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백귀야행 (5)
후웅!
예리한 칼날이 성현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황석일이 그를 더욱 몰아붙이고 있는 상황.
하지만 성현의 눈빛은 더없이 차분한 상태였다.
‘보인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따라잡기도 버거웠던 녀석의 움직임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성현의 눈동자.
자신을 압박해 들어오는 황석일의 움직임이 훤히 보였다.
놈의 검격을 모두 반응하며 받아치는 중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공격도, 성현은 마치 계산이라도 했다는 듯이 수차례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건…….’
성현을 직접 상대하고 있던 황석일도 그 변화를 확실히 느꼈다.
아예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그의 움직임은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방금 그 포션이 변곡점이었나.’
황석일도 던전과 결계가 생겨난 이후 도핑을 하긴 했다.
어느 정도 급이 되는 헌터들에게 도핑이란 일상과도 같은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성현이 마신 것과 같은 수준의 비약은 최상위 헌터들조차 손에 넣기 어려운 최상 등급의 품질이었다.
그리고 성현은 그걸 세 개나 중첩 적용한 것이다.
반응 속도가 극한에 가까운 수준으로 증폭되며, 상대의 움직임을 훤히 읽을 수 있었다.
거기에 민첩 스탯이 대폭 상승하며 몸이 따라 주었다.
이미 도핑으로 인해 증가되었던 능력치를 또다시 비약의 효과가 상승시키면서 효과가 더욱 증폭되었다.
카앙!
되레 기세를 끌어올리며 황석일을 압박하기 시작한 성현.
뭔가 심상치 않은 흐름에 석현준은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흐름이 바뀌었잖아? 이거 잘못 했다간 당할 수도 있겠는데.’
저 가면을 쓴 네크로맨서가 황석일을 이길 수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던 그였다.
무려 S급에 근접했던 그를 이길 수 있는 전력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생각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만히 지켜볼 수 없겠어.’
석현준은 조용히 자신의 검을 잡았다.
자신과 싸우려 들던 서준영은 이미 쓰러져 있었고, 방해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격렬한 싸움에 정신이 팔린 성현의 등 뒤를 노리며 다가섰다.
하지만 그가 성현을 향해 달려들려던 순간.
카앙!
갑작스럽게 나타난 칼날에 그는 간신히 검을 들어 막았다.
묵직한 충격으로 인해 석현준의 몸이 주르륵 밀려났다.
“무슨……?”
“네놈 따위가 방해하게 둘 것 같으냐?”
뱀파이어 로드, 이즈나가 휘릭 검을 치켜들었다.
이미 청성의 길드원 한 명을 처치하고 온 그녀였고, 다른 조무래기가 성현의 싸움을 방해하게 둘 생각 따윈 없었다.
“너는 또 어디서 튀어나온 녀석이지? 저 녀석과 한패인가?”
“그딴 건 알 거 없다, 하등종. 당장 치워 주지.”
그녀의 손에 붉은 마력이 일렁였다.
쾅 소리와 함께 요란한 화염 폭발이 일어나며, 석현준을 성현이 있는 곳에서 떼어 놓았다.
“슬슬 눈에 보이는군.”
한편,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던 황석일이 입을 열었다.
“네놈에 대해선 아직 모르겠지만… 몬스터를 주로 상대했지 제대로 된 헌터와 겨뤄 본 경험은 많지 않아.”
“입 다물어.”
스스스슷!
자세를 취한 성현은 자신의 검에 검은 기운을 실어 넣었다.
정직한 방향으로 휘둘러져 오는 성현의 검격.
뻔한 그 공격을 간단히 흘려 내려던 황석일은 순간적으로 몸을 빼내었다.
쩌어어억!
성현의 검이 건물의 벽면을 통째로 갈라 버렸다.
검에 그림자를 씌움으로써 위력이 강화되었고, 벨 수 있는 범위조차 늘어나 건물의 벽면을 통째로 일도양단하게 된 것이다.
심상치 않은 기운에 본능적으로 몸을 빼내지 않았다면 황석일의 몸도 함께 반 토막이 났을 것이다.
“위력이 대단하군. 하지만 검을 든 고위 헌터 간의 싸움에서 기술의 위력 따위 큰 의미가 없지.”
두꺼운 갑피와 비늘로 무장한 몬스터와 달리 사람을 상대할 땐 그만한 위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단지 서로의 급소를 찌르면 죽는 그런 싸움에선.
심장과 목을 도려낼 정도의 힘만 들어가 있으면 되었다.
카아앙!
속도를 살린 검격이 거침없이 쏟아졌다.
갑자기 속도를 더 끌어올린 황석일은 주도권을 완전히 쥐고 성현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성현이 비약을 마심으로써 바뀌었던 흐름이 또다시 바뀌고 있었다.
‘갑자기 이렇게까지 변하다니……?’
“네게 벽을 느끼게 해 주마. 과거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콰과과광!
“커헉!”
