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백귀야행 (4)
“큭……!”
흩날리는 파편 속.
청성의 길드원, 함석원은 급히 몸을 던졌다.
황석일의 명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그였지만, 갑작스레 나타난 몬스터의 습격에 급히 무기를 쥐어야 했다.
B급의 헌터인 그로선 어지간한 몬스터들 따위야 단숨에 두 동강을 내 버릴 수 있었지만, 지금 나타난 녀석은 급 자체가 달랐다.
“크아아아!”
벽을 꿰뚫고서 나타난 고블린 대족장 게아드.
순식간에 다가온 녀석은 함석원에게로 커다란 몽둥이를 휘둘렀다.
콰앙!
함석원은 몸을 날리며 간신히 몽둥이를 피했다.
하지만 커다란 충격파가 발생하며 직격당한 바닥이 우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 이런 미친……!”
콰과과광!
벽과 기둥이 움푹 꺼지며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충격파가 워낙에 강력하다 보니 아예 건물 한쪽이 반파되며 폭삭 내려앉은 것이다.
때문에 충분히 거리를 벌렸다고 생각했던 함석원마저도 그 아래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이딴 지랄 맞은…….”
잔해 더미를 치운 함석원은 급히 자신의 창에 기대어 일어났다.
하지만 그의 머리 위로는 이미 게아드가 사나운 기세로 달려들고 있었다.
“크아아아!”
아예 숨통을 끊어 버리겠다는 듯 집요하게도 쫓아오는 거체의 고블린 보스.
“그렇게 쉽게 당해 줄까 보냐!”
이빨을 까득 깨문 함석원은 있는 힘껏 창을 뻗었다.
그는 게아드의 복부를 찌르며 옆으로 날려 버렸고, 녀석은 그대로 벽에 내다꽂히고 말았다.
“크르르륵!”
하지만 금방 일어난 게아드가 이빨을 드러내었다.
분명히 상처를 냈지만 찌른 힘에 비해 창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이는 게아드가 지닌 질긴 피부 특성 탓이었다.
뭣보다 일반 몬스터가 아닌 보스 몬스터답게, 공격 몇 번 성공했다고 쉽게 죽을 만한 상대도 아니었다.
“젠장.”
함석원은 주르륵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 냈다.
보스 몬스터를 상대로는 같은 등급대의 헌터라고 해도, 공격대 수준의 인원이 필요했다.
한데 고작 B급 헌터 혼자서 게아드를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따돌릴 수 있는 속도도 아니고, 이대로 가다간 당한다. 지원 요청은 한참 전에 했는데, 이 자식들은 대체 언제 오려는 거지?’
함석원이 박살 난 교신기를 내려다보았다.
저 괴물과의 전투 중에 부서져 버리긴 했지만, 자신의 신호는 분명 주변에 있을 길드원들에게 갔을 터.
하지만 그에겐 불행하게도 다른 쪽 헌터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성현의 보스급 소환수들은 곳곳에 흩어진 청성의 헌터들을 쫓아 사냥하는 중이었다.
* * *
쿠구구궁!
“뭐지?”
석현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멀리 있던 건물의 일부가 폭삭 무너져 내리며 충격이 전해져 왔다.
거리가 멀어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까지 파악되지는 않았지만, A랭크의 고위 헌터인 그에겐 희미하게나마 느껴졌다.
하지만 단지 방금의 울림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전부터 곳곳에서 커다란 전투의 여파가 느껴졌다.
던전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일반 몬스터들의 수준으로는 불가능한 규모의 싸움에서 터져 나온 울림이었다.
“설마…….”
“네가 말한 동료들은 오지 않는군. 뭔가 잘못되었나 보지?”
서준영이 한 발 가까이 다가섰다.
그가 장담하던 것과는 달리 아직까지도 모여들지 않는 청성의 길드원들이었고, 여기서 몇 분이 더 지난다고 해서 올 것 같진 않았다.
“그럼 계속 싸워 볼까.”
“칫… 도망간 녀석들을 잡기엔 글렀군.”
석현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검을 들었다.
아무래도 다른 쪽에 문제가 생긴 듯했고, 놈과 혼자서 승부를 지으려면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두 헌터가 부딪히려는 그 순간.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쿠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그들의 사이에 떨어졌다.
“네겐 충분히 설명을 해 줬을 텐데.”
“너는…….”
청성의 A랭크 헌터, 황석일.
그가 뿜어내는 위압감에 서준영은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하필이면 최악의 상대가 찾아왔다.
“어째서 우릴 방해하는 거지?”
“그걸 몰라서 묻는 거냐?”
“헌터가 없으면 이 사회는 존속조차 되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도 대체가 불가능한 소수의 인적자원이니까.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당연히 비각성자 수천 명보다 상위 헌터 하나에 저울이 기울겠지. 너나 나 같은 A급 헌터라면 두말할 것도 없을 테고.”
“그래서 시민들을 죽였다는 소리냐? 사람의 목숨을 누가 멋대로 저울질할 수 있다는 거지? 네놈도 각성하기 전에는 저들과 똑같은 사람이었어. 운이 좋아서 능력을 얻었을 뿐이지.”
