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백귀야행 (2)
결계의 서쪽 구역, 몬스터들에게 고립된 헌터 무리가 있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결계의 가장자리 부근까지 물러나지 못하고, 몬스터가 가득한 거리 한복판에 갇혀 버린 헌터들이었다.
헌터 수십여 명이 바리케이드를 치고서 저항했다.
하지만 고립된 상태에서 끝없이 몰려드는 몬스터들의 무리에 서서히 지쳐 가는 중이었다.
그때, 뒤편에서 나타난 어마어마한 기척에 모두의 시선이 뒤로 돌아갔다.
“뒤, 뒤에 저거 뭐야!”
“이런 미친!”
쿵쿵쿵!
말도 안 되는 숫자의 몬스터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며 다가오는 중이었다.
검은 그림자로 일렁이는 괴수들의 군단.
“틀렸어. 우린 끝장…….”
“어?”
하지만 괴수 무리는 헌터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마치 헌터들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곁을 조용히 스쳐 지나가는 녀석들.
놈들은 오히려 사람들을 잡아먹던 몬스터들을 가차 없이 베고 가르며 진군했다.
“이게 대체… 계속 지나가는데?”
“몬스터가 사람을 공격하지 않다니.”
헌터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우두커니 바라보고 섰다.
상식을 파괴하는 저들의 움직임이었다.
너무 엄청난 숫자라 이들이 누군가의 소환수라는 건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다.
“휴, 다가오는데 칼 안 휘두르기 잘했다. 괜히 성질 돋워서 죽을 뻔했네.”
“아무튼 덕분에 겨우 살았어.”
헌터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검은 그림자를 풀풀 풍기는 강력한 몬스터들이 옆을 숭숭 지나가니 여전히 간담이 서늘하긴 했지만.
방금처럼 미친 듯 몰려들던 야수 무리에게 죽는 것보다야 훨씬 나아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이는 말소리를 높였다.
“다들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반대편… 그러니까 이 몬스터들이 온 방향으로 이동해야 해!”
“맞아. 또 멍때리고 있다가 고립당할 순 없지.”
“바로 움직이자고. 부상자들부터 챙겨.”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던전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를 적대하는 괴수의 군단이었다.
군단이 지나쳐 온 자리에 있던 몬스터들은 방금 보았던 것처럼 모두 묵사발이 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이 틈에 서둘러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한 헌터들에게 한데 모여 전력을 합치고,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 준 셈이었다.
실제로 성현의 군단이 진격하면서 마주한 다른 곳의 생존자들도 그리로 이동하고 있었다.
“여기 있는 몬스터들… 끝이 없어요.”
“저희를 공격하지 않고 있으니, 이편이 차라리 저희에겐 안전합니다. 서둘러 움직이죠.”
살아남은 생존자 일행이 스켈레톤 군단의 곁을 지나갔다.
건물 안에 고립당해 죽을 뻔했던 그들이었지만, 이 몬스터들을 마주해 비각성자임에도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잠깐, 저기 좀 봐요!”
“하늘이…….”
솟구쳐 오른 펠뱃 무리가 결계 중앙에서 쏟아졌다.
결계를 만들어 낸 던전이 비행 괴수까지 쏟아 내고 있는 것이다.
중심부의 하늘을 가득 메운 녀석들은 사방으로 퍼지며 도심의 먹잇감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이, 이쪽으로도 오고 있어요!”
“건물 안으로…….”
“너무 늦어!”
벌써 가까워진 펠뱃 한 마리가 정확히 그들을 발견하고서 날아들었다.
당황한 생존자들은 간절한 눈빛으로 거리의 몬스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바로 옆을 지나고 있는 스켈레톤 전사들은 무심하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서 진격 중이었다.
“키이이익!”
“조심해요!”
생존자들이 엎드리며 눈을 질끈 감은 순간.
콰드드득!
“키에에엑!”
순식간에 날아든 와이번 한 마리가 펠뱃을 낚아채더니 놈을 으적으적 먹어 치웠다.
단숨에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펠뱃과 와이번에 사람들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 살았다.”