튕겨져 나간 성현은 복부를 움켜쥐었다.
방금 얻어맞은 한 방에 내장이 진탕이 된 게 느껴졌다.
피를 한바탕 토해 낸 그는 서둘러 인벤토리에서 치유 포션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다가와 있는 황석일의 모습이 보였다.
“똑같은 수에 두 번이나 당해 줄 것 같나?”
콰아아앙!
강력한 발길질에 얻어맞은 성현은 잔해 속에 파묻혔다.
난생처음 보는 인벤토리의 기능에 당황해 손을 못 쓰는 건 한 번뿐이었다.
두 고위 헌터가 싸우면서 포션을 마실 여유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크윽… 젠장…….’
만신창이가 된 성현이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방금 입은 대미지가 상당했는지 피투성이인 몸이 쉽사리 말을 듣지 않았다.
“네 잘난 소환수들은 어디에 있지! 그런 여유를 부리고도 날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황석일이 거칠게 소리치며 다가왔다.
그딴 시체들 따위 아무리 불러와 봐야 소용없겠지만, 발악을 해야 밟을 맛이 나는 법.
원한다면 당장에라도 목을 베어 죽여 버릴 수 있겠지만.
동생의 원수인 저 녀석을 곱게 죽여 줄 수야 없었다.
‘젠장, 내가 정정당당하게 싸우고 싶어서 혼자 싸우고 있는 줄 아나.’
성현이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게아드나 안카라스 같은 다른 보스급 소환수들은 이미 주변에서 접근하려던 청성의 헌터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싸우고 있는 녀석들을 불러와 봤자 청성의 헌터들도 소란이 발생하고 있는 이쪽으로 합류할 것이었고, 그러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그렇다고 남겨 두고 온 일반 소환수 군단을 부를 수도 없었다.
이미 대규모의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있는 데다 던전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몬스터들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언제 던전의 주인이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오히려 이곳의 헌터 놈들을 서둘러 처리하고, 그쪽을 도와주러 가야 할 판이었다.
콰드득!
성현은 땅을 움켜쥐며 팔을 짚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다. 여기 편히 누워 있을 시간이 없어.’
어릴 적 던전을 나온 몬스터에게 부모님을 잃었던 성현이었다.
이 안에 있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비극을 겪도록 하고 싶진 않았다.
여기 있는 황석일을 막지 못하면 또다시 학살이 시작될 것이었기에 그는 쓰러질 수 없었다.
“그래, 벌써 포기하면 섭하지. 어디 한 번 더 발악해 봐라. 너 같은 벌레 놈들에겐 그편이 더 잘 어울리니까.”
자리에서 일어선 성현의 모습에 황석일이 씨익 웃었다.
스스로 죽여 달라고 빌 때까지 실컷 가지고 논 다음 죽여 줄 생각이었다.
“후우…….”
검을 쥐어 든 성현은 잠시 눈을 감고서 심호흡을 했다.
온몸의 통증을 누르고, 머릿속을 정리했다.
“가만히 쉴 시간을 줄 거 같나!”
황석일은 곧장 땅을 박차고 그에게 쇄도했다.
그러자 성현은 번쩍 눈을 떴고, 놈의 검을 받아쳤다.
카앙!
바짝 붙은 거리에서 두 검이 번쩍이며 수십여 합을 주고받았다.
황석일은 또다시 성현에게 한 방을 먹여 바닥을 나뒹굴게 만들려고 했지만, 놀랍게도 성현은 그의 맹공에도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당황한 황석일의 눈빛이 흔들렸다.
오히려 부상을 입기 전보다 빨라진 움직임.
아니, 이건 단순히 빨라진 것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뒤늦게야 깨달은 황석일은 경악하고 말았다.
“네, 네놈 설마……!”
“충고 고맙다. 앞으로 두고두고 써먹어 주지. 이곳에서 살아 나간 다음에도 말이야!”
카앙!
위협적인 급소만을 노리며 뻗은 성현의 검로.
그것도 모든 검격엔 불필요한 힘이 과하게 들어가지 않았다.
정확히 상대의 목숨을 앗아 갈 수 있는 위력만을 담아 검을 휘둘렀다.
덕분에 그는 비약적으로 빨라졌던 속도를 극한으로 활용하며 황석일에게 속공을 퍼부을 수 있었다.
이는 방금까지만 해도 황석일이 그를 향해 사용하던 방식 그대로였다.
‘내 움직임을 보고서 바로 터득했다고? 말도 안 돼.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슨 비법이나 노하우 같은 것이 아니었다.
헌터를 상대로 한 최적의 전투 스타일로, 수없이 많은 경험이 축적되면서 그의 몸에 절로 익어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런 경지에 오르기까지 오랜 수련과 경험을 쌓고, 몇 번의 죽을 고비도 넘겼다.
한데 그런 그의 정수를 성현은 딱 한 번 상대해 보고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 녀석은 설마… 벽을 넘어설 재능을 가졌단 말인가?’
