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백귀야행 (3)
콰아앙!
두꺼운 벽이 요란하게 부서졌다.
포탄이라도 떨어진 듯한 흔적이었지만, 가볍게 휘두른 검격에 불과했다.
쩌엉!
묵직한 소리와 함께 두 검이 부딪혔다.
키기긱 소리를 내는 칼날들 사이에서, 성현과 김필호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네크로맨서 주제에 검을 꽤 쓰는군. 하긴 보통 녀석이라면 감히 청성을 건드릴 생각조차 못 했겠지.”
키릭!
순식간에 몸을 움직인 김필호는 칼날의 방향을 비틀었다.
바짝 붙은 상태에서도 상대의 힘을 역이용해 변칙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었고, 성현은 재빨리 몸을 뒤로 빼내야 했다.
하지만 김필호는 그가 얌전히 거리를 벌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여태 네가 상대한 낙하산이나 산하 길드 놈들하곤 비교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카앙!
단숨에 거리를 좁혀 온 김필호가 검격을 퍼부었다.
변칙적이고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난격에 성현은 주르륵 밀려났다.
‘확실히 다른 녀석들과는 다르군.’
청성의 B급 헌터, 김필호.
성현이 이전에 상대했던 화백의 길드장 역시 B급 헌터였다.
하지만 김필호의 검격은 그때 상대했던 길드장보다 훨씬 정교했고,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특히 헌터를 어떻게 상대하고 베야 하는 지 정확히 알고 있다. 한두 번 해 본 일이 아니란 건가.’
역시 청성의 딱지는 아무나 붙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여태 그가 싸워 본 헌터들 중에선 가장 강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반면 성현은 급속도로 성장해 왔다고는 해도, 각성한 시간 자체는 결코 길지 않았다.
때문에 헌터와 직접적으로 싸움을 맞붙은 경험도 당연히 적었다.
청성의 일원 정도라면 허구한 날 다른 헌터들과 싸우고 죽여 왔을 테니, 이런 부분에선 비교도가되지 않을 것이다.
“어엇……?”
하지만 성현은 각성한 첫날부터 거대한 던전 아래에서 수많은 괴물들과 목숨을 건 싸움을 이어 왔다.
그렇게 해서 그는 지금까지 성장해 왔다.
위험을 무릅쓰고 쌓아 올린 그의 경험은 그깟 이류 헌터 수천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 값진 경험이었다.
콰아아앙!
달려들던 김필호의 몸뚱이가 순식간에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B급 헌터 따위, 더는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커억… 이걸 어떻게…….”
쩌저적 갈라진 바닥에서 김필호는 피를 울컥 토해 냈다.
성현은 놈의 목을 잡은 채 번쩍 들어 올렸다.
“부러뜨리기 전에 말해라. 황석일 어딨어?”
“컥, 자, 잠깐……!”
붙잡힌 김필호가 컥컥거리며 몸을 비틀었다.
성현의 손아귀 힘에 점점 숨이 막혀 왔다.
허나 이 상태에서 발버둥쳐 봐야 성현의 손이 더욱 강하게 조여 올 뿐이었다.
“그, 그만……!”
“황석일은 어디 있지? 마지막 질문이다.”
“아… 아직 결계의 동… 동쪽 구역에 남아 있을 거다……! 나도 이 이상은……!”
우드득!
성현은 김필호의 목을 부러뜨리곤 옆으로 내던졌다.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널브러진 녀석.
B급 헌터의 몸뚱이가 지닌 생명력 덕에 즉사하지 않고 고통에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신경을 끊어 놨으니 호흡조차 어려울 것이었기에 곧 있으면 알아서 죽을 것이다.
물론 그 전에 고통에 발버둥치다가 몬스터들의 먹이가 되겠지만.
성현은 김필호를 내버려 두고서 그 자리를 떠났다.
‘이런 미친 새끼들, 헌터라는 놈들이 몬스터를 잡진 못할망정 사람이나 죽이고 다니다니……!’
성현이 깨문 입술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믿기지 않는 사실 앞에 치솟는 분노는 감당이 되지 않았다.
황석일은 원래 청성 안에서도 미친놈 기질이 다분한 헌터였다.
