이상이었다.
당연히 이에 대한 말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운 좋게 살육 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피해자와 목격자들은 큰 충격에 빠진 채 이번 일에 대해 목소리를 내었다.
청성에 직접 찾아가 정식으로 항의하거나, 언론사에 제보하고, 아예 시위에 나서려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모두 금방 묻혀 버렸다.
그런 게 통할 리가 없었다.
그들의 행동은 완전히 방법부터가 잘못되어 있었으니까.
소리를 내야 할 언론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고, 시끄럽게 떠들던 이들은 하나둘 입을 다물게 되었다.
“남은 목격자들도 조만간 헌터들을 보내 모두 처리할 예정입니다. 너무 급하게 진행하다간 이야기가 더 새어 나갈 수 있으니 속도를 조절하고는 있지만, 길어야 이틀 안에는 모두 끝낼 수 있을 겁니다.”
결계 안에서 황석일이 벌인 짓들에 대해선, 청성에서도 바로 알아채지 못해서 대응이 늦어지긴 했다만.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나온 순간부터 청성은 재빠르게 대응하기 시작했다.
어설픈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어 봤자, 되레 쥐도 새도 모르게 입막음을 당할 뿐.
“그래, 간단한 문제라니까.”
한인호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청성의 입장에서도 꽤나 부담스러울 수 있는 이슈였지만, 늘 그래 왔듯이 조용히 묻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찮은 비각성자 놈들이 몇 명 모여 떠들어 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다른 직원이 헐레벌떡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대, 대표님! 큰일입니다! 학살 건에 대해서 완전히… 놈들이 완전히 물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뭐?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이걸 보십시오!”
인상을 찌푸린 한인호는 직원이 건넨 화면을 바라봤다.
분명 완전히 묻혀 버렸어야 할 이번 사건에 대한 소식이.
화면을 가득 메울 만큼 수도 없이 채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