모든 걸 쏟아부었지만, S랭크라는 벽 앞에 좌절했던 황석일이다.
S급의 벽을 넘기 위해선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자질과 재능이 필요했고, 황석일은 그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한데 그 넘을 수 없는 자질을 이 녀석은 가지고 있었다.
“우… 웃기지 마라! 건방진 녀석이!”
성난 황석일이 소리치며 검을 휘둘렀다.
감히 이 따위 녀석이 그런 자질을 가지고 있다는 걸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건 변하는 건 없었다.
푸욱!
황석일의 복부를 관통한 성현의 검이 등을 뚫고 나왔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커억……!”
검을 떨어뜨린 그는 피를 한 움큼 토해 냈다.
급소를 이렇게나 깊이 찔려 버린 이상, 아무리 A랭크 헌터의 육체라고 해도 버틸 수 없었다.
“설령 절반이 희생당한다고 해도, 너희들은 살 가치가 없다. 남의 목숨으로 저울질을 하려 든 만큼 똑같이 당해 봐.”
“이, 이럴 순 없다……. 감히 네놈 따위가……!”
힘이 풀린 황석일이 털썩 주저앉았다.
동생의 원수조차 갚지 못한 채, 마지막에는 녀석에게 굴욕감과 열등감마저 느끼고 말았다.
하지만 검을 뽑아 낸 성현은 직접 녀석의 목을 치지 않고서 등을 돌렸다.
“먹어라.”
컹컹컹!
성현의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데스 하운드 무리.
입을 쩍 벌린 녀석들이 굶주린 듯 황석일에게 달려들었다.
“끄아아아악!”
으적으적 소리와 함께.
끔찍한 비명 소리를 토해 낸 황석일의 몸뚱이는 갈기갈기 찢어져 사라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칭호 ‘인간 사냥꾼’을 획득하였습니다!]
[사람을 대상으로 최대 10%의 추가 대미지를 입히고, 자신이 받는 피해는 5%만큼 경감시킵니다.]
“그래도 동생 녀석보단 영양가가 있군.”
퀘스트를 받았던 것도 아닌데, 성장할 계기가 되었던 덕인지 레벨이 꽤나 올랐다.
칭호 역시 앞으로 두고두고 쓰일 뛰어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앞으로 헌터와의 마찰이 생길 일이 많아질 텐데, 얻어 둬서 든든한 옵션이었다.
“해내셨군요, 주군.”
다가온 이즈나가 성현의 앞에 섰다.
그녀 역시도 청성의 A랭크 헌터인 석현준을 막 쓰러뜨린 참이었다.
제법 격하게 저항했는지 상처가 있긴 했지만, 군주급의 보스 몬스터인 그녀에겐 아무 문제가 없는 수준이었다.
“너도 수고했어. 빨리 합류해 준 덕에 방해를 안 받을 수 있었네.”
“아닙니다, 주군. 그런데 몸이…….”
“아!”
성현은 그제야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온몸이 피범벅이 되어 있었고, 통증과 함께 몸이 삐걱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 정도로 망가졌던 것도 잊어버린 채 싸우고 있었다니.
고개를 저은 성현은 인벤토리에서 치유 포션 두 병을 꺼내 삼켰다.
“후우.”
빠른 속도로 치유되고 있는 몸의 감각을 느끼며, 성현은 잠시 자리에 앉아 숨을 골랐다.
그러는 동안, 성현의 보스급 소환수들이 하나둘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크르르륵!”
게아드, 니아드라, 자고스 등.
군주와 우두머리급 소환수들이 각자 서너 명씩 맡아 가며 동쪽 구역에 흩어져 있던 청성의 길드원을 모두 제압해 냈다.
이즈나가 죽인 석현준을 비롯해 A랭크 헌터 둘은 제법 까다로운 상대였지만, 나머지 B랭크 헌터들이야 보스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흔적조차 남기지 말라는 성현의 지시대로, 청성의 헌터들은 모두 갈기갈기 찢겨지거나 먹어 치워졌다.
쿠웅!
마지막으로 와이번의 우두머리, 안카라스가 커다란 날개를 접으며 그의 곁에 안착했다.
“다들 모였군. 포션의 효과도 다 돌았고, 이제 일어나야지.”
성현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비약의 남은 지속 시간은 40분 남짓.
시간이 얼마 없었다.
“이제 놈들의 던전으로 가는 거군요.”
“그래,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지.”
고개를 끄덕인 성현은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봤다.
던전 안에 도사리고 있을 S급의 보스 몬스터.
방금 상대한 황석일이 좌절해 포기했을 만큼 S급의 벽은 높았다.
한데 다른 헌터들의 지원을 받기는커녕, 녀석들이 이런 짓을 벌여 놓은 탓에 혼자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사실상 승률이 희박한 싸움.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성현이 검을 다시 쥐어 든 순간.
[퀘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퀘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두 개의 퀘스트가 동시에 그의 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