“이 몬스터들, 저희를 도와주려는 걸까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 빨리 움직입시다. 모두들 결계의 가장자리에 모여 있을 겁니다. 헌터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해요.”
마주하는 몬스터들을 철저히 절멸시킴으로써 성현의 소환수들은 시민들을 보호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서쪽의 가장자리 부근으로 모이게 함으로써 몬스터 앞에서는 무력한 시민들이 그들을 보호해 줄 헌터들을 만날 수 있게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그 덕에 시민들을 직접적으로 구하는 것 이상으로 더 많은 생명을 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엔 비행 몬스터들까지 나타난 건가. 아직도 내뱉을 몬스터가 한참 남았나 보군.”
하늘을 잠시 바라보던 성현이 말했다.
“도시에 난입한 펠뱃들은 안카라스와 와이번들이 처리하고 있습니다. 저 정도 숫자라면 금방 정리될 겁니다.”
성현의 옆에 선 이즈나가 보고했다.
실제로 하늘 곳곳에서 와이번에게 잡아먹히거나 화염 브레스에 휩쓸려 추락하는 펠뱃들의 모습이 보였다.
공중 몬스터 간의 싸움이라면 마땅히 피하거나 숨을 길도 없는 만큼 금방 정리가 될 것이었다.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건 조금 걸리지만, 이대로라면 금방 던전이 있는 곳까지 닿겠어.”
파죽지세로 밀고 나가는 성현의 그림자 군단은 서쪽 거리들을 빠르게 정리해 나가며 던전을 향해 다가서는 중이었다.
동쪽 구역에 모였던 고위 헌터들은 지금쯤이면 던전 안에 진입해 공략을 진행 중일 터.
하지만 나타나고 있는 몬스터들의 수를 봐서는 꽤 규모가 있는 던전일 것이었다.
내부에 헌터들이 진입했다곤 해도 마력 기둥을 지키고 있을 보스 공략을 위해 심층부로 들어갈 뿐.
모든 입구를 막아 낼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성현은 수하들과 함께 진격하며, 몬스터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던전의 입구 부근을 틀어막을 계획이었다.
시민들을 구하면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보스를 상대하는 것도 아니고 입구만 막으면 그만이라니, 간단한 일이군요.”
“아니, 놈들의 본대는 아직 나타나지도 않았어. 거기다 이 결계 안에 S급 헌터가 단 한 명도 없는 상황일 수도 있지.”
성현이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S급 헌터라면 양대 길드 중 하나인 청성 길드 내에서도 열 명도 되지 않는 숫자의 최고위 헌터들이다.
이 결계 안에 없을 가능성이 꽤 높았다.
문제는 그렇게 되면 이 던전을 공략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해진다는 것이다.
‘여차하면 나도 직접 들어가 함께 싸워야겠지.’
어차피 결계로 사방이 막혀 버린 만큼 도망갈 곳도 없다.
아무리 적대하고 있는 청성의 헌터라고 해도, S급의 던전 공략을 진행 중인 상황에서 자신을 잡으려 들진 않을 것이다.
후우웅!
그때, 와이번 한 마리가 날아들어 성현의 앞에 착지했다.
“무슨 일이야?”
“크륵! 크르륵!”
와이번은 자신이 하늘에서 본 것을 성현에게 보고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조금 떨어진 북동쪽 거리에서 시민들이 모인 대피소가 공격받는 것을 발견했다는 소식.
하지만 이상하게도 대피소를 공격하고 있는 건 몬스터가 아니라 인간이라고 했다.
“뭐? 대피소를 공격한 게 인간이라고? 잘못 본 거 아니야?”
“크르륵!”
확실하게 목격한 사실이라며 와이번이 장담했다.
그러자 성현은 인상을 슬쩍 찌푸렸다.
“혼란한 상황에 약탈자들이 생기는 건 종종 벌어지는 일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와중에 사람끼리 싸우고 있다고?”
약탈이고 뭐고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대피소를 공격하고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이해가 가진 않는 상황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직접 확인해 봐야겠군.”
가뿐히 몸을 날린 성현은 와이번의 등 뒤에 올라탔다.
“이즈나, 이쪽은 잠시 맡겨 둬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그리로 가자, 안내해.”