한때 S급을 노리던 실력자답게 실력은 확실해도 그 과격함에 종종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그가 주도하는 팀의 성향도 자연히 그를 따라갔고, 수준은 천지차이였지만 동생인 황일우도 그 엇나간 점은 꼭 빼다 박은 것이었을 거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난리를 쳐 놓다니.
‘놈들이 벌여 놓은 짓 때문에 일이 배로 복잡해졌어.’
성현은 잠시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무의식적으로 걷긴 했지만, 아직 그가 향해야 할 방향을 제대로 정하지 않았다.
몬스터가 쏟아지고 있는 던전의 입구를 틀어막아야만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쪽에선 황일우와 놈의 팀원들이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사냥하고 있었다.
‘어느 쪽이건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거다. 최대한 더 많은 수를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몬스터로 인한 피해를 막는 것과 황석일의 미친 짓을 저지하는 것.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고민했다.
거들지는 못할망정 이딴 미친 고민을 하게 만드는 것부터 역겹긴 했지만.
지금은 분노보단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잠시 눈을 감고 머리를 차갑게 식힌 성현은 결정을 내렸다.
‘…선택 같은 건 안 한다. 양쪽 다 해치워 버리면 그만이지.’
어느 쪽이건 눈뜨고 지켜볼 수는 없는 꼴이었다.
물론 혼자서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나와라.”
후우웅!
성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며, 일곱의 휘하 군주가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부르셨습니까, 주군.”
“크르르륵!”
게아드, 이즈나, 니아드라, 올렉.
자고스, 안카라스, 메이트리아.
성현의 휘하에 있는 모든 군주와 우두머리급 소환수들이었다.
“본대는 계속해서 던전으로 전진한다. 계획대로 입구는 틀어막아야 하니까. 단, 우리는 따로 움직일 거다.”
“처리할 것들이 있군요. 어떤 녀석들입니까?”
“동쪽 구역의 청성 놈들을 사냥한다. 던전의 보스는 그다음이다.”
* * *
몬스터에게 쫓겨 대피한 수십여 명 사람들이 한 건물 안에 갇혀 있었다.
좀비들이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으니 감히 밖으로 나갈 생각조차 못 하고 숨을 죽이고 있는 사람들.
하지만 건물 밖을 서성이던 좀비들은 이미 처참한 시체가 되었다.
저벅.
청성의 A급 헌터, 석현준.
좀비를 모두 처치해 낸 장본인인 그는 건물의 잠긴 문으로 다가섰다.
하지만 그를 뒤쫓아 온 서준영이 급히 석현준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자, 잠깐……!”
“미리 경고하는데, 돕지 않을 거면 방해하지는 마라. 우리 덕에 살아남을 주제에.”
석현준은 그의 손을 팍 밀치고 지나갔다.
그러고는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렇게 양심이 찔리면 그냥 어디 구석에 조용히 박혀 있지 그래? 이쪽도 마냥 좋아서 하는 건 아니라고. 상사가 시키니까 하는 거지.”
“…….”
서준영은 그의 말에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저 안에 있는 시민들이 모두 살해당할 거라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이 이상 석현준을 막아설 수가 없었다.
콰직!
청성의 석현준은 결국 잠긴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허, 헌터님?”
“잠깐, 왜 그러세요!”
“조, 조심! 끄아아악!”
사람들의 끔찍한 비명 소리가 건물 밖으로 새어 나왔다.
생생한 피 냄새가 헌터인 그의 후각을 찔렀고, 서준영은 고개를 땅으로 떨구었다.
그는 소속 길드는 없어도 A랭크 용병으로서 꽤나 입지를 다져 놓은 고위 헌터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상대는 청성이었다.
옳든 옳지 않든 저들의 행동을 가로막았다간 끔찍한 보복이 돌아올 뿐이었다.
이곳 강남 지역에 발을 들여놓은 헌터인 이상, 청성 길드의 말은 거역할 수가 없다.
오늘 여기서 본 것은 평생 입을 닫고 살아야 할 것이다.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귀찮게 도망치지 마라. 한 번에 죽이기 힘들어지니까.”
무미건조한 석현준의 칼날이 올라가고.
그의 옆에 있던 벽이 무너졌다.
콰아아앙!
“그만해라. 쓰레기 새끼야.”