서준영은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하지만 황석일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어차피 같은 수의 희생이다. 오히려 결계가 열리기 전에 던전의 보스가 나타난다면 훨씬 많은 수가 죽겠지. S랭크의 보스 몬스터를 던전 밖에서 공략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는 알고 있겠지?”
아직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은 S랭크의 보스 몬스터의 존재.
그 자체가 규격 외의 존재이다 보니, 공략에 나설 땐 던전 안에 있을 때도 매우 신중해야 했다.
한데 사람들이 노출된 도심에서 S랭크의 보스와 싸웠다간 엄청난 피해가 생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도 서준영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딴 식으로 합리화해 봐야 너흰 민간인을 학살하는 쓰레기에 불과해. 그런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이해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말이 통하지 않는군. 헌터라고 해도 우릴 방해할 거라면 네놈도 죽는다.”
“여기서 살아남아 봐야 죽는 것만 못하겠지.”
“…그렇다면야.”
카아앙!
싸움은 순식간에 시작되었다.
서준영은 검과 방패를 치켜든 채, 전력을 다해 황석일에게 맞서 싸웠다.
하지만 싸움의 양상은 일방적이었다.
“크윽……!”
서준영이 전력을 쏟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황석일이 일방적으로 압도하는 그림만이 펼쳐졌다.
같은 A급이라도 지닌 힘의 차원이 달랐다.
성기사의 강인한 체력과 방어력을 지녔음에도 막아 넘길 수가 없을 만큼 공격의 무게가 달랐고.
속도는 눈으로 좇기에도 힘들 정도였다.
“이제 끝이다.”
콰과과광!
“커헉……!”
한참을 튕겨져 나간 서준영은 축 늘어졌다.
강인한 A랭크 성기사의 몸으로도 자가 치유 특성을 발동조차 시키지 못할 정도로 당해 버렸다.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는 몸뚱이에 서준영은 힘없이 황석일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나 강한 힘을 지녔으면서 어째서…….”
“고작 내가 지닌 힘 정도가 강해 보인다면, 네 힘으론 죽었다 깨어나도 S급 던전을 공략할 수 없다는 뜻이다.”
헌터 세계의 정점.
S급이란 그런 의미였다.
“이제 그만 끝내 주지.”
황석일은 무뚝뚝하게 검을 들어 올렸다.
여기까지가 끝임을 체념한 서준영은 눈을 감았다.
이런 식으로 죽게 될 줄은 몰랐지만, 최소한 후회는 없었다.
하지만 황석일의 검이 그의 목으로 떨어지려는 순간.
콰아아앙!
요란한 폭음과 함께 먼지구름이 시야를 가렸다.
무너진 벽 틈새에서 나타난 것은 뼈 가면을 쓰고 있는 성현이었다.
“황석일, 네가 있는 걸 봐선 잘 찾아온 모양이군.”
“네, 네놈은… 그때 그 네크로맨서……?”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성현의 가면을 본 황석일의 표정이 급변했다.
형언할 수 없는 살기가 그의 주위로 풀풀 새어 나왔다.
“설마 여기서 수백 명을 죽여 놓고, 동생 하나 죽었다고 억울한 척하려는 건 아니겠지?”
“죽여 버리겠다, 이놈!”
황석일은 단숨에 발을 박찼다.
동생을 죽인 성현을 알아보고서 이성 잃고 달려드는 녀석.
“감히 내 앞에 얼굴을 들이대!”
콰과과광!
그의 엄청난 괴력에 벽들이 연달아 무너져 내렸다.
워낙에 저돌적이다 보니 마치 인간이 아닌 몬스터를 상대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카가강!
성현은 연달아 물러서며 황석일의 공격을 막고 피했다.
강력한 힘에 공격을 막아 낼 때마다 팔이 욱신거리고, 무엇보다 따라잡기 힘든 것은 그의 엄청난 속도였다.
조금이라도 템포를 놓쳤다간 그대로 몸이 반 토막 나고 말 것이다.
‘하지만.’
밀려나고 있는 와중에도 성현의 눈빛이 빛났다.
그조차 간담이 서늘할 만큼 무시무시한 기세이긴 했지만, 상대는 동생의 죽음에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이렇게 평정심을 잃은 상태에선 자연스럽게 빈틈이 생긴다.
‘지금이다……!’
성현은 단숨에 태세를 바꾸며, 큰 동작에 뒤따른 황석일의 빈틈 사이로 검을 찔러 넣었다.
촤아아악!
하지만 그 순간.
황석일은 순식간에 몸을 뒤로 빼내며 공격을 피했다.
‘…조금 모자랐나.’
검을 찌르며 잡았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지만, 코트 자락이 잘려 나간 게 전부였다.
순간 보인 황석일의 속도가 너무 빠른 탓에 계산했던 것만큼 공격이 먹혀들지 않았다.
“…….”
한발 물러선 황석일은 잠시 자리에 멈춰 섰다.
반격을 시도한 성현의 시도에 더욱 미친 듯이 분노하며 달려들 줄 알았는데, 그는 오히려 숨을 천천히 고르며 평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방금의 일격은 위험했다. 네크로맨서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노림수가 날카로웠어.’