후우웅!
성현의 말에 와이번은 두 날개를 활짝 폈다.
단숨에 하늘을 날아오른 와이번은 단숨에 하늘을 가르며 이동했다.
굉장히 넓은 범위를 먹어 치운 결계의 크기라곤 해도 와이번의 속도 앞에선 금방이었다.
“저긴가?”
“크르르륵!”
아래를 내려다보는 성현의 말에 와이번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공격을 받은 듯 견고한 대피소의 입구가 부서져 있었다.
그리고 조금 더 거리가 가까워지고, 각도상 제대로 된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성현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려 버리고 말았다.
“이, 이게 무슨?”
대피소 입구에 수도 없이 쓰러져 있는 시민들의 시체.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있는 것은 몬스터가 아니었다.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달아나는 시민들을 헌터가 하나하나 잡아다가 베어 죽이고 있었다.
“이 새끼들… 대체 무슨 개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거야!”
성현은 단숨에 와이번의 등 뒤에서 발을 박찼다.
굉장히 높은 위치였지만, 지금의 그에겐 아무 상관이 없었다.
쿠우웅!
도로를 박살 내며 땅에 착지한 성현.
그의 주위로 흙먼지가 거세게 일었고, 시민을 쫓고 있던 헌터는 순간 제자리에 멈춰 섰다.
“헌터인가? 잠깐, 그 가면은 설마…….”
뼈 가면을 쓴 정체불명의 헌터.
성현의 정체를 알아본 듯한 남자의 눈이 길게 늘어졌다.
하지만 상대의 정체를 알아낸 건 녀석뿐만이 아니었다.
‘김필호, 청성의 B급 헌터.’
성현이 이미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황석일의 팀에 속해 있는 팀원이었고, 그렇다는 건 하필 그와 악연이 있는 황석일 역시 이 주변에 있을 확률이 높다는 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너희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다 본 거 아니었어? 헌터가 뭘 하긴 사냥 중이지.”
김필호가 이죽이며 말했다.
그의 온몸에 묻어 있는 핏자국은 물론.
부서진 대피소의 입구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풍기는 지독한 피 냄새들이 그가 얼마나 많은 살생을 했는지 알려 주었다.
“던전 공략은 어쩌고 여기서 이 짓거리를 하고 있냐는 소리다. 지금쯤이면 이미 진입했어야 할 텐데.”
“아, 그거 말한 거였어? 던전 공략… 진작에 포기했지.”
김필호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포기했다고?”
“실패할 게 뻔한데 죽으러 갈 필요는 없잖아. S급 던전에 S급 헌터가 없는데 가망이 있겠어? 사실 나도 그렇게 쿨하게 포기할 줄은 몰랐는데. 우리 팀장님 결정이거든.”
“하… 그래서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단 거냐? 결계를 빠르게 해제시키려고…….”
성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잠시 식혔다.
이 안에 있는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죽으면 결계는 해제된다.
성현도 분명히 인지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도망갈 곳은 없으니 어떻게든 공략에 나설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로선 미처 생각지도 못한 발상이다.
성현의 사고방식으로선 애초에 그런 선택지가 존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좀 머리를 써서 대피소들을 돌았지. 입구도 하나뿐이고, 죽이기 딱 좋게 모여 있으니 훨씬 편하더라고.”
“그만 입 다물어라.”
“물론 우리야 가만히 버티고 있어도 몬스터가 알아서 비각성자들을 정리해 주겠지만, 던전의 보스 녀석이 등장하기 전에는 처리해야 하거든. 절반이라곤 해도 상당히 많으니 일이 바쁘단 말이지.”
스릉!
열심히 떠벌리던 김필호는 검을 치켜세웠다.
“설마 이 결계 안에 있었을 줄이야. 마침 잘됐군. 네놈 하나 찾아다니느라 난리도 아니었다. 여기서 처리해 주지.”
청성 길드를 공격한 뼈 가면의 네크로맨서.
줄곧 찾아다니던 목표가 자신의 앞에 나타나 줬고, 곱게 보내 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러자 성현은 묵묵히 검을 뽑아 들었다.
“너희들 모두… 곱게 죽을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다.”