“하?”
석현준은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쓱 닦아 냈다.
그의 앞엔 결연한 표정의 서준영이 서 있었다.
“서준영, 네놈 정도면 이쪽 업계 돌아가는 꼴은 잘 알 텐데 뒷감당할 수 있겠어?”
석현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지금 그의 행동은 청성을 적으로 돌리는 일이었다.
운 좋게 여기서 살아남는다고 한들 소속조차 없는 일개 용병 헌터 따위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닥쳐. 이딴 미친 짓을 가만히 지켜볼 순 없다.”
청성이든 뭐든 상관없었다.
순식간에 돌진한 서준영은 석현준을 향해 다리를 휘둘렀다.
콰아아앙!
발길질에 얻어맞은 석현준이 반대편 벽을 박살 내며 그대로 튕겨져 나갔다.
동시에 밖으로 뛰쳐나간 서준영은 공포에 질린 시민들에게 외쳤다.
“이 틈에 다들 도망치십시오!”
“이 새끼가……!”
카앙!
석현준의 검이 매섭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서준영은 방패를 치켜들며 그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 내었다.
그러곤 바로 상대에게 역공을 가했다.
“큭……!”
전방을 맡는 탱커, 기사 계열의 클래스임에도 예리한 반격들이 이어졌다.
양쪽 모두 A급 헌터의 실력자인 만큼 어지간한 헌터들의 싸움에선 볼 수 없는 수준 높은 공방이 오갔다.
특히 석현준이 주로 쉴 새 없이 공격을 주도하며 매섭게 몰아붙였다.
하지만 서준영의 태세는 견고했고, 특히 왼손에 쥔 방패 때문에 유효타를 입히기 쉽지 않았다.
촤악!
하지만 기어코 방어를 비집고서 빈틈을 만들어 낸 석현준은 서준영의 왼쪽 다리를 깊게 베어 냈다.
다리를 베인 만큼 모든 움직임에 지장이 생길 수밖에 없을 터.
하지만 서준영은 아랑곳하지 않고서 힘차게 치고 나갔다.
“이 정도로 날 쓰러뜨릴 생각은 아니겠지!”
서준영의 몸 주위로 새하얀 빛이 감돌았다.
눈부신 빛은 왼쪽 다리의 깊은 상처를 순식간에 회복시켰다.
서준영은 성기사 클래스의 소유자였고, 그의 A랭크 특성이 발현되며 힐러의 도움도 없이 자가 치유를 해낸 것이다.
콰앙!
“크윽… 제법이네.”
방패에 얻어맞고 밀려난 석현준은 입가의 피를 닦아 냈다.
서로가 비등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고, 쉽게 결판이 나진 않을 터였다.
특히 회복 능력을 지닌 성기사를 상대로라면, 전력을 쏟아부어도 쓰러뜨리는 데 굉장히 오래 걸릴 것이었다.
“이대로 끝을 볼 때까지 싸우는 것도 좋겠지만… 여기까지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거든. 네 녀석 때문에 도망가 버린 녀석들도 잡아야 하니 말이야.”
“누구 마음대로 끝이지? 내가 널 놓아줄 것 같나?”
“물론 우릴 방해하게 둘 순 없으니 네놈은 여기서 끝내야지. 하지만 나 혼자는 아니야.”
“서, 설마?”
“싸움을 시작할 때 이미 교신기를 통해 신호를 보내 뒀다. 주변에 있던 길드원들이 곧 도착하겠지.”
‘…이런.’
그의 말에 서준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석현준 하나만 해도 쉽지 않은 상대였다.
한데 다른 청성의 헌터들까지 합류한다면 당연히 그에게 승산은 없었다.
하지만 서로를 대치하며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청성의 길드원들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여전히 잠잠한 분위기에 당황한 석현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쯤 최소 두세 명의 길드원들은 도착했어야 정상이었다.
교신기의 신호는 제대로 갔지만, 이는 주변에 있던 헌터들에게 사정이 생겨 버린 탓이었다.
콰과과광!
“제, 젠장! 이 녀석들은 뭐야!”
“조심해!”
흩어져 있던 청성의 길드원들을 공격해 오기 시작한 습격자들.
본분을 잊은 사냥꾼을 사냥하는 괴물들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