황석일의 눈은 어느새 이성을 되찾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성현이 어중간한 레벨대의 헌터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그의 동생인 황일우와는 달리, 황석일은 싸움 도중 분노에 완전히 사로잡혀 길길이 날뛰는 애송이가 아니었다.
분노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거나, 상대를 우습게 보고 방심하면 아무리 강해도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여태 그가 청성의 헌터로 활동해 오는 동안, 그런 식으로 죽는 녀석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다른 녀석들의 연락이 끊긴 건 모두 네놈 탓이었나. 이제부턴 제대로 상대해 주마.”
말투부터가 완전히 바뀐 황석일의 모습.
지금 속에서 치솟아 오르는 분노는 놈의 팔다리를 떼어 낸 뒤에 터트려도 충분했다.
‘이거… 생각보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어.’
황석일의 바뀐 모습에 성현은 직감했다.
동생의 죽음을 이용해 더욱 화를 돋우면서 싸움을 유리하게 풀어 나가려고 했는데, 그런 게 통할 것 같지 않았다.
황석일을 직접 담당해 본 적은 없어서 그저 전해 들은 게 전부였는데 단순히 이야기로 듣던 것 이상이었다.
카아앙!
다시금 달려든 황석일은 성현과 맞붙었다.
하지만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움직임이 달라졌다.
후웅!
뻗어진 황석일의 다리가 성현의 목을 노렸다.
그러자 성현은 급히 몸을 낮춰 녀석의 발길질을 피했다.
하지만 급하게 공격을 피하느라 자연스레 빈틈이 생겼고, 황석일은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콰과광!
“커억……!”
한참을 튕겨져 나간 성현이 잔해 더미 속에 파묻혔다.
검에 베인 것도 아닌 주먹에 얻어맞은 것뿐이었다.
하지만 마치 대포에 얻어맞은 것처럼 굉장한 충격이 전해졌고, 최소한 뼈가 몇 군데 부러진 게 느껴졌다.
“젠장…….”
“네크로맨서의 본체가 이 정도 전력을 지닌 건 인정해 주지. 하지만 기껏해야 A랭크대 초입. 그 정도 수준에서 겁도 없이 설치던 너 같은 놈들 따윈 수십 명도 넘게 죽여 왔다.”
황석일이 그를 향해 뚜벅뚜벅 다가왔다.
엄청난 살기를 풍기며 위압감으로 그를 짓누르려는 듯한 기세.
역시 S급의 문턱에 다가섰던 이답게, 보통의 A급 헌터와는 수준이 달랐다.
하지만 성현은 땅에 팔을 대고서 몸을 일으켰다.
“…그래? 하지만 이번은 다를걸.”
뭐든 처음은 있기 마련이다.
촤륵!
성현은 인벤토리에서 꺼낸 포션을 순식간에 들이켰다.
찢어졌던 피부가 아물었고, 부러진 뼈가 다시 붙었다.
기운을 차린 성현은 가뿐히 몸을 일으켰다.
역시 뱀파이어들이 만든 포션답게 회복 포션의 성능조차도 절륜했다.
“뭐지? 갑자기 어디서 그런 걸…….”
갑자기 허공에서 생겨난 포션에 황석일이 놀란 듯 반응했다.
하지만 성현은 연달아 인벤토리에서 물건을 꺼내 들었다.
[신록의 비약]
[등급 - 최상급]
[지속 시간 - 1시간]
[일시적으로 민첩 스탯이 큰 폭으로 상승하며, 반사 신경을 1.5배 끌어올립니다.]
아직은 도핑 포션을 마시지 않았던 성현의 상태.
가급적이면 보스와의 싸움 직전까지 아껴 두려 했던 수였지만.
지금의 성현에게 황석일은 모든 것을 쏟아붓지 않고선 절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신록의 비약’의 효과가 적용되었습니다!]
[일시적으로 민첩 스탯이 큰 폭으로 상승하며, 반사 신경을 1.5배 끌어올립니다.]
[경고 - 같은 종류의 비약을 중복 복용하면, 효과가 사라진 이후 부작용이 발생하게 됩니다.]
비약 하나를 비워 낸 성현의 앞에 떠오른 메시지.
하지만 성현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쥐고 있던 두 번째 비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상관없어.’
[일시적으로 민첩 스탯이 큰 폭으로 상승하며, 반사 신경을 1.5배 끌어올립니다.]
[일시적으로 민첩 스탯이 큰 폭으로 상승하며, 반사 신경을 1.5배 끌어올립니다.]
같은 효과를 지닌 비약을 무려 3개나 동시에 복용했다.
이미 부작용에 대해 한 번 실험을 해 본 적이 있는 성현이었다.
온몸이 끔찍한 후유증에 휩싸여 한동안 꼼짝도 못 하겠지만, 황석일의 저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선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그럼 2차전을 시작해 보자고.”
입을 쓱 닦아 낸 성현은 황석일과 마주했다.
비약의 지속 시간은 1시간.
그 시간 안에 모든 걸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